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이버 열린연단] "열하일기 박지원의 근대화 정신, 지금 우리도 배워야 한다"- 이승환 교수 강연 '박지원과 조선 그리고 근대' 발췌 요약
[네이버 열린연단] "열하일기 박지원의 근대화 정신, 지금 우리도 배워야 한다"- 이승환 교수 강연 '박지원과 조선 그리고 근대' 발췌 요약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7.06.06 16: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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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스뉴스/독서신문 엄정권 기자] 네이버문화재단이 후원하는 문화과학 강연 프로젝트 ‘열린연단:문화의 안과 밖’의 6월 3일 순서는 '패러다임의 지속과 갱신' 강연 1섹션 철학/사상의 마지막 강연으로 이승환 고려대 철학과 교수의 '박지원과 조선 그리고 근대'를 주제로 진행했다 (한남동 블루스퀘어 3층 북파크 카오스홀).

이승환 교수는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국립대만대학 철학연구소에서 석사 학위를, 미국 하와이주립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동양철학회 회장과 고려대학교 철학연구소 소장을 역임했고 현재 고려대 철학과 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횡설수설』, 『동양철학의 세계』, 『유교 담론의 지형학』 등이 있고 그밖에 『공정과 정의사회』, 『서양과 동양이 127일간 e-mail을 주고받다』 등을 공저했다. 제39회 한국백상출판문화상 저작상(1999)을 수상했다.

이 교수는 이날 강연을 통해 박지원이 연행(燕行)을 통해 당시 청나라의 문물에 충격을 받고, 조선사회의 변화를 꿈꾸는 노력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조선 후기사회 양반들의 허위의식을 알아가는 과정도 재미있게 소개했다. 

특히 이 교수의 강연 내용 가운데 연행을 현재의 여행 개념에 접목해 여행을 통한 새로움에 눈뜨고 세계관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 과정 설명 등은 요즘 젊은이들이 귀담아 들을 내용이라고 보인다. 다음은 내용 요약.

박지원(燕巖 朴趾源: 1737~1805)은 조선 후기의 문사(文士)로서 홍대용ㆍ박제가 등과 더불어 북학을 주창했던 실학자로 불린다. 북학파라 불리는 이들 세 지식인이 지닌 공통점은 연행(燕行)의 계기를 통해 낙후된 조선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진단하고 새로운 문명으로의 전환을 꿈꾸게 되었다는 점이다.

박지원이 살았던 18세기 후반, 서양에서는 근대로의 이행을 재촉하는 계몽의 움직임이 철학, 과학, 정치, 사회의 제 영역에서 급속하게 퍼져가고 있었다. 형이상학적 사변 대신 상식과 경험이 존중되고, 종교 신학적 도그마 대신 이성과 과학이 중시되며, 쇠락하는 권위주의와 특권의 자리에는 개인의 자유와 평등한 권리가 싹트고 있었다.

박지원이 연행을 통해 1차적으로 관찰한 것은 청의 선진 문물이었지만, 그가 2차적으로 엿보고자 했던 것은 청을 통해 들어온 근대초기의 서양 문물이기도 했다.

『열하일기』는 박지원이 1780년 음력 5월 25일부터 10월 27일까지 사행단을 수행하며 연행 노정과 체류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기록한 여행 일기이다.

박지원에게 연행은 오래전부터 기다렸던 ‘준비된 여행’이었다. 그는 자기보다 먼저 청을 다녀온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로부터 이미 많은 정보를 습득하고서, 연행에 동참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참이었다.

연행 노정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물어볼 것이며, 어디에 들러 무슨 책과 어떤 물건을 구입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지식인을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눌 것인지, 그는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를 마치고 기회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중이었다.

드디어 44세가 되던 해에 그토록 바라던 연행길에 동참하게 되자, 낙후되고 폐쇄된 조선 지식인의 눈으로 당시 최고의 문명국인 청나라를 여행하면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일기 형식으로 남기게 된 것이다.

박지원의 연행 당시, 18세기 후반의 청은 건륭제의 치세가 이어지던 때로 산업혁명 직전까지 지구상에서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 시기 유럽의 계몽적 지식인들은 청의 정치 제도와 문물을 이상적인 것으로 동경하였으며, 이를 수용하여 근대로 도약하는 자원으로 삼고자 했다. 지성사에서는 이를 동학서피(東學西被)의 시대라 부른다. 동양의 학문이 서양을 뒤덮었다는 의미이다.

박지원은 1780년 6월 24일 의주를 출발하여 압록강을 건너, 심양, 산해관, 통주, 연경, 열하 등지를 거쳐 10월 27일 귀국할 때까지 보고 듣고 체험한 것을 남김없이 기록으로 남겼다. 하지만 『열하일기』에는 사실적인 여행 기록 속에 넌지시 자신의 주관적 견해를 끼워넣은 픽션(fiction)의 요소도 혼재해 있음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연행의 전체 노정은 한양에서 의주까지의 국내 노정이 약 1050리, 의주에서 연경에 이르는 중국 노정이 약 2061리로 도합 3111리에 이르는 장도였으며, 돌아오는 길까지 계산하면 모두 6000리가 넘는 대장정이었다.

