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화원과 권력을 사랑한 서태후
이화원과 권력을 사랑한 서태후
  • 신금자
  • 승인 2007.11.23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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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속의 여인들⑥
▲ 신금자[수필가·본지 편집위원]     © 독서신문
 만년을 이화원에서

 이화원은 중국 왕조시대에 황제들만 찾던 곳이다. 지금은 중국인이나 중국을 찾은 관광객이 꼭 둘러보는 최고의 정원으로 명소가 되었다. 필자가 다녀온 지 10여 년이 되었는데도 기억이 각별하다. 정원 어디에서나 멀리 바라다볼 수 있었고 호수에 빠진 풍치 그림자마저 참 마음에 들었던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이 아렸던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넓은 곤명호를 안고 있는 만수산에서, 산 속 아려한 누각들 앞에서, 용마루가 없는 다소곳한 인수전에서, 한 마리의 박쥐모양을 한 불향각에서, 또는 호수를 따라 복도로 꾸며진 길고 긴 회랑을 돌면서, 뱃놀이 여흥을 살린 돌배에서, 호수 동쪽 기슭을 잇는 17공교의 500여 마리의 사자가 조각된 난간에서도 나는 자꾸만 마음이 아렸다.
 이화원과 함께 동고동락했던 서태후의 미련함이 가셔지지 않아서다. 어쩌랴, 아름드리 수양버들이 머리채를 흔들며 초여름 호수 속으로 나를 이끌었다.
 
 
함풍제를 유혹하다.
 청나라는 중국의 90%이상을 차지하는 소수민족 중 변방국가인 만주족이 세운 국가다. 서태후는 가난으로 이리저리 떠돌다 만주족 예흐나라 귀족가문에 입양되었다. 성은 예흐나라이고 옥란, 난아, 왕소겸 등으로 불렸다. 황제의 후궁이 될 궁녀를 <수녀>라고 했는데 100% 만주 혈통이라야 되었다.

 난아의 나이 17살에 수녀로 선발되어 함풍제의 후궁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총명하여 고전에 능통하고 서화와 노래를 잘 하였는데 궁의 이수원에서 산시성 민요를 부르며 함풍제를 유혹, 귀인의 직급을 받고 아들을 낳는다. 함풍제는 황후와 이귀비 등 후궁들이 있었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러니 태자를 낳은 그녀는 낮은 서열의 후궁에서 귀비에 올랐다. 그 뿐, 여전히 함풍제는 아름다운 용모와 춤을 잘 추는 이귀비를 사랑하여 그 딸들까지 총애하는 반면 난귀비는 찾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훗날 세 모녀에게 서태후의 광기어린 복수로 이어졌다.  

 
권력도 아편이다
 1861년 함풍제가 승화하자 겨우 5살인 태자(동치제)가 즉위했다. 두 어머니의 섭정과 함풍제의 동생인 공친왕이 의정왕으로서 정치를 보좌하였다. 생모인 난귀비는 성모태후, 황후는 모후태후로 칭해졌는데 성모태후는 서쪽의 평안궁에 처소가 있었고 모후태후는 동쪽의 수리전에서 살았다.
 서태후, 동태후라 부른 것은 이 때문이다. 사실 동태후는 정치에 무관심했고 그 시대의 부덕 제일의 교육을 받은 여자였지만 여성들에게 불필요하고 무익한 것이라 여겼던 글자를 깨치지 않아 영리하고 권력욕이 강한 서태후가 실권을 틀어쥐고 말았다.

 동치제가 성년이 된 후에도 서태후는 계속 국사를 간섭하고 장악했다. 하여 동치제도 친어머니인 서태후보다 정치적 수셈없이 온화한 동태후를 더 따랐다고 한다. 따라서 황후도 동태후가 추천한 여인을 맞아들여 서태후의 질시를 받았다. 서태후는 황후의 일거수일투족을 미워하고 역정을 내는 것도 모자라 황제의 황후 처소 출입마저 막았다.

 이래저래 시름에 잠긴 동치제를 즐겁게 해줄 요량으로 신하가 유곽을 소개했다. 재미를 느낀 동치제는 자주 유곽에 드나들었다. 그러다 매독에 걸린 것을 서태후가 종기라고 하며 종기에 대한 치료만 하다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동치제의 나이 겨우 18살이었으며 황후가 임신 중이었음에도 제위 계승의 원칙을 무시하고 쫓아냈다. 그리고 자기 여동생과 시숙 사이에서 난 3살 밖에 안된 조카(광서제)를 양자로 들여 제위를 물려주었다. 섭정이 불가피하게 만든 것이 아니랴.

 1881년 동태후가 불시에 죽자 서태후는 공친왕마저 몰아내고 권력을 독점하였다. 그러니 서태후가 동태후에게 보낸 떡에 독이 들어 있었다고 뒷말들이 많았지만 서태후가 독살을 기도했는지는 그저 추측일뿐, 쥐도 새도 모르는 일이다. 하긴 물증이 있다한들 누가 감히 증거를 제시하고 따질 수 있겠는가.

