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 근 희
철물가게 앞, 싸리비 얼굴이 하늘 깊숙이 잠겨 있다
간판도 자동차 바퀴도 골목길도 보이지 않는다
도다리 여남은 마리 건미역더미 곁 포개져 있다
마을버스 기다리는 아이들 땀내가 황혼 속에 자욱하고
한 노파 지팡이에 업혀 온다
맞은 편 길이 또 한 노파를 끌고 온다
기억의 실오리가 은빛 머리칼에 풀려 간다
- 김근희 시집 <외투>에서
■ 김근희
1961년 서울 출생으로 2013년 계간 《발견》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외투』가 있다.
■ 감 상
황혼이 아름다운 이유는 온종일 태양이 혼신의 힘을 다하여 세상을 건너왔기 때문이다. 아침을 열면서부터 뜨거운 얼굴로 세상을 두루 밝힌 태양은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제 할 일을 하다가 종내는 황홀하게 부서진다. 지나온 한 세상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돌아보면 숱한 기억들이 가볍게 머릿속을 휘돌다가 사라지고 만다. 핏빛 황혼의 뜨거운 가슴을 알면 인생의 온갖 고뇌도 아름답다 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는 것이 진정 의미 있는 인생일까. 한 노파, 또 한 노파가 기억의 실오리 풀어내며 황혼 속으로 묻혀가고 있다. / 장종권(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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