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저자] 책이 좋아 책을 만들다 책이 된 사람, 『편집·교정 반세기』 낸 정해렴
[이 저자] 책이 좋아 책을 만들다 책이 된 사람, 『편집·교정 반세기』 낸 정해렴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7.01.24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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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동 사무실의 정해렴 현대실학사 대표. 출판인생 반세기 동안 책 1천권을 편집하고 교정을 보았다.

[리더스뉴스/독서신문 엄정권 기자] 헌 책 냄새는 왠지 쓸쓸하다. 헌 책이 가녀린 햇살을 받으며 페이지 펼쳐 네 활개 벌리고 있으면 까닭 없이 더 쓸쓸해진다. 아마 이런 생각이 틀림없을 거라고 믿고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훅 끼쳐오는 헌 책 냄새. 주인공은 몇 발자국 떨어져 돋보기를 쓰고 그 너머 방문자를 응시할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바로 문 옆 벽을 향해 허리를 다소 굽힌 채 차를 끓이고 있었다. 문을 열다 부딪칠 뻔했다. 사무실은 그렇게 옹색했다.

책 만들기 반세기, 역사에 남을 '책쟁이'…옹색한 사무실, 헌 책 냄새 가득

기자 세 명에게 내 온 찻잔이 모두 색깔이 다르고 모양이 다르다. 예우할 만한 방문자가 그동안 별로 없었다는 뜻같았다. 그러나 이 방, 10평도 안 되는 이 방, 사방 가득한 헌 책 내음 속에서 한국 문학의 아귀가 맞아지고 옛 문헌이 음지에서 오롯이 양지로 돋아난다.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젊을 순 없다. 늙었다는 말은 말자. 1939년생이다. 정해렴 현대실학사 대표.

지금 보시는 게 뭐에요? 누렇고 두툼한 책이다. 세로로 조판돼 보기만 해도 오래 묵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명사전이라고 답한다. 다른 사전과 대조해가면서 혹시 틀린 게 있나 살펴 고친다. 조선시대 과거 문과 급제한 명단이 3권인데 이를 보면서 잘못을 짚어내는 일이다. “이 거 보면 잘못된 게 보여요” 빠진 사람도 더러 나온다. 급제자 명단은 이름만 볼 줄 안다고 보는 게 아니다. “이게 나이를 말하는 건데(七十四를 짚어 보인다) 아는 사람 별로 없어요.” 결국 옛 책을 활용할 줄 모른다는 얘기다.

정해렴을 모르면 출판계 사람 아니다. 책을 내는 데 그 과정이 만만찮은데 작가 글(원고)을 분류하고 묶고 정리하고 등이 편집이요 말 그대로 글자 틀린 것 하나하나 다 골라내 고치는 게 교정이다. 여기에 번역 편역 등 책 만드는 ‘쟁이’들이 하는 일을 그는 50년 넘게 했다. 최근에 이를 기념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책을 냈다. 『편집·교정 반세기』 (도서출판 한울). 책이 된 사람, 아니 잘 못 읽었다, 책이 삶이 된 사람. 이렇게 책은 맨 뒷면에 정해렴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삶은 책이고 책은 그의 삶이었으니 기자처럼 ‘책이 된 사람’이라고 읽는 사람도 더러 있을 법하다. 편집·교정한 책이 1천권이다. 저자 정해렴은 시집 같은 건 하루에도 한 권은 보니까, 그 정도 됐지 라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말한다. 이렇게 50년 넘게 일했는데 정부에서 무슨 상도 안주나 했더니 그게 뭐… 한다. 뭐 다음에는 무슨 말이 숨어 있을까. 그렇다 그게 뭐 자랑이냐고 그게 뭐 대단하냐고…. 그러나 자부심은 50년을 버티게 한 힘이었다.

홍명희 『임꺽정』남북 통틀어 첫 정본 뿌듯

염상섭 『삼대』도 각고 끝에 정본 내 정본 보편화 계기

가장 빛나는 그의 업적은 단연 정본(定本)작업이다. 우선 정본의 뜻부터 알아보자. 정본은 이미 나와 있는 대본이나 판본을 가지고 현대 표기법으로 고쳐서 초판 대본으로 삼아 조판이나 입력을 한다. 이 작품 초판 판본과  대조해 대본에서 빠져있는 문장이나 단어를 보충해 넣는다. 이어 이 작품이 실린 잡지나 신문을 복사해 이와 대조하면서 작가가 퇴고하지 않았는데도 빠진 문장이나 단어를 찾아 보완한다.

이렇게 해서 이룬 것이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과 염상섭의 『삼대』 정본이다. 1928년 무렵 조선일보 연재물과 사계절출판사에서 나온 임꺽정을 대조하며 출판사본에서 누락된 부분이나 잘못 옮겨진 것을 바로 잡았다. 이런 일을 하는 건 요즘 젊은이들은 이해하기 어렵다.

과거 신문이나 잡지 만들 때 문선(文選), 조판(組版)은 깨알같은 활자로 작업하는 것이라 원고지의 행을 잘 못 읽어 문선 작업자가 실수하는 등, 그리고 신문 연재물을 다시 문선 조판하는 과정에서 이같은 일이 또 벌어진다.
이러니 어디서 어떻게 얼마나 빠졌는지는 누군가 작심하고 끈질기게 추적해야 가능한 일이다. 참으로 고단하고 무미건조한 일이다. 저자도 실타래 엉키듯 뒤얽힌 문맥을 순리로 풀어내느라 끙끙거렸다고 말한다. 을유문화사본까지 대조하느라 힘은 배로 들었다.