 그러구러 광서제도 성년이 되어 한 여인을 마음 속에 품었다. 그러나 광서제의 마음은 아랑곳없이 서태후는 자기의 질녀를 황후자리에 앉혔다. 비로소 광서제가 친정을 하자 서태후가 이화원으로 나앉았으나 실권을 넘겨 줄 리 없다.
 위엄을 잃지 않으려고, 아니 전화를 받을 때 드러누워서 받는지, 걸터앉아서 받는지, 경망스런 행동을 알 길 없다며 이화원에 전화조차 놓지 않고 황제를 직접 불러 지시를 하였다고도 한다.

 
갑오전쟁이 일어나다
 1894년 갑오년은 서태후의 환갑이었다. 이를 대비해 6년 전부터 성대한 연회를 할 장소로 청기원의 폐허 위에 새롭게 정원공사를 했다. 엄청난 군비를 쏟아 부은 이화원의 탄생이다. 본래 평지였던 곳을 파내 만든 곤명호는 바다처럼 넓어서 그 가운데 풍치를 위해 섬을 조성했고 호수를 판 흙으로 동산을 만들었다.
 그 만수산 기슭 곳곳의 궁전과 누각에서 1년 내내 잔치를 벌였다. 왜침을 대비해 북양함대를 보강하고 군사력을 강화했어야할 시점에 오히려 해군 예비비를 끌어다 이처럼 사욕을 부렸다.  그 무렵 청일전쟁(갑오경장)이 터졌다. 물론 청나라의 부패한 정부를 얕잡아보고 일본이 침략을 했다. 청나라는 청일전쟁에서 대패했다.

 실은 조선정부의 갑오농민전쟁 때 청나라에 병력 요청을 한 것이 청일전쟁의 발단이 되었다. 조선에 청의 군대가 출병하자 그들의 공사관과 거류민 보호라는 구실로 조선 침략의 기회를 잡은 일본이 파병에 가담했다. 갑오농민 봉기를 누른 일본은 이 참에 서해에 진을 쳤던 청나라 북양함대의 주력을 격파하고 점차 조선에 발도 못 붙이게  압록강을 건너 중국 본토까지 진격하였다.

 사태의 급진전에 놀란 청은 일본의 강화교섭에 응하고 그들의 요구를 다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엄청난 전쟁 벌금은 물론이며 휘하에 두었던 조선의 종주권마저 내놓았다. 그것은 곧 일본이 소망하던대로 조선과 중국을 짓밟을 수 있는 길을 터 줬다. 
 두 나라에다 전쟁 거점을 두고 물자와 노동력 착취로 세를 불려 한 때나마 일본이 원대한 세계정복의 꿈을 꿀 수 있었던 게 아닌가.

 
마지막 기회를 바람에 날리다
 1898년 광서제가 서태후의 간섭에 질려 입헌파 강유위와 공모, 신정을 실시하여 입헌군주제를 꾀하려하자 서태후는 즉각 보수파를 동원하여 이를 제압하고 광서제를 이화원 인공섬에 가뒀다. 무술정변이다.
 이 여세를 몰아 서태후는 의화단의 반제국주의 투쟁을 이용해 유럽 열강에 대한 선전포고를 했다. 이에 8개국 연합국의 침입을 초래, 서태후는 결국 서안으로 피신했다. 만년에 이화원에 돌아와 진보적 개혁과 입헌준비, 교육진흥 등, 신정을 펼치려 했지만 이미 중국이 크게 나아갈 마지막 기회를 놓친 후이다.
 
 그 뿐인가. 한사코 황제와 태후가 제 명을 다하지 못하게 한 결과 동치제도 광서제도 자식이 없어 해괴한 황통을 잇게 하고 황제가 어리다는 핑계로 섭정을 하다 청의 멸망과 왕조의 멸망도 앞당긴 셈이다.
그러니까 서태후의 일관되지 못한 대외정책으로 중국의 식민지화도 빨랐고 전쟁벌금으로 나라살림도 만신창이 되었다. 지친 그녀도 눈을 감았다.

 남성위주로 돌아가던 정계에서 황후를 거쳐 태후시절에 4명의 황제가 거친 48년을 철권통치한 것은 참으로 대단하다. 어느 황제도 그리하지 못했다. 하나 그녀의 업적은 개인적 영화를 위한 권력뿐이었다. 아니, 세계적인 이화원을 남겨 유네스코에 등재하는 등, 오늘날 중국의 관광수입과 산역사의 장으로 훌륭한가.
 

<맹자 양혜왕편>에 보면 선왕이 패도정치에 대해 의견을 구하자 맹자는 왕에게 ‘백성들이 편히 살게 만드는 일부터 힘쓰라’고 충고한다. 그렇다. 나무에 올라가 물고기를 구하려는 것은(緣木求魚)) 뒤탈이 없지만 패자(覇者)가 되려고 하다가 실패하면 나라가 멸망하게 된다는 말도 잊지 않아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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