[네이버 열린연단] "과학은 서양 전유물? 천만에 중국이 앞서 있었다" - 이문규 교수 강연 '조지프 니덤과 동양의 과학' 발췌 요약
[네이버 열린연단] "과학은 서양 전유물? 천만에 중국이 앞서 있었다" - 이문규 교수 강연 '조지프 니덤과 동양의 과학' 발췌 요약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7.06.12 1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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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네이버문화재단이 후원하는 문화과학 강연 프로젝트 ‘열린연단:문화의 안과 밖’의 6월 10일 순서는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 강연 2섹션 과학/과학철학의 첫 번째 강연으로 이문규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의 '조지프 니덤과 동양의 과학'을 주제로 진행했다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북파크 카오스홀).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 강연은 34강에 걸쳐 새로운 시대로 도약을 가능케 한 역사적 인물 혹은 작품을 선정해 혁신적 사유를 조명해보는 ‘열린연단: 문화의 안과 밖’의 네 번째 강연 시리즈이다. <편집자>

이문규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는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과학사 및 과학철학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동아문화연구소 특별연구원, 포항공대 대우강사, 전북대 과학문화연구센터 전임연구원을 역임하고 현재 전북대 과학학과 교수로 있다.

주요 논문으로 「동양과학, 그 천년의 역정과 오늘의 의미」, 「중국 과학사를 말한다」 등이 있고 저서로는 『고대 중국인이 바라본 하늘의 세계』 등이 있다. 그밖에 『과학사 산책』, 『인문학으로 과학읽기』 등을 공저했다. 한국과학사학회 논문상(1996)을 수상했다. 다음은 '조지프 니덤과 동양의 과학' 강연 발췌 요약이다.

중국의 역사를 르네상스 이전과 같은 몇 세기 전의 유럽의 역사와 비교해본다면, 서로 다른 모습이었겠지만 같은 수준에 있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서양의 여러 나라들은 이미 새로워져 발달한 반면에 중국은 여전히 옛날 그대로인 상태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 무엇이 중국을 뒤처지게 했을까? 중국을 뒤처지게 만든 것은 중국에 과학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에는 왜 과학이 없었던가?’라는 질문은 20세기 중국의 대표적인 철학자라고 할 만한 펑유란(馮友蘭, 1894~1990)이 젊은 시절에 품었던 중요한 주제였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중국에 과학이 없었다는 주장을 드러내놓고 하는 과학사학자들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오히려 중국 전통 과학의 여러 분야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증적인 연구 성과가 축적되면서 어느덧 중국의 과학이 세계 과학기술사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더구나 중국의 과학사학자들은 과학기술이 인류 문명이 발전할 수 있었던 중요한 동력이라고 하면서, 중국이 세계 과학기술의 발달에 크게 기여했다고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정도에 이르게 되었다.

오늘 살펴 볼 조지프 니덤은, 중국에 과학이 없었다는 20세기 초반의 생각이 이처럼 크게 바뀌게 되는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던 인물이다.

널리 알려진 그의 대표적 저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Science and Civilization in China)을 보기 전 니덤의 이력을 간략히 살핀다.

조제프 니덤 <사진=위키백과>

니덤은 생화학자로 활발하게 활동했는데, 특히 1937년은 매우 중요다. 바로 이때 중국과의 만남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당시 세 명의 중국인 유학생이 케임브리지 대학 생화학과 대학원 과정으로 오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한 명이 루게이전(Lu Gwei-djen, 魯桂珍, 1904~1991)이었다. 니덤의 부인이자 역시 생화학자였던 도로시 니덤(Dorothy Mary Moyle Needham, 1896~ 1987)의 지도를 받게 된 루게이전은 니덤과도 친하게 지내게 되었고, 니덤에게 중국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중국에 대한 관심이 커진 니덤은 중일전쟁(1937)과 난징(南京)대학살 등으로 중국이 어려움에 처하게 된 것을 보고 자신이 직접 중국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했다.