여정의 소요 기간은 연경까지가 40여 일, 그곳에서 체류하는 기간이 30~60여 일, 그리고 귀국길 40여 일을 합하면, 보통 4~6개월이 걸리는 장기 여정이었다. 현지 정세나 외교 현안의 처리 정도에 따라 여정이 1년 가까이 걸리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박지원의 사행길은 원래 목적지가 연경이었지만, 건륭제의 70수 축하연이 열하의 피서산장에서 거행된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연경에서 열하까지 400여 리를 서둘러서 달려가야만 했다.

박지원은 열하에 도착해서 청나라 사람뿐 아니라 몽골, 티베트, 위구르 등지에서 온 외교사절들과 접할 수 있었으며 라마교의 지도자인 판첸 라마를 방문하기도 했다. 열하 노정은 조선의 사행 역사에서 매우 드문 경험이자 18세기 조선 지식인들의 세계 인식과 사유 영역이 확장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였다.
 
청나라 사람을 되놈으로 얕잡아보는 조선 지식인의 시선은 압록강을 건너 청의 국경 마을 책문에 들어서면서 점차 충격과 경탄으로 바뀌게 된다.

책문은 청의 동쪽 끝에 있는 오지임에도 불구하고 박지원이 본 풍경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반듯하게 정리된 넓은 길에는 화물을 실은 수레가 바쁘게 움직였고, 도로변에 벽돌로 지은 높은 집들은 견고하고 번듯했다. 오가는 사람들의 옷차림이나 살림살이에서는 시골티를 찾아보기 어려웠으며, 방목하는 양과 돼지가 야산에 질펀하게 널려 있었다.
 
박지원이 압록강을 건너 처음 도달한 책문(柵門)은 의주로부터 약 45㎞ 떨어져 있는 국경 마을로, 조선 사신이 청에 입국할 때 처음 통과하게 되는 관문이다. 목책으로 경계를 둘렀다고 해서 책문이라 했다.

책문 안을 바라보니, 수많은 민가들은 대개 대들보가 다섯 개씩이나 높이 솟아 있고 띠로 이엉을 덮었는데, 등마루가 훤칠하고 문호가 가지런하며, 네거리가 쭉 뻗어서 마치 양쪽 가로에 먹줄을 친 것 같다. 담벼락은 모두 벽돌로 쌓았고, 사람이 탄 수레와 화물 실은 마차들이 길가에 질펀하며, 벌여놓은 기명(器皿)들은 모두 그림을 그려넣은 자기(瓷器)들이다. 그 제도가 어디로 보나 시골티라고는 조금도 없다.

국경 관문을 통과하면서, 청을 바라보는 조선 지식인의 시선은 그간 지녀왔던 경멸에서 충격으로, 그리고 충격에서 경탄으로 바뀌어간다. 박지원은 국경 관문에서 받은 충격을 “청의 동쪽 변두리임에도 이러하거늘, 앞으로 만날 더욱 번화한 도시들을 생각하니 갑자기 기가 한풀 꺾여서 여기서 그만 발길을 돌릴까 보다”라고 자조적으로 술회하고 있다.

청을 바라보는 시선이 경멸에서 충격과 경탄으로 바뀌면서, 조선 지식인의 내면에서는 소중화의 자부심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두고서 청의 문물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려고 하는 평정심을 회복하게 된다.

박지원에게 연행은 절박하게 고대하던 신세계로의 여행이었다. 그는 ‘수평적 횡단’을 통해 폐쇄적인 울타리를 벗어나서 광활하고 낯선 세계를 향해 달려갔다. 그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알량한 자존심과 명분 의식 때문에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수구적인 관점에 매몰되어 있는 모습을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했다.

박지원의 지적에 의하면, 폐쇄적인 울타리를 벗어나는 초월적 경험을 해보지 못한 고루한 지식인들은, 서로 자기가 더 높이 날 수 있다고 자랑하는 메추라기와 비둘기처럼, 중화 문명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조선이야말로 청나라보다 우수한 문명국이라고 으스대는 과대망상증에 도취되어 있다.

특히 별들의 관점(星界)에서 지구를 보면 지구 또한 하나의 별에 지나지 않는다는 천문학적 인식은 ‘천원지방’이라는 중세적 사유에 젖어 있던 조선 지식인들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청천벽력과 같은 주장이었을 것이다.

