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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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서신문
  • 승인 2015.07.15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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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주의 수필집 『풀등에 뜬 그림자』를 읽고

 ▲김혜식 수필가
[독서신문] 학창 시절엔 0이라는 숫자에 왠지 호감이 갔었다. 숫자 0을 유독 좋아한 것은 1에서 9까지의 한 자리의 숫자에다 0을 더한 두 자리의 숫자 10의 숫자로 어떠한 자연수(양의 정수)를 자유롭게 나타낼 수 있다는 진리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훗날 어른이 되어서는 왠지 숫자 0이 싫어졌다. 또 있다. 수를 계산하는 도구였던 주판이 보기조차 싫었다. 주판을 대할 때마다 '왜 사람들은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타인을 속이고 이용하고 배척하는 일에 주판알을 튕기는가?'에 대한 혐오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인간관계를 맺을 때 상대방의 인품이나 재능에 반해 그것을 존중하고 자신의 멘토로 삼기 위해 관계를 맺는가 하면 다수는 어떠한 이익과 필요에 의해 관계를 맺기도 한다.

물론 사회의 형성 기반이 이러한 논리에 의해 발달이 가능했고 문화가 존재하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때론 순수한 인간관계가 아닌 이해타산에 얽힌 관계 속엔 항상 숫자가 뒤따르는 것에 회의를 느끼곤 하였다. 그런 연유로 사영기하학을 연구한 프랑스인 퐁슬레가 괜스레 원망스럽기조차 했었다. 그는 나폴레옹 시대의 공병 장교로서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1812년) 때 모스크바의 대화재와 극심한 추위로 인해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자 러시아의 포로가 되었다. 그때 2년 남짓한 포로 생활 속에서 오늘날 사영기하학을 연구하였던 것이다. 1814년 자유의 몸이 되어 프랑스로 돌아올 땐 사영기하학은 물론 러시아 주판도 함께 갖고 들어왔다. 그리곤 자신의 고향인 메스시의 학생들에게 이 주판을 사용하도록 한 것이 오늘날 주판이 아니던가.

젊은 날의 이러한 가치관 탓인지 아님 천성이 그런지 몰라도 나는 인간관계를 맺을 때 이익 재단엔 서투르다. 가슴이 시키는 대로 상대방이 무엇인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마냥 좋을 뿐이다.

언젠가 어느 여인이 나를 만나 식사 한번 꼭 나누고 싶다고 여러 차례 연락이 왔었다. 요즘 지인들이 "언제 식사한번 하자"가 으레 건네는 인사치레여서 그러려니 했었는데 이 여인은 달랐다. 지난날 나의 배려를 못 잊겠다며 굳이 사양하는 내게 만나기를 수차례 요청해 왔다. 남녀노소 구분 없이 사람 만나기를 좋아하는 나지만 그녀가 내게 점심을 사겠다는 말엔 왠지 선뜻 맘이 내키지 않았기에 거절을 해온 터였다. 그녀는 점심 한 끼 누구에게 대접할 여력도 없는 여인이다. 반지하 셋방에 가진 것이라곤 육신이 전부다. 그는 어렸을 적 가난한 집안을 돕기 위해 방앗간에서 일을 하다가 팔 한쪽을 잃은 불구의 몸이다.

그녀를 알게 된 것은 내가 살던 마을의 시장에서였다. 시장 입구에서 노점상을 하는 그녀를 알게 된 후 난 단골이 되었다. 어느 날은 푸성귀를 사기 위해 들렸더니 그녀가 점심이라고 준비해온 것이 삶은 감자 몇 개였다. 보다 못해 김밥을 사서 건네주기도 하고 도시락도 싸다주곤 했었다. 사소한 인정을 베푼 것 뿐인데 그녀는 그런 나의 호의를 잊지 못하고 있었나보다.

그녀의 간곡한 요청을 거절할 수 없어 시내 어느 보리밥 집에서 그녀와 만났다. 만나자마자 그는 근처 그럴듯한 한정식 집으로 가자고 다짜고짜 나를 이끈다. 나는 극구 사양하면서 보리밥집을 찾았다. 구수한 보리밥을 앞에 놓고 그동안 그녀의 굴곡진 삶의 애환에 귀를 기울이노라니 그녀가 더욱 안쓰러웠다. 요즘은 건강이 나빠져 노점상도 못하고 생활이 점점 더 어렵게 됐다는 하소연을 해왔다.

식사를 마치고 내가 점심값을 계산하려하자 그녀는 정색을 하며 자신의 성의를 무시하는 처사라고 화까지 낸다. 그런 그녀의 완강함에 못 이겨 하는 수 없이 점심값 계산을 포기했다. 그런데 식당 계산대로 나간 그녀가 갑자기 어쩔 줄 모르고 쩔쩔 매는 게 아닌가. 나는 신발을 급히 신고 계산대로 갔다. 식당 종업원이 그녀를 향해 이렇게 말을 했었나보다. "아주머니 통장 잔액이 0원으로 나오는데요."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허름한 자신의 지갑을 뒤지기 시작한다. 지갑엔 돈이라곤 동전 몇 개 들어있을 뿐이었다. 그것을 본 나는 얼른 점심값을 치렀다. 밖으로 나온 그녀가 내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지켜보며 나는 이방주의 수필집 『풀등에 뜬 그림자』를 생각했다. 「독버섯」이란 수필이 떠올랐다. 어느 날 저자는 미동산이라는 수목원을 찾는다. 낙엽을 뚫고 솟아오른 독버섯을 보며 잡초 한 촉 안 나오는 낙엽을 비집고 나온 버섯의 신비로운 생명력에 감탄을 한다. 그러나 그것이 독버섯임을 알고 버섯이 품고 있는 독에 대한 사유가 매우 감동적이었다. 저자는 혹여나 삶을 살아오며 누군가에게 독이 되는 말, 행동을 하지 않았는가' 스스로를 반성해 본다. 이 대목이 필자로 하여금 깊은 울림을 안겨주었던 지라 잊어지지 않는다. 참으로 돋보이는 명 수필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토록 내가 학창시절에 좋아했던 숫자 0도 내가 만난 그녀에겐 치명적 삶의 독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 여인에게 0은 아무것도 소유한 게 없다는 무(無)를 의미할 뿐이다.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힘든 게 춥고 배고픈 일이다. 인간의 삶을 위협하는 가장 위험하고 풀기 어려운 일이 가난이다. 가난의 독은 그 독이 뿜어내는 고통을 겪어보지 못한 이는 결코 알지 못한다.

/ 수필가, 청주 드림작은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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