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의 말] 『중국식 룰렛』 은희경 "작고 하얀 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작가의 말] 『중국식 룰렛』 은희경 "작고 하얀 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 엄정권 기자
  • 승인 2016.07.08 13: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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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은 소설 등 책의 맨 뒤에 실리는 '작가의 말'을 새로 싣는다. '작가의 말'은 작가가 글을 쓰게 된 동기나 배경 또는 소회를 담고 있어 독자들에겐 작품을 이해하거나 작가 내면에 다가가는 수단이다. 이에 독서신문은 '작가의 말'을 원형이 훼손되지 않는 범위에서 발췌 또는 정리해 싣는다. <편집자주>

 
[독서신문 엄정권 기자] 소설집 『중국식 룰렛』 은희경 작가의 말 = 아침에 일어나 맨 먼저하는 일은 커튼을 여는 것이다. 친구를 만나 맨 먼저 하는 건 웃음을 짓는 일이다. 책상에 앉아 가장 먼저 하는 일은 도망치고 싶어하는 것, 그래서 재주 없고 심약한 나를 설득하는 일이다. <중략>

이렇게 쓰지 못할 이유에 대해 공상을 계속하다가 문득 깜짝 놀라는 순간이 있다. 뒤통수 쪽에서 '그렇다면 쓰지 않아도 됩니다'라는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조명이 꺼져버린 무대에 혼자 남겨진 사람처럼 막막하고 슬퍼진다. 그래서 시무룩한 표정으로, 막막하고 슬픈 이야기를 상상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이 소설집 원고를 정리하다가 내가 조금 변했다는 걸 느꼈다. 어둡고 답답한 실내의 구석에 희미하나마 작고 하얀 빛의 웅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우리 모두 뒷걸음치다가 거기에 빠지기를. 온몸을 감싸안는 다정한 부력이 기다리고 있기를.<중략>

「중국식 룰렛」을 쓰다가 박경리 선생님의 부음을 들었다. 5월 제주에서 당일 항공권을 구하기 어려워 아주 긴 밤을 보냈다. 가까스로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오니 소설이 다르게 보였다. 존엄한 죽음의 연기를 쐰 내게 짧은 순간이지만 초연함이 깃들었었다. <중략>

충분히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할 때 쓰기 시작하지만 매번 다른 걸 쓰게 된다. 쓰고 있는 동안 겪게 되는 우연한 일들이 소설 속으로 들어오기 때문이다. 우연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가장 예민하고 집중되고 절실한 상태의 작가가 눈앞의 한 순간을 포착한 뒤 자신이 원하는 대로 편집하고 가공하는 방식일 것이다. 그것이 늘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내가 내 인생에 개입하여 그것을 주도하는 것은. 모르는 채로 이 배를 띄워 보낸다. <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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