그 결과 1942년 2월 니덤은 장제스(蔣介石) 정부가 있던 충칭(重慶)의 영국대사관 산하 영국문화원 소속으로 중국을 방문할 수 있게 되었다. 1946년까지 4년여 기간 동안 중국에 체류하면서 니덤은 중영과학합작관(The Sino-British Science Co-operation Office)을 설립하고 그곳의 책임자로서 중국 각 지역을 방문하며 중국 과학자들에게 필요한 실험 장비를 지원하고 과학 문헌들을 제공하는 일을 수행했다.

이때 니덤은 과학자뿐만 아니라 여러 방면의 지식인들과 활발하게 교류했으며, 그 과정에서 중국의 역사와 문화, 특히 중국 과학의 성과에 대해서 많은 자료를 모으면서 그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나갔다. 중국 과학사 연구의 기초 자료를 확보하면서 그 분야의 전문가로 나아갈 수 있는 바탕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니덤은 중국에 도착하여 먼저 윈난성(雲南省) 쿤밍(昆明)에 머물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늙은 정원사가 허름한 차림으로 자두나무의 접붙이기 작업을 정교하게 수행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던 니덤은 이 작업 방식이 영국의 접붙이기 방식과 매우 다르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어린 시절 아버지가 했던 사과나무의 접붙이기 작업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중국과 영국의 접붙이기 작업 방식의 차이가 나무의 종류에 따른 것이라고 여겼지만, 곧 중국에서는 본래부터 접붙이기를 유럽과는 아주 다른 방식으로 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이 보았던 중국인 정원사의 접붙이기 방식은 어쩌면 수천 년 전부터 내려오던 방식이고 중국인들은 유럽인들보다 훨씬 더 오래 전부터 이런 방식으로 접붙이기를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에 니덤은 중국과 유럽의 식물학 역사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이때 니덤은 예전에 읽었던 한 미국인 선교사의 말 곧, 과학적인 의미에서 ‘식물학’은 중국인들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내용을 기억했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중국 과학의 역사에 대한 완전한 무지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런 무지함을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책을 써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돌아오는 과정에 니덤은 프랑스 파리에서 2년 동안 체류하게 되는데, 이는 당시 설립된 유네스코(UNESCO)의 초대 총장인 헉슬리(Julian Huxley, 1887~1975)가 니덤에게 자연과학 분과의 책임을 맡아주기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 기간 동안 니덤은 영국과학사학회를 조직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과학사 강의를 개설하는 등 영국에서 과학사 분야의 정착을 위해 노력하여 성과를 거두었다.

케임브리지로 돌아온 니덤은 일부 생화학 강의를 맡기도 했지만, 마침내 중국 과학사 연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게 되었다. 그것은 케임브리지 대학 출판사에 『중국의 과학과 문명』 집필 계획을 제안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니덤을 중국 과학사로 이끌게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루게이전은 『중국의 과학과 문명』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니덤을 만난 이후 줄곧 그의 연인이었던 루게이전은 전쟁 중에 잠시 미국으로 떠나 있기도 했지만, 1945년 중국에서 니덤을 다시 만났다.

이후 파리와 케임브리지에서 니덤의 동반자로 지내면서 특히 『중국의 과학과 문명』의 제4권: 화학과 화학기술 부분의 집필에 크게 기여했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을 통해서 니덤이 찾아내고 알려준 중국 과학의 성과와 그것이 가지고 있는 특징적인 모습으로 먼저 꼽을 수 있는 점은 중국 과학기술의 성과가 어느 누구의 상상을 넘어설 정도로 엄청났다는 사실이다.

중국에서는 수학, 천문학과 기상학, 지리학과 지질학뿐만 아니라 물리, 화학, 생물학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놀라운 정도의 과학적 성과가 있었으며, 그것들과 관련된 기술적 성과가 아주 많았다.

예컨대 니덤은 송원(宋元) 시대 수학이 방정식 풀이에서 세계 제일이었으며, 르네상스 이전 시기 중국이 세계 어느 곳보다 가장 정확하고 지속적인 천체 관측 결과를 남겼을 만큼 중국에서 놀라운 과학적 성과가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니덤은 중국인들의 놀라운 창의력을 언급하면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알게 된, 중국에서 먼저 발견되거나 발명되어 서양으로 전해진 기술이 250여 가지도 넘는다고 지적하였다.