정해렴은 이 어려움을 겪어가며 어쨌든 대하역사소설 『임꺽정』 전10권을 교정·교열해 남북한 통틀어 최초로 정본을 만들어냈다. 200자 원고지 600매 분량을 발굴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염상섭의 장편소설 『삼대』의 정본 작업 또한 우리 문학사, 출판역사에 기록돼야 마땅하다. 저자는 민중서관본, 을유문화사본, 조선일보 연재본을 대조하면서 누락된 글자만 64군데 530여자에 이름을 밝혔다. 오자나 탈자도 부지기수. 저자는 여기에 출판사를 옮기면서 빠진 글자도 170자가 넘는다며 700여 글자가 빠졌다고 서슴없이 말할 수 있다고 했다. 1993년 일간지에 삼대가 정본으로 다시 탄생이라는 기사가 실리며 정해렴 사진도 실렸다. 작가도 아닌 교정자가 신문에 실리는 건 유례 없다.

정본이라는 개념을 보편화시킨 공로는 순전히 정해렴에게 있다. 근대문학 연구자들은 일정 부분 정해렴에게 빚을 지고 있다. 그가 교정 글자 한 자 찾아낼 때마다 근대문학 잎사귀 하나 늘고 원고지 한 장 발굴할 때마다 근대문학의 줄기가 한뼘 자란다.

그의 설명이 오래 이어졌다. 고생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근대문학 최고봉에 올랐던 사람들의 정본을 만들어 줬죠. 고달프게 작업할 수밖에 없었어요. 현실적인 부를 누리려면 이 일 안 해야죠” 그렇긴 하다, 사명감까지는 아니고 좋아서 했다고 말한다. 보상이 많았다면 나태해져서 이 일을 안했을지도 모른다고 덧붙인다. 그러면서 일본 출판계에 비해 대충대충 처리하는 게 너무 많다고 꼬집는다.

한국고전소설선집 16권 작업 끝내, 출판 준비 중 

정해렴은 이곳 현대실학사 문을 열면서 매달린 한국고전소설선집 작업을 다 끝냈다. 16권이나 되는 작업, 교정도 끝나 이제 책만 내면 된다. 조선시대 주요 소설을 다 다룬 상당 분량이다. 금오신화 양반전 구운몽 등 교과서에서 봤던 제목의 소설이 망라돼 있다. 이것도 정본 만들듯이 했다고 한다. “처음으로 요로원 야화기라는 소설도 실렸습니다” 그런데 왜 책을 안내시고…. 하니 “제작비가 한 권에 500만원씩 해서 총 8000만원 정도 드는데…. 무슨 돈으로….”한다.
 
그리고 요즘 힘쓰고 있는 건 한국역사인명사전이다. 누렇게 변한 책을 보고 있던 게 이 작업이다. 아직 걸음마라며 언제 끝날지 모른다.
빛도 안나고 하고자 하는 후배도 없고 사회적으로 가치도 인정해주는 게 아니고, “그래도 긍지는 있어요. 사명감 갖고 하면 실패하게 돼 있어요.”

서울 마포구 공덕동 사무실, 간판도 없어 홋수만 알고 들어온 방, 이제 헌 책 냄새도 무심해졌다. 몸 하나 비틀기도 좁아 코트를 여기 놓았다, 찻잔을 이리 들었다, 노트북을 저리 놓았다 하면서 인터뷰는 이어졌다. 사진기자까지 네 명이 복닥대니 체온으로도 이미 방은 따뜻했다.

아침 10시 30분께 출근, 6시 정도 퇴근한다. 한 번 들어오면 거의 나갈 일이 없다. 도시락 싸 와 사무실에서 먹는다. 이런 거 하다보면 하루가 후딱 간다고 한다. 큰 길로 난 창을 가리고 있는 버티컬은 무심하게 끝단이 구겨져 있다. 여름에 햇볕 가리려 내렸다가 그냥 둔 것 같다. 책 먼지가 살짝 뽀얗다.  

겸손한 듯 무념무상한 표정이고 말투다. 그래서 김지하 시집 『타는 목마름으로』를 내고 남산(안기부)에 끌려가 조사를 받을 때 조사관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에 걸려온 전화를 무심코 받았다 한바탕 험한 말을 들었다는 일화는 그의 무심함을 보여준다. 무서운 게 없는 게 아니라 눈치 안보고(없고) 욕심이 없음이다.

조용하면서도 꾸준히 이어지는 회고담은 우리 문학, 우리 출판계의 자화상이다. 때론 일그러지고 때론 벅차오르는 순간들이 그의 편집·교정 50년을 메우고 있다.

정해렴은 누구?
1939년 파주에서 태어났다. 전 서울대사대 국어교육과 교수를 지낸 고 이응백 박사가 작은 외삼촌이다. 6·25 난리 통에 공부도 제대로 하지 못한 가운데 성균관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다. 1964년부터 교학도서·신구문화사·을유문화사 편집부에서 근무했고, 1976년부터 1996년까지 창작과비평사 편집부장·대표·고문을 역임했다. 1997년부터 현재까지 현대실학사 운영에 전념하고 있다. 출판계에 입문한 후 1000여권의 책을 편집·교정했다.

정리= 이정윤 기자, 사진=이태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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