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김혜식의 인생무대] 대추가 붉게 익어갈 무렵
[수필- 김혜식의 인생무대] 대추가 붉게 익어갈 무렵
  • 독서신문
  • 승인 2016.10.05 1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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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수필가/전 청주드림작은도서관장>

[독서신문] 가슴에 묻어 두었던 어린 날의 기억은 시간이 갈수록 선명하게 드러나기 마련인가보다. 마치 가을하늘 아래 익어가는 대추의 빛깔 마냥….
 
아파트 동 사이에 마련된 아담한 정원에 주저리주저리 대추를 달고 서 있는 몇 그루의 대추나무가 가을을 모아 놓고, 서로 색깔자랑이라도 하듯 붉은색 치장을 하고 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갑자기 가슴이 알싸했다. 대여섯 살 때 일이 떠올라서이다.

어머니는 집안 일로 우리들을 외가에 맡긴 채 먼 길을 떠나야 할 처지에 놓였었다. 나는 어머니 치맛자락으로 온몸을 감싸면서 따라가겠노라고 떼를 썼다. 어머니는 그런 나를 외가 마당가에 서있는 대추나무 아래로 데리고 가더니 통통한 과육의 푸른 대추를 몇 알 따서 내 손안에 꼭 쥐어 주며 “엄마가 이 대추 빨갛게 익을 때쯤이면 풍선하고 비과, 그리고 눈깔사탕 사가지고 꼭 올게. 할머니 말씀 잘 듣고 기다려라.”
 
이렇게 나를 달래놓고 훌쩍 떠났다. 나는 솟을대문 앞에서 어머니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서 있었다. 어머니는 뒤돌아보지 않고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날 이후 내 눈은 한시도 대문을 떠나지 못했다. 날만 새면 어머니가 대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설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지치면 마당가에 서 있는 대추나무 아래로 달려가 대추나무를 올려다보며 대추알이 빨갛게 익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대추는 익지 않았다. 어린 마음에 그런 대추가 아속하기만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해 가을은 초입부터 비가 자주 내렸나 싶다. 대추가 제 색깔을 내지 못하고 시퍼렇게 달려 있는 꼴이 밉게만 보였다.

내 어린 날, 대추가 붉어지면 돌아온다던 어머니, 약속대로 대추가 붉어졌건만 어머니는 좀체 돌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어린 나를 슬프게 했던 대추에 대한 추억이 가을만 되면 도진다. 이렇듯 지난날의 추억은 그것을 떠올릴 때마다 나를 슬프게 만든다.
 
요즘 남편이 좀 이상하다. 여성의 갱년기 증세인 호르몬 과다분비가 원인인가. 차를 몰고 가다가도 라디오에서 슬픈 사연이 나오면 설움을 이기지 못하고 눈물이 솟는단다. 여느 때는 아예 자동차를 도로가에 세워놓고 울어버리기도 한단다. 심심찮을 만큼 라디오의 프로그램이 다양한지라 먼 길을 갈 때에도 지루하지는 않다. 그런데 남편으로 하여금 눈물을 솟게 하는 프로그램이 있나보다.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우리또래 나이에 ‘보릿고개’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하지만 남편은 그 고개의 중간에서 혼자 넘나든 사람처럼 그 시절 어려움 겪은 이야기가 나오면 눈이 먼저 붉어지는 사람이다.
 
인간은 저마다 서로 다른 어느 특정 기억에 대한 애환이 담겨있게 마련이다. 가령 기쁨, 환희, 슬픔, 고통 등등 그 어느 것이던 동기가 유발되면 가슴을 뚫고 분출하게 되어 있다.  기쁨이든, 슬픔이든, 분노이든, 사랑이든 가슴 속에 그것들이 일정 저장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사람들의 의식구조는 어떨까. 아마도 그들의 의식 속에는 남다른 집념이 들어 있을 터이다. 언젠가 신문 기사에서 읽은 내용처럼 우린 지난 50 여 년 동안 추월의 고속도로를 앞 만보며 질주하였다. 이제는 템포를 줄여 새로운 길을 모색할 때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세계적인 신화를 이룬 애플의 창시자 스티브잡스가 생전에 아이맥, 아이폰, 아이팟, 아이패드 등 끊임없이 새로운 카테고리를 만들 수 있었던 것도 실은 초월의 길을 선택했기에 가능했단다. 그의 그 길에는 문학이 있었다. 그는 자신만의 창조의 길을 걷기 위해 남이 보지 못한 것을 상상하고 즐겼다고 한다. 그의 감성과 상상력을 자극한 것이 윌리엄 블레이크의 시 「순수의 전조」란다. 시처럼 스티브잡스는 한 알의 모래 속에서 세상을 보았기에 오늘날 애플을 탄생시킨 것이다.
 
나는 이제 내 어린 날의 가슴 아픈 기억에만 사로잡혀 있지 않을 것이다. 이 가을 붉게 익어가는 대추를 보며 장석주의 시 「대추 한 알」처럼 우주의 신비와 자연의 섭리에 감동하는 감성의 시간을 이어가련다.
 
「대추 한 알」을 가만히 입속으로 암송해본다. 대추 한 알 속에는 천둥이 있고, 번개가 있고, 무서리가 있었기에 붉고 아름다운 색감을 담아낼 수 있다는 교훈이 담겨 있다.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저 안에 벼락 몇 개/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저 안에 땡볕 두어 달/저 안에 초승달 몇 날’
그렇다. 대추는 더 이상 나에게 슬픔을 전해주는 전령사가 아니다. 우주를 품어 안고, 가을을 지키며 스스로를 살찌우는 현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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