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은 소설집 등 책의 맨 뒤 또는 맨 앞에 실리는 '작가의 말' 또는 '책머리에'를 정리해 싣는다. '작가의 말'이나 '책머리에'는 작가가 글을 쓰게 된 동기나 배경 또는 소회를 담고 있어 독자들에겐 작품을 이해하거나 작가 내면에 다가가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이에 독서신문은 '작가의 말'이나 '책머리에'를 본래 의미가 훼손되지 않는 범위에서 발췌 또는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주>

<중략> 수없이 앤을 봤다. 하지만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앤이 한 말을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앤이 한 말을 ‘듣기만 했을 때’와 그녀에게 들은 말을 ‘노트에 적었을 때’의 차이는 컸다. 그 차이만큼이 내겐 기적의 크기다. 나는 다시 한 번 실망하더라도 오래 꿈꿔왔던 것을 기대해보기로 했다.
나는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나는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안나 카레니나』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파우스트』 『오만과 편견』 같은 내 인생의 책들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결국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이 빨강머리 소녀가 내게 말하는 것도 그것이었을 테니까. 어쩌면 이것은 더 이상 기적을 믿지 않는 시대에 일어난 지극히 개인적인 기적에 관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다.
그해 가을, 나는 소설가가 되었다.
이 책을 나의 빨강머리 앤에게 바친다.
# 작가 백영옥은 서울에서 태어났다. 2006년 첫 장편소설 『스타일』로 제4회 세계문학상을 수상했다. 『스타일』은 김혜수 주연 드라마로 방영되기도 하고 중국어 등 4개국어로 번역 출간돼 화제가 됐다. 도시 남녀의 욕망과 사랑의 외로움을 경쾌하게 그리는 데 일가견이 있다.
<빨강머리 앤>은 캐나다 소설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가 1908년 발표한 장편소설 『그린 게이블즈의 앤』을 일본 번역가가 새로 작명한 것. 몽고메리 소설은 세계적으로 1억부 이상 팔렸다. <빨강머리 앤>은 원작을 매우 잘 살린 유명한 애니메이션으로 오래 사랑받고 있다.
■ 백영옥 에세이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백영옥 지음 | 북이십일 펴냄 | 336쪽 | 1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