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최고의 작품’ 아닌 ‘최후의 그림’에서 찾는 화가의 인생
[서평] ‘최고의 작품’ 아닌 ‘최후의 그림’에서 찾는 화가의 인생
  • 이정윤 기자
  • 승인 2016.06.30 2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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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카노 교코 『내 생애 마지막 그림』
 

[독서신문 이정윤 기자] 서양회화사를 얘기할 때면, 중세를 시작으로 르네상스, 마니에리스모, 바로크를 이야기한 뒤 인상파를 거쳐 현대의 혼란한 상황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런 방법은 미술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살펴보기에는 알맞을지 몰라도,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대중에게는 적절치 않다. 미술을 배우려 큰마음 먹은 이들이 오히려 싫증 낼 수 있다.

그래서인지 일본의 명화 이야기꾼 나카노 교코의 접근법이 신선하게 다가온다. 바로크에서 인상주의에 이르는 유럽 미술에 조예가 깊은 그는 책 『내 생애 마지막 그림』을 통해 삶의 마지막 순간, 화가가 남긴 최후의 그림에 집중한다. 생의 마지막 그림으로 무엇을 남겼는지, 생의 끝자락에 남기고 싶었던 ‘인생의 풍경’은 무엇이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화가의 인생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화가가 일생 동안 제작한 수십에서 수백에 이르는 그림 중 대표작에만 주목하는 경우가 많다. 모든 작품을 알 방법도 없고, 미술 관련 서적에서 대표작을 가장 많이 언급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의 말처럼 “예술가가 인생 말기에 이르러 어떤 심경의 변화를 겪는지 관찰하는 일은 참으로 중요”하다. 그림이란 화가의 삶의 방식 그 자체고, 마지막 그림에 화가의 예술 세계와 인생관이 농축돼 있기 때문이다.

▲ 고흐 자화상(1889년 作)

예를 들어, 빈센트 반 고흐 하면 ‘별이 빛나는 밤’,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아를의 침실’ 등을 떠올린다. 태양이 내리쬐는 남프랑스 아를의 해바라기밭이 그의 이름과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관련이 깊어 고흐를 프랑스인으로 오해하는 사람도 꽤 많다. 그러나 막상 화가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름에 숨겨진 비밀을 비롯해 작품에 유독 노란색이 많이 들어간 이유를 알 수 있다.

고흐는 1853년 3월, 네덜란드의 작은 마을에서 경건한 칼뱅파 목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빈센트’는 브레다의 고명한 목사였던 할아버지의 이름이자 그보다 1년 먼저 같은 달, 같은 날에 태어나 곧바로 죽은 형의 이름이기도 했다. 아이 입장에서는 자신을 형의 대역으로 느꼈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타는 듯한 붉은 머리에 얼굴이 온통 주근깨투성이였던 새로운 빈센트는, 아버지의 눈에 엄청난 문제아로 보였다. 프랑스로 떠났을 때도 남동생 테오의 적극적인 지원이 없었다면 고흐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 빈센트 반 고흐의 마지막 작품 ‘까마귀 나는 밀밭’. ‘별이 빛나는 밤’, ‘아를의 침실’과는 다르게 그림 속 노란색에서 불길한 기운이 느껴진다.

고흐는 프랑스 아를에서 ‘노란색’ 풍경을 마주했다. 지금껏 몰랐던 남쪽 나라의 태양, 무리 지어 핀 해바라기는 그를 기쁘게 했고, 집 내부에도 노란 페인트를 칠하고 노란 해바라기 그림으로 벽을 장식할 정도로 집착했다. 반면, 고갱과의 결별로 충격을 받은 고흐의 눈에 더 이상 노란색은 행복하게 비춰지지 않았다. 마지막 작품 ‘까마귀 나는 밀밭’의 노란색은 불길한 기운을 뿜어낸다. 검은 까마귀 때문에 더욱 꺼림칙하게 보이는 그림을 그린 고흐는 이 세상에 오래 머무를 마음이 없었다고 봐도 어색함이 없다.

이처럼 한 화가의 일생과 함께 작품의 변화를 따라가다 보면 그 인물을 더욱 알고 싶어질 뿐만 아니라 자연스레 미술에 흥미가 생긴다. 『비밀의 미술관』의 저자 최연욱도 이렇게 말한다. “이야기를 알면 미술이 보입니다. 미술을 공부하려면 688페이지짜리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어야죠. 하지만 미술이 그냥 싫다는 분들에게는 로맨티시즘, 로코코, 인상파 이런 용어가 삶에 무슨 도움이 되나 하는 생각이 먼저 들어요. 미술사 속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는 게 효과적이죠.” 최고의 작품으로 예술을, 최후의 그림으로 인생을 이야기하는 나카노 교코와 같은 맥락이다.

▲ 티치아노 자화상(1567년 作)

추가로, 베네치아파 최대의 거장 티치아노 베첼리오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그림을 구상조차 하지 않았으면서도 “슬슬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니 곧 완성될 것입니다”라고 천연덕스럽게 거짓말하는 수법을 자주 쓰는 인물이었다. 85세 때 펠리페 2세에게 쓴 편지에서도 자신이 무척 어렵게 생활하고 있고 고령으로 몸 상태가 좋지 않으니 연금은 손자에게 맡겨줬으면 한다 했을 정도로 여우 같은 모습을 보였다.

그런 면모는 마지막 작품 ‘피에타’에도 드러난다. 독특한 은회색으로 채색된 작품은 금욕적인 느낌을 줄 정도로 색채를 억제했으며 주제에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터치가 거칠다. 성모의 기품 있는 표정, 비장감 넘치는 막달라 마리아의 몸짓, 당장에라도 움직일 듯한 주변 조각상, 티치아노의 자화상이라고 불리는 늙은 성 히에로니무스까지 모든 것이 죽음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인다. 티치아노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지칠 줄 모르는 창작욕을 보였고, 이 뛰어난 화가의 사망 원인은 페스트였다.

▲ 베네치아파 최대 거장 티치아노 베첼리오의 마지막 그림. 그가 그린 ‘피에타’에서는 죽음을 거부하는 듯한 움직임이 느껴진다.

고흐, 티치아노 외에도 책에는 13인의 화가가 등장하며 총 3부로 구성된다. 신에 몰두한 화가들(화가와 신), 왕과 고용관계를 맺은 궁정화가들(화가와 왕), 새로운 세계를 이끄는 시민계급에 바짝 다가간 화가들(화가와 민중) 순이다. 15세기에서 19세기를 살아간 그들이 각각 어떤 문제에 부딪혔고 어떤 노력 끝에 걸작을 탄생시켰는지, 나아가 생의 마지막 작품으로 무엇을 남겼는지 살펴볼 수 있는 책이다.

■ 내 생애 마지막 그림
나카노 교코 지음 | 이지수 옮김 | 다산초당 펴냄 | 284쪽 | 1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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