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인생이 깃든 상자, ‘세빌 온 록시’ 아파트를 들여다보다
[서평] 인생이 깃든 상자, ‘세빌 온 록시’ 아파트를 들여다보다
  • 이정윤 기자
  • 승인 2016.09.05 17: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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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이정윤 기자] 수수께끼를 하나 내보겠다. “이 상자는 작은 칸들로 나누어져 있고 칸마다 모든 경험이 저장되어 있지만, 경험들이 일어나는 장소나 순서에 규칙 같은 건 없다. 가로로 셋, 세로로 둘씩 27층 높이로 쌓여 있는 그 칸들 안에 온갖 경험이 뒤죽박죽으로 엉켜 있다.” 상자가 무얼 의미하는지 알겠는가?

힌트를 하나 더 주자면 이렇다. “한 쌍의 엘리베이터가 이 모든 칸을 연결한다. 그 자체로 작은 상자들인 이 엘리베이터들에는 각각 ‘10명 혹은 1,800킬로그램을 수용할 수 있다’라고 적힌 작은 금속판이 조작판 근처의 거울 같은 벽에 붙어 있다. 엘리베이터는 거무칙칙한 수직 공간을 끊임없이 오르락내리락하며 물건들과 그 관리인들을 부지런히 다른 층으로 옮겨다준다. 밤낮 가리지 않고 이 층에서 저 층으로 움직이다가 다시 로비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계단도 있어서, 불이 나거나 정전됐을 때 사람들이 가장 소중한 물건을 챙겨 안전하게 상자에서 빠져나갈 수 있다.”

이쯤 되면 정답을 알 법하다. 첫 장에서 묘사되는 상자의 진짜 정체는 아파트다. 소설은 아파트 ‘세빌 온 록시(Seville on Roxy)’를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은 자연스레 ‘세빌 온 록시’에 사는 입주민들이다. 여주인공 케이티, 악당 코너 래들리, 사악한 요부 페이, 인내심 강한 히메네스, 은둔형 외톨이 클레어, 홈스쿨링을 하는 허먼 등 미완성된 인물로 설정돼 있다.

▲ 27층 발코니의 어항에 살던 금붕어 이언이 추락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진캡처 = 피시볼 북트레일러>

그리고 이들을 바라보는 진짜 주인공이 있다. ‘3초 기억력’을 자랑하는 금붕어 이언이다. 이언은 27층 발코니에 놓인 어항 속에서 도심의 스카이라인을 즐겨온 수컷 금붕어다. 그는 수중 감옥(어항)에서 탈출할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잉어목 스카이다이버로서 첫발을 내딛는다. 발코니에 떨어지기까지 4초의 시간이 걸리는데, 소설도 4초 동안 벌어지는 사건들을 그린다. 무려 54장에 걸쳐서 말이다.

다행히도 이언의 기억력 덕에 이런 설정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추락하는 중간중간 “그런데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어, 숨을 못 쉬겠어. 젠장, 지금 고층건물에서 떨어지고 있잖아! 그런데…… 내가 뭘 하고 있었더라? 어…….” 하고 잠깐의 인지를 할 뿐이다. 만약 이언의 기억력이 좋았다면, 꽤 큰 두려움에 휩싸였을지도 모른다.

이언은 각 층을 지나쳐 떨어지는 4초의 시간 동안 아파트 세입자들의 사랑과 이별, 탄생과 죽음을 목격한다. 이런 식이다. “25층 창문을 지나가는 동안 이언은 거실에서 한 발짝 내딛고 있는 덩치 큰 중년 여자를 얼핏 본다. 기억력이 없는 생물의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휙 스쳐 지나간 그 장면 속에는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어여쁘게 늘어뜨린 멋진 옷감만큼이나 우아하고 품위 있게 움직이는 여성이 있다. 드레스는 굉장히 근사한 붉은색이다. 여자는 이언을 등지고 서 있고, 이언은 여자의 억센 갈비뼈 사이로 골짜기처럼 파인 등뼈와 육감적인 몸매를 돋보이게 하는 드레스의 말끔한 재단에 감탄한다.”

다른 층에서 목격한 광경은 다음과 같다. “케이티는 이 여자(사악한 요부 페이)를 주먹으로 한 대 칠까 하고 생각한다. 여자의 두 다리 사이를 쳐야지, 하고 구체적인 부위까지 생각한다. 나이트 셔츠를 입고 있는 이 여자에게 악귀처럼 고래고래 악을 쓰고 비명을 지르면서, 팔을 휘둘러 벽으로 밀어붙이고 그녀의 사랑을 파탄냈다고 혼내줄까보다. 그런데 어쩌면 이 여자는 케이티의 존재를 모를 수도 있다. 코너가 바람난 건 이 여자의 잘못일까, 아니면 코너의 잘못일까? 머릿속에서 질문이 제대로 만들어지기도 전에 그녀의 모든 고통과 분노가 코너에게로 향한다. 13층 위의 어딘가에서 아직도 그녀가 자기의 다른 여자들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을 남자.” 현실적이고, 사실적이다.

▲ 금붕어 이언은 추락하는 동안 '세빌 온 록시' 아파트 세입자들의 면면을 들여다본다. <사진캡처 = 피시볼 북트레일러>

각 층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퍽 자세하게 묘사해, 그것만 구경하는 것으로도 큰 재미다. 문득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이언의 시선에서 바라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각 인물은 타인과 교류하지 않고 자기 자신만의 세상에 갇혀 살아가는 것을 익숙하고 편안하게 느끼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언이 이들의 고립된 삶을 목격하는 그 순간 서로에게 유기적으로 통하기 시작한다. 이언이 안락한 어항을 과감히 탈출한 것처럼 그들 역시 갇힌 삶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서로에게 손을 내미게 되는 것이다.

즉, 저자는 이야기를 통해 믿음보다는 혐오가, 소속감보다는 소외감이 더 큰 도시 속 인생도 결국 서로 관여하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우리 모두 서로의 인생을 함께 살아간다. 건물은 말 없는 파수꾼처럼 이 사실과 그 외의 모든 것을 지켜본다. 몇십 년에 한 번씩 페인트칠과 단장을 새로 한다. 때로는 이곳저곳에서 물이 새기도 하지만 수리된다. 귀퉁이가 조금 부서지고, 보일러가 교체되고, 배관이 개선된다. 어느 시점이 되면 동네 분위기가 나빠질 테지만, 다시 좋아질 것이다.”

이언이 어항에서 물병까지 떨어지는 데는 4초도 걸리지 않았다. 그동안 우리는 첫눈에 반하는 사랑의 마법을 목격했고, 사그라져가는 사랑의 고통을 느꼈다. 우리는 욕정의 짜릿한 전율과 가족을 잃는 슬픔을 경험했다. 한 사람은 평생의 시간을 살지만, ‘세빌 온 록시’에 사는 사람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데는 4초의 시간이면 충분하다. 우리는 몇몇 순간들을 목격했고, 이 도시에, 이 건물에 더 많은 순간이 있다. 그리고 시간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 피시볼
브래들리 소머 지음 | 이영아 옮김 | 북폴리오 펴냄 | 380쪽 | 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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