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시집 『초혼』 낸 고은 “오호라 반만년 넋 위로 큰 굿판 열자”
[인터뷰] 시집 『초혼』 낸 고은 “오호라 반만년 넋 위로 큰 굿판 열자”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6.10.21 00: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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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은 시인 <사진=이태구 기자>

[독서신문 엄정권·이정윤 기자] 이 걸음이 팔순 노인의 걸음인가. 휘적휘적 바람을 일으키며 광화문 복판을 달리듯 걷는다. 한 손으론 기자의 손을 거머쥐고 말이다. 작은 손, 차갑지만 보드랍다. 뼈마디가 연약한 느낌이다.

고은 시인은 만나자마자 갑시다 한마디 던지곤 기자를 이끌면서 두 눈은 이미 시청 주변을 훑고 있다. 한잔 해야지 하는 소리가 들릴 듯 말듯, 이미 둘은 음식점 문턱을 넘고 있었다. 오래된 음식점 ‘부민옥’이다. 10월 17일 오후 4시다.

“독서신문에 늘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게 무슨 말씀, 고은 시인은 오래 전 이미 독서신문의 유명 필진이었다. 기자는 낡은 신문을 본 적이 없어, 아, 그렇군요 만 연발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시인으로서 책을 읽는 독서인으로서 '독서'라는 이름을 가진 신문사에 지금은 아무런 기여도 못하고 있어 괜히 죄책감이 든다는 거다.

고은 시인은 1974년 소설 『어린 나그네』를 연재했고 '한국문화의 원류를 찾아서'라는 문명 에세이를 연재했던 기억이 있다고 말한다. 글 쓰는 사람의 향수가 '독서신문'에 이렇게 배어있을 줄이야. 글로써 보답하지 못하는 미안한 마음 또한 이렇게 길고 오래 이어질 줄이야.

그 사이 막걸리 한통과 안주가 들어왔다. 술국 하나면 족하다는 시인에게 굳이 모듬전 하나를 추가했다. 결국 시인은 기름 도는 모듬전에 손도 안 댔다.

중절모는 처음부터 시인의 것으로 만들어졌다는 듯이 맞춤하게 보기 좋았다. 고쳐 쓰지도 않고 벗은 모습은 더구나 볼 수 없었다.

막걸리 한 순배 돌고 이야기는 흥을 내며 속도를 붙이고, 마치 우리 고유 가락처럼 리듬을 타는 듯 했다. 이야기는 베니스에서 출발해 동알프스 눈부신 백설을 보여주며 스위스 시골에 머물더니 한국 수원에 잠시 닿는다. 이야기는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출발해 팔일오 육이오 사일구 등을 관통해 오일팔에 머물러 맴돈다. 이야기는 동서를 휘젓고 고금을 꿰뚫는다.

시인을 지배하는 건 죽음이었다. 그는 죽음을 삶의 동반자라 말했다.

시집 『초혼』 출간을 축하한 기자는 시인의 긴 설명을 들어야 했다. 『무제시편』이라는 시집을 알아야 한다. 무제시편은 말 그대로 제목이 없는 장시(長詩)다. 시에 번호만 붙였다. 시인은 이탈리아 베니스대학에 명예 펠로십으로 한 학기동안 특강을 할 기회를 얻었다. 이 곳에 가면 아는 사람도 없어 편하게 장시나 써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웬걸, 이탈리아 주변 나라들이 어떻게 고은이 이탈리아에 와 있는지 알았는지 여기저기서 불러댔다. 특강도 하고 사람도 만나고…. 도저히 장시는 쓸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단품 시를 하나 둘 쓰다 이탈리아 동북부 티롤지방을 찾는다. 티롤은 오스트리아 접경으로 만년설이 장관이다.

