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추지 않는 환(幻)
멈추지 않는 환(幻)
  • 김혜식
  • 승인 2007.11.09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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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의 『친절한 복희씨』를 읽고
▲ 김혜식(수필가)     ©독서신문
한 인간의 기구한 삶을 표현 할 때 흔히 지나온 생을 소설의 내용에 비유한다. 한이 얼마나 많으면 사연이 구구해 소설책으로 엮어도 수십 권에 이른다고 말할까.

 젊은 시절 우리 집 이웃에 어느 여인이 살았다. 당시 그녀는 폐병을 얻어 피골이 상접했었다. 내가 살던 동네 허름한 쪽방에서 그녀는 홀로 지내고 있었다. 평소에 아무도 그녀를 찾지 않았다. 가끔씩 그녀의 친정어머니인 듯한 허리 굽은 할머니 한분만 지팡이에 몸을 의지한 채 그녀를 찾을 뿐이었다.

 매서운 칼바람이 부는 어느 겨울날, 그녀는 냉기 도는 자신의 쪽방에서 자는 듯이 눈을 감았다. 그녀의 죽음을 아무도 모를 일인데 마침 옆집에 사는 아주머니가 그녀의 싸늘한 주검을 발견한 것이다.

 그녀는 참으로 기구한 삶을 산 여인이었다. 열다섯 어린 나이에 시골집을 가출, 서울역에서 방황하다가 나이 많은 남자한테 성폭행을 당 한 후 부산 어느 노인 집으로 팔려갔다고 했다. 그 노인은 남자 노인이었는데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생선가게를 크게 하다가 중풍을 얻어 자리보전한지 꽤 여러 해가 됐단다.

 열다섯 어린 나이에 그 노인 집으로 넘겨진 그녀는 노인의 병수발은 물론 수족 노릇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월급 한 푼 못 받았다고 한다. 그녀의 월급은 자신을 노인 집에 넘긴 그 남자가 이미 선불로 챙겨 갔기 때문이란다.

 그러구러 그녀의 나이 열여덟 살 되던 해, 병수발 하던 그 노인이 숨을 거두자 자신보다 스무 살이나 많은 노인의 아들 첩으로 들어앉게 되었다. 말이 첩이지 본처 밑에서 식모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고 한다.

 얼마 후 아이를 배어 딸을 낳았다. 하지만 첫돌 때 잃었다. 그 후 본처의 구박에 견디다 못한 그녀는 그 집을 탈출, 무작정 찾아간 곳이 전라도 외딴 섬의 선술집 작부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곳서 술을 팔다가 어부랑 눈이 맞아 살림까지 차렸으나 그 행복도 오래가지 않았다고 했다.

 만고풍상으로 심신이 지친 그녀는 속세를 버릴 양으로 깊은 산중 암자로 들어가 바라지 스님 노릇을 하다가 병을 얻자 다시 속세로 나왔다고 했다.

 그녀는 생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줄 때면 그 내용을 책으로 엮음 아마도 수십 권에 이를 것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그리곤 항상 눈자위가 발갛게 물들곤 하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암자의 주지 스님이 써 줬다는 부적을 늘 고쟁이 안주머니에서 꺼내 귀물스러운 듯 바라보곤 했었다.

 그녀가 눈을 감기 며칠 전 그녀는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그 부적을 하얀 접시 위에 담아놓고 성냥불을 그어대는 것을 목격했었다. 목숨처럼 귀히 여기던 그것을 그녀는 왜 불태웠을까? 나는 도무지 그녀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헌데 박완서 씨의 소설 『친절한 복희씨』를 읽고 사정은 전혀 다를지 모르지만 조금이나마 그녀의 그때 심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복희씨도 서울 방산 시장 안에 있는 방산 상회라는 가게에 점원 겸 식모로 들어갔다. 그곳서 주인의 강탈로 부부연이 맺어진다. 그도 전실 자식까지 있는 남자 아닌가. 열아홉 꽃 같은 나이에 서른을 넘긴 띠 동갑 홀아비와 하고 싶지 않은 결혼을 한 것이다. 전처의 친정어머니가 아직도 그 집 살림을 쥐고 있는 터수라 그녀는 그의 눈에 벗어나지 않기 위해 ‘얼뜨기’ 행세를 비상구로 장치해두며 살아야 했다.

 전실 자식이 딸린 홀아비의 후처로 안전하게 자신을 지키려면 매사 똑 떨어지는 영악스러움보다는 다소 어눌하고 짐짓 모자람을 내비쳐야 함을 그는 지나치지 않은 것이다.

 전처 아들 생일상에 올릴 닭을 잡을 때만 해도 닭 모가지를 제대로 내리치지 못한 일로 그녀는 얼뜨기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런 그녀가 남편이 중풍으로 눕자 친절해지기 시작했다.
 병든 남편의 밑을 씻어 줄 때 그가 흥얼거리는 것에서 성적 낌새를 느낀 그녀는 남편을 위해 비데를 마련하기도 했다.

 복희씨가 남의 후처로 들어가 지금껏 버틸 수 있었던 것도 실은 친정어머니한테 훔쳐온 양귀비 앵 속 때문이 아닌가.
 납작한 생철 갑 속의 아편을 들여다보며 주인공 복희씨는 남편한테 향한 반감을 달랜 듯 하다. 어쩜 그것은 복용 시 인간을 몽롱한 꿈결에 젖게 하는 약효를 마음으로나마 빌려 자신의 고단한 삶을 달래기 위한 방편으로 삼았을 것이다.

 복희씨가 앵속이 든 생철갑을 한강물에 내던질 때 추락하는 환(幻)을 보았다고 했다. 여자의 일생은 어쩜 이 환(幻)이 전부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사랑도 결혼도 실은 환(幻)에 의한 선택이기에 그것은 아직도 소설 속에서나 현실에서 멈추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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