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김혜식의 인생무대] 마음으로 피우는 꽃
[수필-김혜식의 인생무대] 마음으로 피우는 꽃
  • 독서신문
  • 승인 2016.05.06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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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정숙 수필집 『사소함도 꽃이다』를 읽고

▲ 김혜식 <수필가 / 전 청주드림작은도서관장>
[독서신문] 감정이란 참으로 묘하다. 때로는 사소한 언행에도 가슴이 뒤척이곤 한다. 그것은 상대방이 누구냐에 따라 정도에 차이가 있긴 하다. 지난해 연말 담낭 수술을 받은 이후, 그동안 운동으로 감량했던 몸무게가 요요현상이 일어났다. 마냥 불어만 가는 체중을 방관할 수 없어 가볍게 아파트 앞 호숫가를 산책하는 것으로 운동을 시작하기로 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입을 벌리는 어느 날 앞을 다투어 피어나는 꽃 향연에 도취되어 호숫가를 내 정신 아닌 정신으로 걸었다. ‘매운탕 전문점’이라는 간판을 내건 음식점 앞을 지날 때이다. 먼저 온 손님들이 봄기운에 취한 채 파라솔로 하늘을 가리고 앉아서 음식을 먹고 있다.

그 음식은 이 음식점 주 메뉴인 ‘빠가사리 민물매운탕’이다. 구수한 냄새가 봄바람을 타고 사방으로 흩어져 나간다. 냄새는 예민한 내 코끝을 간질이더니 갑자기 시장기를 불러온다. 나는 음식점 앞마당을 이리저리 살펴봤다. 술에 만취한 듯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며 횡설수설 혀 굽은 소리를 내는 여인 모습이 저쪽으로 보였다. 어디선가 본 듯한 여인이다. 중년 남자가 옆에 앉아서 같이 술잔을 비우고 있다.

두 사람이 나누는 이야기는 호숫가를 감싸고 도는 둘레 길을 따라 또렷하게 들려왔다. 대화는 여인 음성을 더 선명하게 들려준다. “내가 당신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아? 그런데 왜 한마디 말도 없이 가버렸느냐구!” 그러자 상대 남자는 “난 가정 있는 사람인데 댁을 그냥 좋은 지인으로 생각했지 사랑이란 감정을 느낀 적이 없습니다.” 라고 단호히 대답한다. 그러자 여인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더니 비척이며 벚나무 길로 걸어간다. 그러자 남자는 여인 행동이 걱정되는 듯 그녀를 부축하며 함께 벚나무 아래에 선다.

나는 음식점 앞을 벗어나 둘레 길로 접어들어 두 남녀 앞을 지나쳤다. 때마침 불어오는 봄바람에 만개한 꽃잎이 꽃비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진다.

그러자 여인은 두 팔을 한껏 벌려 꽃잎을 받으며 다시 말을 잇는다. “내가 당신보다 연상이라서 지인으로 생각했다 이거지? 나는 아직 지는 꽃이 아니라구” 이렇게 말하며 게슴츠레한 눈으로 벚나무 위를 올려다본다. 그러자 남자는 주위 사람들 눈을 의식한 듯 안절부절 못하는 눈치다.

그녀 음성을 좀 더 가까이서 들으니 까맣게 잊었던 한 여인이 문득 기억 속에서 떠올랐다. 한때 다른 곳에서 살 때 이웃에 같이 살던 바로 그 여인이 아닌가. 그때만 해도 나는 등산을 자주 했다. 아파트 부근 앞산 풍광이 아름다워 매일이다시피 산을 찾았다. 그곳 오솔길에서 그 여인과 이따금 만났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함께 등산로를 거닐기도 하였다. 그때마다 여인은 이웃에 사는 내게 한마디 인사도 없이 도도한 표정으로 내 앞을 앞질러 걷곤 했다. 핸드폰 통화로 다소 걸음이 뒤처지면 뛰어서라도 내 앞을 앞질러 가던 여인이다. 처음엔 급한 일이 있어 그런가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 여인은 무슨 일이든 남에게 뒤지는 게 싫은 성격 소유자 같았다.

음식 쓰레기를 버리기 위해 쓰레기장을 찾았을 때 일이다. 누군가 음식물 쓰레기가 든 비닐봉지를 놓고 가서 그것을 주워서 버리려고 하는데 언제 왔는지 내 뒤에 서있던 여인이 말을 걸어왔다. 자신이 먼저 쓰레기를 버리겠다며 다짜고짜 내 앞으로 와서 음식 쓰레기 함에 가져온 쓰레기를 버린다. 그때는 그 여인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던 그가 등산로에서도 쓰레기장에서도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여인은 나이 많은 어느 영감 애첩이 되었는데 본처가 이를 알고 행패를 부려 그곳에서 야반도주했단다. 여인에겐 초등학생 아들이 한 명 있다고 한다. 그 아인 공부를 잘하여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단다. 어쩌다 시험 성적이 안 좋으면 여인은 안달이 나서 아이에게 개인 과외를 시키는가하면 그것도 성이 안차 유명세를 떨치는 학원이라면 어디든 마다않고 아이로 하여금 학원 순례를 시켰단다.

 
평소 1등 인생만 추구했던 여인이 아닌가. 그런 그가 왜? 가정 있는 남자 애첩이 됐으며 현재는 어찌하여 외간 남자와 혼자서만 부적절한 관계를 꿈꾸었을까? 사랑 앞엔 등수가 필요 없는지도 모른다. 그날 그녀를 만난 이후 임정숙 수필가 수필집 『사소함도 꽃이다』에 수록된 「옆 집 그녀」라는 작품 내용이 뇌리를 스쳤다. 작품 속 여인과 내가 만난 여인과는 사정은 다르지만 이웃에 살던 여인 이야기라서 울림이 깊다.

작가는 옆 집 여인과 십년을 이웃하여 살았지만 단 한 번도 살가운 정담을 나눈 적 없다고 했다. 심지어 엘리베이터 안에 단 둘이 있어도 절대 먼저 알은척을 안 하던 그녀란다. 그러던 그녀가 이사를 간 후 이웃에서 들은 이야기가 공감 깊다. 늘 저조한 기분, 메마른 눈빛의 이웃 여인에 대한 사정을 안 후 작가가 느끼는 연민 또한 그렇다. 그녀는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마음의 감기인 우울증은 분명 정신질환이다. 어디 심리적 병이 우울증뿐이랴만, 이룰 수 없는 허황한 꿈을 현실 인양 착각하는 것도, 지나친 피해의식도 마음의 병이 틀림없다.

인간은 언젠가는 자신이 지닌 것을 상실해야 한다. 영원한 것은 없다. 청춘도 부와 명예도 남녀 간 사랑도 불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항상 안분자족하며 마음으로 피우는 꽃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다. 불변의 진리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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