일정표를 보여주는 고은 시인

이 만년설이 시인에겐 요즘 말로 '딱'이었다. 그 동알프스 기운이 엄청난 영감을 불어넣어 시인은 하룻밤에도 수십 행의 시를 써댔다. 쓰고 나면 또 시상이 떠오르고 자고나면 또 영감에 사로잡히고, 그는 매우 특별한 경험을 했다. 글이 쏟아져 나왔다. 500편을 헤아린다. 동알프스 티롤의 영감은 베고 자도 좋을 만큼(본인 표현) 1천 쪽의 두툼한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세상에선 『무제시편』을 고은의 폭발적 열정의 결과물이라고도 했고 밤낮없이 유성우처럼 쏟아지는 시 묶음이라는 평도 했다. 평단에선 한국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문화와 역사를 초월해 세계의 보편성을 추구하며 시각을 우주로 넓히면서 인간 존재에 대한 끝없는 탐구가 담겨 있다고도 했다.

고은은 세계 보편성, 우주적 시각, 인간 존재 탐구 등 모두 티롤 협곡에서 만년설을 보며 느낀 건 아닐까. 등산가들은 만년설이 덮여 있는 에베레스트 등 정상을 정복할 땐 베이스캠프를 떠나는 시간이 밤 12시 정도라고 한다. 이때가 눈이 얼어 미끄러지지 않아 그나마 안전하다는 거다. 고은 시인도 한밤 중 눈을 밝히고 얼음으로 반짝이는 만년설에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눈으로 피켈을 찍었을 게다. 고은의 시선에 밟히고 찍힌 티롤의 만년설은 시인의 가슴에서 녹아 커다란 강을 이뤄 한국의 시단을 적시고 자양분을 공급하기에 이른다. 고은의 『무제시편』은 그래서 한국 현대시의 포문을 글로벌하게 열었다고 하겠다.

그 뒤 시인에겐 또 시가 쌓이고 이번에 장시 『초혼』을 쓰고 표제 삼아 시집을 냈다. “우리나라에선 참 사람 많이 죽었어요. 임진왜란 정유재란 등 말할 것도 없고….” 조상들의 고귀한 삶이 이 땅에 널브러져 묻히고 선열들 역시 이 땅에 피를 뿌리고 묻혀야 했다. 그 역사의 고비마다 수많은 죽음은, 결국 남은 자의 삶을 유지했고 그 남은 자는 비로소 죽음과 삶은 동행이라는 걸 깨닫는다. 아니 시인이 깨달았다.

나는 반쪽짜리 인생이야 하면서 허허 하더니 작년 수원에서의 일을 꺼낸다. 5천년 역사의 죽음 전체를 위해 큰 굿을 벌이자 해서 수원 문화회관(SK 아트홀) 개관 기념 공연으로 초혼굿을 펼쳤다. 제례복 맞추고 관도 새로 쓰고 신발도 맞추고 등등 예를 다했다. 고은 시인은 초혼 시를 낭송했다. 처음 일반에 공개된 것이다. 시가 길다보니 낭독에 장장 1시간 반이 걸렸다. 그런데 남자들이 훌쩍훌쩍 우는 거야 라고 시인은 말한다.

음식점 '부민옥'에서 사진촬영을 위해 포즈를 취했다. 영 어색한 모양이다.

막걸리가 몇 순배 돌고 술국은 어느덧 식었다. 데워 달라 할까요 라고 사진기자가 묻자 손을 휘휘 젓는다. 식어야 맛있어. 옛날엔 죽은 사람은 다 식은 것 먹었어 하며 건건이가 좋아 라고 한다. 동행한 새파란 여기자에게도 한 잔 권하며 “인상이 좋아, 내년에 풍년 들겠어”라고 건넨다. 풍년? 여기자가 웃으면서도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덕담 같기는 한데 아직까지 뜻을 모르고 있다.

시인의 굿판은 내년에도 이어질 것 같다. 시 낭독은 조수미가 할 것 같다고 했다. 잘 아는 사이라 맡기겠다는 뜻. 세종문화회관이나 예술의전당이 좋을 것 같다며 내년 안되면 내후년에도 좋고…. 혼잣말이다. 외국 가서도 하겠다는 포부다.

『초혼』 읽어보고 온 거요, 대뜸 기자 허를 찌른다. 기자들이 시집 냈고 죽음을 다루고… 등만 쓰고 있는데 핵심을 놓쳤어요. 시에는 내재율이라고 있잖아요, 『초혼』에는 우리 전통가락이 있어요. 한 번 제대로 읽어봐요. 삼사 사삼 등 절로 리듬을 타고 흥을 돋우게 된다.

