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냘픈 능소화
가냘픈 능소화
  • 독서신문
  • 승인 2015.06.30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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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일산정(秋日山情)'

[독서신문] 어쩌다 한 번씩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면 N서울타워가 보이고 그 주변으로 우람한 근육질의 거대한 건축물들이 우뚝 우뚝 서있다. 우람한 근육질은 시야에 폭력으로 들어온다. 거대함속엔 폭력과 기만과 위선 독선 오만 등 모든 부정성이 내재해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에서 키르케는 오디세우스 부하들을 돼지로 만든다. 하지만 이 돼지들은 돼지가 되기 전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한다. 돼지 부하들은 “나는 돼지가 아니라 인간이다”라고 외치지만 밖으로 나오는 소리는 꿀 꿀 꿀! 이었다. 후기자본주의 인간의 욕망과 소외현상도 이와 같다. “인간은 노동력을 파는 순간 상품이 되어버린다”(마르크스, 『자본론』)했듯 인간을 상품처럼 유통시키면서 소외시키는 출발이요 결정판이 거대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상품이 아니라 인간이다”

옛날 어느 궁궐에 복사꽃빛 뺨에 고운 몸가짐과 맵시가 아리따운 소화라는 궁녀가 있었다. 임금의 사랑을 받게 되어 후궁의 자리에 올라 궁궐 한 곳에 임시로 머물게 되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임금은 소화가 있는 곳을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소화가 요망하고 간사한 마음을 먹었더라면 갖은 수단을 동원하여 임금을 불러들이려 했을 것이건만, 마음씨 착한 소화는 이제나 저제나 임금을 마냥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왕비와 다른 후궁들의 시새움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모함 때문에 궁궐에서 가장 먼 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 소화는 그러한 사실을 모르고 임금이 찾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혹 임금의 발자국 소리라도 나지 않을까 그림자라도 비치지 않을까 담가를 서성이기도 하고 담 너머로 하염없는 눈길을 보내기도 하며 애를 태우는 사이 무심한 세월은 많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기다림에 지친 소화는 상사병에 걸려 ‘담가에 묻혀 내일이라도 오실 임금님을 기다리겠노라’는 애절한 유언을 남기고 쓸쓸히 죽어갔다. 몹시 무더운 어느 한여름 날, 모든 꽃과 풀들이 더위에 지쳐 있을 때 소화가 머물렀던 처소의 담을 덮으며 넓은 주홍빛 꽃이 곱게 피어났다. 이 꽃이 능소화다.

대개 사람들은 가까운 것은 천하게 여기면서 멀리 있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고,
실속 있는 것은 천하게 여기면서 이름 높은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고,
눈으로 보는 것은 천하게 여기면서 귀로 듣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한다.

-가까운 것이 더 소중하다

夫人莫不賤近而貴遠 賤實而貴名 賤目而貴耳
부인막불천근이귀원 천실이귀명 천목이귀이

- 이광정(李光庭, 1674~1756), 「망양록(亡羊錄)」, 『눌은집(訥隱集)』 권21.

능소화는 우리에게 가까이 있는 꽃이다. “가까운 것”에 관심을 가져야겠다. 가까이 있는 것은 가족이다. 그리고 주변에 있는 친구나 이웃들이다. 서로 어울려 협화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物神이 만들어낸 거대 근육질들은 “멀리 있는 것”이다. 잡을 수 없는 욕망을 향해 달리다보니 “실속 있는 것은 천하게 여기면서 이름 높은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고” 살아왔다.

또한 외모지상주의의 보여주기 식인 “눈으로 보는 것은 천하게 여기면서 귀로 듣는 것은 중요하게 생각”하며 살아오지 않았는지 능소화는 생각하게 만든다. 때문에 햇빛 받아 빛나는 가냘픈 능소화가 거대 건축물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다.

/ 편집위원 검돌(儉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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