홍대용은 지구중심설을 부정하는 데서 나아가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라고 여기는 중화중심주의를 해체하는 데에까지 이른다. 지원설과 지전설을 통한 지구중심설의 해체는 자연스럽게 화이론(華夷論)을 지탱해주던 심상-지리적(mental­ geometrical) 고정관념의 해체로 연결되기 마련이다.

조선 선비들이 청나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자긍심의 저변에는 화이론(華夷論)적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다. 화이론은 중화(華)와 주변민족(夷)을 문명/야만이라는 위계적 이분법으로 구분하려는 문화-정치학적(cultural­political) 개념 틀이다.

이제 지구의 둥근 형태에서 ‘하나의 중심’을 논할 수 없다면, 지구의 모든 곳이 각기 중심이 될 수 있으며,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서 있는 개개인의 자리들이 모두 중심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별들의 관점에서 지구를 내려다봄으로써 ‘중심’과 ‘주변’의 구분은 없어지고, ‘화’와 ‘이’의 구분도 해체되며, ‘자’와 ‘타’의 구분도 사라지게 된다. 단일한 중심의 해체는 필연적으로 다중심성(multi­centricity)을 배태하기 마련이며, 그간 절대의 지위를 누려왔던 ‘하나의 중심’은 수많은 ‘중심들’ 중의 하나로 상대화되고 만다.

홍대용은 지원설을 개진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생각이 『장자』로부터 영향 받았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러한 우주관의 대전환은 9만 리 창공으로 치솟아 까마득한 아래를 굽어다보는 대붕의 눈을 통해서나 가능한 것이었으리라.

그는 『허생전』에서 실업(實業)에 종사하지 않고 경전에만 매달리는 양반을 “1전어치도 못 되는 물건”이라고 비판하고, 『민옹전』에서는 무위도식하는 양반을 벼를 뜯어먹고 생장을 망치는 황충(.蟲: 메뚜기 과의 곤충)이라고 욕하기도 한다.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인 북벌론이 부정되고 난 자리에는 “오랑캐에게서라도 배울 것은 배우자!”라는 북학의 주장이 들어서게 된다. 북벌론에서 북학론으로의 이행은 관념에서 현실로, 정덕(正德)과 예법(禮法)에서 이용(利用)과 후생(厚生)으로, 그리고 사대부 중심의 명분주의적 세계관에서 인민 전체의 복리를 위한 실용주의적 세계관으로 전회를 의미한다.

청의 문물과 접하면서 처음 박지원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짐을 가득 실은 수레와 곧게 뻗은 도로였다. 그는 짐을 가득 실은 수레가 곧게 뻗은 도로를 바쁘게 오가는 모습을 보고 조선의 유통 경제가 낙후되어 있는 현실을 한탄한다.

도로와 수레의 미비로 인해 물자가 유통되지 못하여 원시적인 자급자족의 수준에 머물고 있는 조선의 현실을 그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수레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바퀴가 온전히 둥글지도 않거니와 바퀴가 궤적에 맞지도 않으니, 이는 수레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하는 말이 “우리나라는 길이 험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고 하니 이 무슨 소리인가? 나라에서 수레를 쓰지 않으니 길이 닦이지 않았을 뿐이다. 만일 수레가 다닌다면 길은 절로 닦이게 될 터이니 어찌하여 길거리의 좁음과 산길의 험준함을 걱정하리오! (중략) “

만약 박지원이 살아 있다면 그는 다시 우리에게 대붕이 되어 9만 리 창공으로 비상하라고 권유할지도 모를 일이다. 9만 리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한반도에는, 남과 북을 갈라놓는 철책선도 보이지 않을 것이고, 서로 높이 날 수 있다고 자랑하는 메추라기와 비둘기도 보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건강하고 잘 생긴 토끼 한 마리가 광활한 대륙을 향해 막 도약하려는 모습만 보일 것이다.

만약 박지원이 살아 있다면 그는 서울에서 출발해서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베이징까지 한숨에 달려갈 수 있는 고속열차를 놓자고 주장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서울에서 출발해서 나진ㆍ선봉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를 경유하여 모스크바에 이르는 유라시아 대륙 횡단 열차를 놓자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만약 이러한 철도망이 건설된다면 그가 그토록 꿈꾸었던 유통 경제의 활성화는 대단락을 이루게 된다.

이러한 꿈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박지원이 가졌던 두 가지 문제의식 중 첫 번째 사항, 즉 집권 사대부 계층의 허위의식을 타파하는 일이 선결적으로 요청된다.

남북한 상호 간에 끊임없이 적대감과 대결 의식을 조장하려는 지배 권력의 시도는 인민 전체의 이용후생에 아무런 도움도 안 되는, 그저 집권 세력의 정권 안보를 위한 이데올로기적 장치에 불과할 따름이다. 실현 불가능한 북벌론을 퍼뜨리며 위기 의식을 조장했던 효종과 노론 일파가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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