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엄정권 기자] 화장품 산업의 선구자로 불리는 아모레퍼시픽의 창업자 고(故) 장원 서성환(1923~2003) 선대 회장의 평전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가 출간됐다.
아모레퍼시픽은 개성상인의 정신을 근간으로 70년간 성장을 거듭해온 장수 기업이다. 평균 기업 나이가 22세에 불과한 대한민국에서 찾아보기 힘든 사례로, 사업 활황기에 본업을 멀리하고 다각화에 힘쓰는 여타 기업과 달리 '화장품 기업'이라는 간판을 사수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왔으며 이를 실현한 기업이다.
아모레퍼시픽 창립 70주년을 기념해 출간된 이 책은 서성환 선대 회장의 인생 역정이 녹아있다. 동백기름을 짜던 광복둥이 기업이 세계 시장에서 사랑받은 대한민국 대표 화장품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창업자 서 회장이 겪어야 했던 도전, 좌절, 극복의 과정이 담겨 있다.
"'장원은 사람들과 마늘 한두 쪽을 안주 삼아 깡소주를 마시며 절망을 이야기했고, 희망을 그리며 침묵했다.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 목숨과 바꾸더라도 포기하지 않는다. 이곳에서 다시 시작할 것이다.' 좌절과 무리가 반복될지도 몰랐지만, 어떻게든 딛고 일어서야 했다. 평생 고독할 수밖에 없으리라는 예감도 밀려들었다. 그럴수록 그의 결심도 단단해졌다. 피난지에서도 붉은 해는 어김없이 바다 위로 뜨거운 몸을 풀고 있었다."(136쪽)
"마치 다른 별에 와 있는 듯한 이 기분을 누가 이해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언제쯤 이처럼 근대화된 공장을 갖게 되고, 어떻게 기계화된 설비를 갖출 수 있을까? 이들과의 경쟁이 과연 가당키나 한 것일까? 놀라움과 부러움의 또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생각들이 밑도 끝도 없이 피어올랐다. 그래도 길은 있을 것이었다. 저들이 간 길을 우리라고 못 갈 일이 없다는 옹골진 생각도 어느새 슬며시 마음 한구석을 비집고 올라왔다. 눈으로 모범답안을 보았으니 다만 그 답안에 이르는 길을 찾아 꾸준히 걸어야 할 것이었다."(203쪽)
"장원은 어둠 속에 홀로 앉아 깊은 생각에 잠겼다. 한동안 잠시 잊고 있었던 기억의 조각들이 거대한 흐름처럼 이어져 명멸했다. 어머님의 부엌에서 피어오르던 동백 향기, 자전거를 타고 원료를 구하러 다녔던 멀고도 험난했던 그 길, 개성의 바람을 맞으며 인삼밭을 거닐었던 순간이 스쳐 지나갔다. 베이징에서 돌아와 한 달이나 열병을 앓고 난 뒤 바라본 고향산천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중략) 영등포 공장을 준공했을 때 그 얼마나 가슴 벅찼던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앞으로도 나는 화장품을 할 것이다. 아니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을 할 것이다.' 장원은 계속 되뇌었다."(478~479쪽)
서 창업주의 차남인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그룹 회장과의 이야기도 나온다. 서경배 회장은 서 선대회장의 뒤를 이어 1997년 아모레퍼시픽(당시 태평양) 사장으로 취임, 올해로 18년 동안 CEO 자리를 지켜온 2세 경영인이다.
서경배 회장은 책에서 "장원 서성환 회장님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 분의 삶에서 행복을 떠올린다"며 "어머니의 깊은 지혜를 헤아려 개성에서 서울까지 부지런히 자전거 페달을 밟았고,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소중한 믿음으로 아낌없이 자신의 마음을 나누었다. 물건을 파는 일은 진심을 파는 일이요, 마음을 사는 일이라 굳게 믿었던 큰 사람"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직하게 자신의 삶을 이끌었던 그 분의 집념은 아름답고 건강한 인류를 향한 미(美)의 여정이었다"며 "오늘의 아모레퍼시픽을 가능케 한 그분의 생애를 담은 '나는 다시 태어나도 화장품이다'가 세상과 만난다. 이 책을 통해 그 분과 소통하고, 그 분이 꿈꾸었던 아름다운 세상을 아로새기는 소중한 경험이 될 수 있기를 기원한다. 감사하다"고 덧붙였다. 559쪽, 1만6000원, 알에이치코리아(RH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