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태영 칼럼] 송아지는 몰지 않아도 어미 소를 따라간다
[황태영 칼럼] 송아지는 몰지 않아도 어미 소를 따라간다
  • 독서신문
  • 승인 2016.10.11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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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영 대한북레터협회장 / 희여골 대표

[독서신문] 지금은 고인이 되신 이계익 전교통부장관께서 1970년대 전후 언론사 기자로 있을 때 특종 제보가 들어 왔다. 강원도 두메산골에서 엄마가 딸을 삶아 먹었다는 것이었다. 당시는 세끼 밥만 먹을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 할 정도로 헐벗고 굶주렸다. 아무리 그렇지만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현장에 가보니 헛것을 볼 정도로 주리고 주린 엄마가 어린 딸을 돼지로 잘못알고 실제로 가마솥에 삶아버렸다.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었고 타 언론사에서는 모르는 특종이었다. 팩트도 확인했고 특종을 터트리는 데에 걸림돌은 없었다.

그러나 회의결과는 보도를 하지 않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아무리 특종이 좋아도 차마 천륜을 어긴 기사를 내보낼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법으로 강제하지 않아도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인간이라면 당연히 지켜야할 염치와 금도가 있다. 이러한 염치와 금도가 무너지면 동물의 삶과 다를 바가 없게 된다. 가난하고 출세 못한 사람이 개, 돼지가 아니라 인간이 가져야 할 이러한 최소한의 양심을 가지지 못한 인간이 개, 돼지이다. 특종을 못 터트린 기자가 개, 돼지가 아니라 특종에 눈멀어 천륜을 저버리는 기자가 개, 돼지이다.

연독지정(吮犢之情)이라는 말이 있다. 어미 소가 송아지를 핥아 주는 정을 뜻한다. 자식이나 부하에 대한 지극한 사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이다. 어미 소는 송아지의 몸에 짚이나 흙이 묻어 지저분하건 털이 빠져 목에 걸리건 상관하지 않는다. 송아지의 배변, 혈액순환 등 생리기능을 촉진시켜주고 송아지가 바깥 생활에 적합한 체온을 유지할 수 있도록 송아지를 계속 핥아 준다. 젖을 빠는 송아지를 핥는 어미 소의 눈은 자애 가득하다. 송아지가 조금이라도 품에서 떨어지면 사립문이나 뒷동산을 두리번거리며 근심어린 눈으로 수없이 ‘음매’ 소리를 낸다.

2011년 초 횡성의 축산농가에서 구제역에 걸린 어미 소를 안락사 시킨 적이 있었다. 수의사가 근육이완제를 주입한 직후 갓 태어난 송아지가 젖을 보채기 시작했다. 주사 후 어미 소는 10초가 지나면 숨을 거둔다. 오래 버텨도 1분을 넘기 못하지만 젖을 물린 어미 소는 다리를 부르르 떨며 사력을 다해 3분을 버텨냈다. 그리고 송아지가 젖을 다 빨고 나자마자 비명 한 번 못 지르고 그대로 털썩 쓰러졌다. 현장에 있던 요원들은 기적 같은 모성애에 다들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살아있는 생명체는 모두 부모, 자식 간 위하는 마음이 애절함 그지없다. 어떤 이념, 어떤 정파적 셈법으로도 이 근간을 파괴하려 해서는 아니 된다. 만약 자식을 잃게 된다면 부모는 왜 자식이 죽게 되었는지 그 이유만큼은 꼭 알고 싶어 할 수밖에 없다. 너무나 당연한 것 아닌가?

그것을 좌우의 이념으로 재단하려하거나 부모가 주장하지도 않은 온갖 유언비어들을 만들어내어 부모가 마치 탐욕에 가득찬듯 날조하는 것은 차마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아버지를 잃은 자식의 마음도 슬픔은 매 한가지다. 그 슬픔을 위로는 못할망정 아버지의 치료를 소홀히 해서 아버지를 죽게 만들었다고 ‘부작위에 의한 살인’으로 자식을 고소하는 것은 짐승들도 차마 하지 않는 패륜이다. 부모가 돌아가시는 것을 천붕(天崩)이라 하고 자식이 먼저 가는 것을 참척(慘慽)이라 한다. 부모를 여의는 것은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이다. 자식을 잃는 것은 땅이 꺼지는 아픔이다. 어버이가 숨을 거두면 해와 달이 빛을 잃고 자식이 숨지면 온 세상이 막막한 암흑이 된다. 부모가 상(喪)을 당하면 세월을 한탄하지만 자식을 떠나보내면 하늘을 원망하게 된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 그 슬픔을 어찌 평생 잊을 수 있겠는가?

패거리 다툼을 하더라도 마땅히 지켜야할 예의와 범절이 있다. 홍익인간의 건국이념과 동방예의지국이라는 명성에 더 이상 흠집을 내는 천박함이 없었으면 한다. 공자는 사람이 잘못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서 잘못하는 것보다 잘못을 고치지 않는 것이 더 큰 허물이라 여겨 과즉물탄개(過則勿憚改), 허물이 있으면 고치기를 주저하지 말라고 했다.

작은 죄를 감추기 위해 인간으로는 차마 할 수 없는 말과 짓거리로 죄를 더 크게 키우지 않았으면 한다. 통제와 강압, 여론의 관심을 돌리는 잔재주는 누구나 알고 또 할 수 있지만 저급하기에 하지 않을 뿐이다. 정말 훌륭한 지도자가 되려면 또 자신이 따르는 지도자를 훌륭하게 만들려고 한다면 인간의 따뜻한 마음을 되살리는 큰 정치를 하도록 해야 한다.

조선 후기 평론가로 이름을 날린 이하곤은 여섯 살짜리 딸아이 봉혜의 죽음을 ‘심장이 찔리고 뼈가 깎이는 참혹한 고통’이라고 했다. 그는 통곡하며 ‘곡봉혜문’을 썼다. “……산을 보아도 네가 떠오르고, 물가에 가도 네가 떠오르며, 평대의 솔바람 소리를 들어도 네가 떠오르고, 달밤에 작은 배를 보아도 네가 떠오르니, 언제 어디서나 온통 네 생각뿐이로구나.” 모든 부모 자식은 그 마음이 다 같다. 패거리의 이해에 따라 부모 자식 간의 정리를 날조하고 폄훼하는 짓거리는 더 이상 반복되지 않았으면 한다.

송아지는 몰지 않아도 어미 소를 따라간다. 법으로 강제하거나 누가 가르쳐주어서 따라가는 것이 아니다. 이권이 있거나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은 그런 것이다. 봄이 오면 꽃이 피고 가을 오면 단풍들듯 그런 천심을 되살리고 지켜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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