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영 칼럼]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붉고 곱다
[황태영 칼럼]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붉고 곱다
  • 독서신문
  • 승인 2016.10.25 11:11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황태영 대한북레터협회장 / 희여골 대표

[독서신문] 나무는 때를 안다. 꽃을 피워야 할 때, 열매를 맺어야 할 때, 떠나야 할 때, 휴식해야 할 때, 기다려야 할 때…. 그리고 때가 오면 담담하게 그 때에 맞는 역할을 수행할 뿐 집착과 탐욕을 부리지 않는다. 가을의 추위가 시작되면 공기가 건조해지고 수분이 부족해진다. 그러면 나무는 물관과 체관을 닫고 잎으로 가는 수분과 영양분의 공급을 중단한다. 잎은 시들어 가고 나무의 아픔은 단풍이 된다. 단풍이 짙을수록 나무의 아픔은 커지게 된다. 나무는 이별해야 할 때가 오게 되면 순응하고 받아들인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붙들려고 애쓰거나 욕심내지 않는다. 만산홍엽의 아름다운 가을은 그렇게 만들어진다.

자연은 이렇듯 속으로 아픔을 삭일뿐 보냄과 맞음이 강제도 없고 꾸밈도 없다. 사람만이 때로 권력과 돈을 맹신하고 강압과 교만으로 추한 모습을 드러낸다.

서주의 려왕은 폭정을 일삼아 백성들의 원망을 샀고 불만을 품은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처단하는 등 공포정치를 일삼았다. 소목공이 려왕에게 폭정을 그만두도록 여러 차례 간언했으나 듣지 않았다. 려왕은 위나라에서 무당을 데려와 점을 쳐서 비판자들을 색출하고 극형에 처하기도 했다. 오만과 독단의 압제가 깊어지자 누구도 왕에게 옳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려왕은 자신에 대하여 나쁜 말을 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태평성대라 하면서 득의양양해 했다. 소목공이 간언했다. "이는 진정한 태평성대라고 할 수 없습니다. 방민지구 심우방천(防民之口 甚于防川),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냇물을 막는 것보다 어려운 일입니다. 강물을 막았다가 갑자기 둑이 터지면 엄청난 피해가 속출하듯 강제로 백성의 입에 재갈을 물리면 언젠가는 큰 후폭풍이 몰아닥치게 됩니다. 그러므로 냇물을 위하는 자는 물이 잘 흐르도록 물길을 터주고 백성을 위하는 자는 백성들이 자유롭게 말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려왕은 이 말을 듣지 않고 공포정치를 계속하였다. 결국 참다못한 백성들이 민란을 일으켜 려왕은 왕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독재자들은 그 최후가 비참했다. 비판에 재갈을 물린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우는 아이를 매로 다스리는 것은 시정잡배나 하는 짓이다. 올바른 지도자라면 왜 우는지 원인을 먼저 찾아내야 한다. 배고파 울면 밥을 주고 아파서 울면 병원에 데리고 가야 한다. 공권력의 감시와 탄압으로 권력을 유지하려 하고 매로 울음만 그치게 하려하는 단세포적 지도자는 반드시 큰 역풍을 맞고야 만다. 지위가 높을수록 여름 잎의 화려함보다 단풍의 경건함을 배워야한다.

높은 가지의 잎은 자신이 영원할 줄 안다. 가장 먼저 비를 맞고 햇빛도 가장 많이 독점한다. 경쟁과 다툼 없이 모두를 굽어보며 그 위용을 자랑한다. 그러다 보니 아래는 썩고 병들어도 자신에게는 푸르고 푸른 여름만 계속되리라 믿는다. 그러나 자연은 정직하고 세월은 공평하다. 돈과 권력으로 인간의 일을 일순 뒤흔들 수는 있어도 세월을 막을 수는 없다. 가을이 오면 잎이 풍족했던 나무건 빈약했던 나무건 모두가 같게 된다. 큰 잎이었건 작은 잎이었건 똑같이 한줌 흙으로 돌아간다.

단풍을 보면 마음이 밝아진다. 단풍에는 교만과 독선이 없기 때문이다. 힘겹게 흐느끼며 왔어도 그저 한 세상 가을이요, 쉽게 노닐며 왔어도 차이 없는 한 세상 가을일뿐이다. 독선의 화려한 나날을 보냈건 나눔의 힘겨운 나날을 보냈건 단풍 앞에 서면 다 평등해 진다. 오는 길만 달랐지 도착해 보면 모두의 삶은 다를 바가 없다. 가을 찬 서리는 빈부귀천의 덧없음을 깨닫게 해준다. 나무가 잎을 버리고 뿌리를 살려가듯 우리가 가져가야 할 것은 폭압의 과욕이 아니라 마음의 평화와 내면의 보람이다. 단풍을 마주하면 특별한 잘남이 아니라 부끄럼 없는 평범함이 빛난다.

단풍은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가장 아름다운 빛깔을 만든다. 참된 아름다움은 상처를 통해 흘러나온다. 버려지는 쓰리고 쓰린 상처, 버리는 깊고 깊은 아픔이 핏빛으로 물든다. 가을이 깊어지면 산도 붉고 물도 붉고 사람도 붉어진다. 추상(秋霜)은 나만의 추상인 듯 하지만 실은 모두의 추상이다. 누구도 추상을 피해갈 수는 없다. 상처 없는 단풍이 어디 있겠는가? 아픔 없는 인생이 또 어디 있겠는가? 겉은 화려한 빛깔로 뽐내고 있어도 흐느끼지 않는 단풍, 눈물 없는 인생은 없다. 곪은 곳을 도려내면 생살도 뜯겨진다. 아프지 않고 아무는 상처는 없다.
비록 아픔과 눈물뿐이라 할지라도 이 가을 단 한번이라도 타오르고 또 타올라야 한다. 봄이 오면 단풍 진자리에 새순 돋듯 아파 곪은 곳에서도 새살이 돋을 것이다.

물고기가 가는 모든 길은 새 길이다. 그러나 물고기는 그 길에 집착하지 않고 자신의 흔적을 미련 없이 지워버린다. 물고기는 내려놓고 비울 수 있기에 늘 새 길을 만들 수 있다. 나무도 때가 오면 애써 잡지 않고 보낼 것은 보낸다. 단풍을 보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깨닫게 된다. 가을은 비싼 땅을 굽어보며 탐욕에 사로잡히는 계절이 아니라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마음을 여는 계절이다.

가을은 곡식이 영글고 육신이 풍요로워지는 계절이기도 하지만 실상은 공존과 배려의 지혜를 배우며 영혼이 맑아지는 계절이다. 화려했건 초라했건 단풍 앞에서면 모두가 평등해진다. 단풍은 찬 서리를 맞지만 따뜻함이 묻어난다. 단풍은 모두에게 위로와 위안이 된다. 단풍에 물들면 눈물조차 아름답다. 그래서 상엽홍어이월화(霜葉紅於二月花), 잘 물든 단풍은 봄꽃보다 붉고 곱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