요즘 젊은이들이 스마트폰에 빠져 책을 안 읽는 게 걱정이라는 기자의 말에 시인은 그렇다고 운을 뗀다. 하버드·버클리 등 미국 대학생 책 벌레입니다. 우리나라는 젊어서 스마트폰에 빠지고 결혼 해 드라마에 빠지고 중년엔 고스톱에 빠진다고 세태를 걱정했다. 그러면서 문명은 답습이 있어야 새로운 운동이 일어난다며 걱정말라고 한다.

미국 얘기 뒤끝인지 해외여행이 많은 시인은 내년 3, 4월까지 해외 일정이 꽉 차있다며 직접 만든 일정표를 꺼내 보인다. 작은 글씨로 월별 일별 촘촘히 적혀 있다. 내년 3월인가 4월인가에 스코들랜드 스웨덴 등 빼곡하다. 일정표를 다시 넣으면서 시인은 ‘발 감사론’을 들려준다.

손톱보다 발톱을 먼저 깎는다고 하며 "내 발이 먼저 저 밑에서 험한 일 다 합니다. 내 머리 내 몸뚱이 지탱하느라 고생합니다. 물론 내 손이 내 문학세계를 이룩하는 주인공이지만 내 손을 국내로 세계로 인도하는 건 바로 발입니다. 밑에서 묵중하게 제 일 다하는 발을 위해 발톱 먼저 깎는 게 최소한의 도리가 아니겠나. 숭고한 것은 위에 있는 게 아니라 밑에 있습니다. 나는 글을 손으로 쓰는 게 아니라 발로 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모국어의 손이 발에 의해 세계를 다닙니다." '발 숭고론'의 긴 설명이 끝났다. 발 좀 볼 수 있나요 하며 허리를 굽히자 부끄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발을 손으로 감춘다. 오욕과 영광의 세월을 함께한 발에 대한 존경의 표시라고 믿었다.

- 74년부터 일기를 죽 쓰고 있다. 술을 마셔도 예외 없이 하루를 돌아보는 게 습관이다.
- 수원 광교산 기슭에 3년째 살면서 가양주 맛에 푹 빠졌다.
- 해외 나가는 게 재미있다. 10시간 넘는 비행시간도 책 보고 영화 보고 밥 먹고 다 극락이야
- 김영삼 정권 때 처음 여권이 나왔다. 네덜란드 로테르담에 처음 갔다. 너무 떨렸는데 그 때부터 세계가 주목하고 있었다고 느꼈다. 이어 독일 영국 등에서 초청장이 날아왔다.
- 시집이 30개 언어로 번역돼 출간됐다. 묘한 감염이야.
- 내 시가 번역될 때 느낌이 처음엔 황홀했는데 이젠 국내에서 책 출간될 때와 같은 느낌이야
- 내 몸에 전근대, 근대, 현대가 다 있어.
- 김소월 시 초혼은 잃어버린 연인에 대한 노래가 아냐. 관동대지진 때 죽은 우리 동포 추모시야.

「초혼」 시는 63쪽에 이르는 장시다. 반만년 역사의 이 강토 넋을 불러 한바탕 위로하더니 막판엔 ‘억세고 억센 원한 산이 되고 물이 되더니 / 이제부터 다 풀려서 신천지 태평 형통 / 하얀 숨결 드나들고 푸른 피 도는구나’며 누리가 새로 일어나 달빛 가득하도다 라고 태평성대를 기원하고 있다.

막걸리는 느릿느릿 줄었고 안주는 더 더디게 없어졌다. 시인의 열정이 2시간 가까이 이어지더니 남은 막걸리를 고루 네 잔에 나눴다. 시인은 오던 때처럼 기자 손을 꼭 잡고 중절모 정갈히 쓴 채 역시 휘적휘적 기분좋게 늦은 오후의 길을 걸었다. 노벨문학상 '밥 딜런' 얘기를 꺼내지 않은 건 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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