니덤에 따르면 중국은 군사적-귀족적 성격의 유럽 봉건제와는 다른 성격을 가진 관료적 봉건제 사회였다. 그런데 중국의 관료적 봉건제는 부와 권력이 세습되지 않고 매 세대마다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안정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는 체제로서 오랜 기간 동안 중국 과학이 높은수준을 유지하는 데 효과적으로 기여했다.

하지만 관료적 봉건제 아래에서는 상업주의 정신에 대한 뿌리 깊은 반감이 생기기 쉬웠고 결국 자본가 계급이 성장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 사회에는 학자들에 의한 수준 높은 수학과 장인들을 중심으로 하는 실험적 전통이 풍부하게 존재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학자들과 장인들이 결합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수학과 실험이 결합하여 전혀 새로운 모습의 과학이 출현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중국의 과학과 문명』으로 대표되는 니덤의 작업은 과학사학자들뿐만 아니라 중국학 연구자, 과학자, 역사학자 등 여러 분야의 학자들, 나아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중국에 대한 새롭고 풍부한 이해를 제공했다.

특히 니덤이 중국에 관심을 가지고 연구를 시작할 때, 중국에 대한 인식 수준이 오해와 편견, 심지어 무지한 상태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니덤의 작업이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과학은 오직 서양 문화만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이 크게 흔들리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이런 믿음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니덤의 성과는 이런 믿음 체계를 근본적으로 흔들 만한 충분한 힘을 보여주었다.

니덤의 영향은 과학사학계에서 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나타나서 유럽 중심이던 과학사 연구가 서양 이외의 다른 문화권의 과학사 연구로 확장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니덤을 통해 오랜 역사와 문화 전통을 가진 중국의 과학사가 연구할 만한 주제라는 점이 분명해짐에 따라, 새롭게 그 분야에 뛰어드는 학자들이 점점 늘어났으며 그 결과 중국 과학사 연구자들이 독자적인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다.

중국 과학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니덤은 한국 과학사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보여서 『중국의 과학과 문명』 제3권의 본문 끝에 한국에 관한 짧은 부록을 싣고, “이 책을 쓰는 동안에 저자와 협력자들의 마음속에는 중국 문화권에 살았던 모든 민족들 가운데 한국인들이 모든 분야의 과학적인 사안들에 많은 세기 동안 가장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확신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1986년에는 조선 시대의 천문 기구와 혼천시계에 관한 연구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한국 과학사에 대해 니덤이 끼친 직접적인 영향은 그리 크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니덤의 성과는 한국 과학사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전상운이 『한국과학기술사』를 완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으며,32 전체 30권으로 계획된 『한국의 과학과 문명』 총서 발간 계획을 2010년 출범시키는 데 도움이 되었다.

니덤 이후 새로운 연구자들이 늘어나면서, 한편으로 중국 과학사 연구는 더 넓어지고 깊어지게 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중국 과학사에서 동아시아 과학사로 연구 대상이 확대되기도 했다.

하지만 동아시아 과학의 특징과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 향후 동아시아 과학사에서 풀어야 할 과제 또한 적지 않을 터인데, 다음의 두 가지 점은 특히 중요하다고 할 것이다.

하나는 동아시아 과학사가 한국, 중국, 일본 등 각 나라의 과학사를 단순히 더한 것이 아닌 하나의 단일한 문화권으로서 동아시아를 대상으로 하는 과학사를 서술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은 물론이고 한국과 일본에서도 니덤이 중세 과학이라고 이해한 전통 과학이 존재했으며, 이후 어느 시기인가를 특정하기 어렵더라도 근대 과학이 등장했고 그것이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동아시아 과학사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과제는 그 과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일이 될 것이다.

그 속에는 전통 과학 가운데 아주 세부적인 분야에서 일어난 여러 작은 변화의 모습들이 담길 수 있을 것이며, 그런 변화가 일어날 수 있었던 여러 배경도 함께 논의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니덤의 질문은 “동아시아에서 근대 과학은 언제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었는가?”와 같은 형식으로 바꾸어 물어야 할 것이다. / 정리=엄정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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