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별이 노래가 되고 나무가 시가 된다면…
<88> 별이 노래가 되고 나무가 시가 된다면…
  • 독서신문
  • 승인 2015.06.30 11: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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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태영의 풀 향기

▲ 황태영 수필가

[독서신문] 핸드폰이 없으면 살 수가 없을 것 같다. 잠시만 없어져도 멘붕이 올 정도이다. 그러나 핸드폰이 없이도 잘 살던 시절이 있었다. 많이 불편했지만 그리움은 깊었고 순수한 설렘도 있었다. 한쪽이 전화가 없으면 약속 잡기도 힘들었고, 또 약속시간에 늦게 되면 양해를 구하기도 어려웠다. 학창시절에 좋아하는 여자의 집에 전화를 하려면 심호흡을 몇 번씩이나 해야 했다. 약속시간에 30분, 1시간씩 늦어져도 올지 못 올지도 모르면서 막연히 기다려야 했다. 수줍고 어색했지만 마음은 굳고 변함이 없었다.

공원을 하루 종일 말 없이 걷기만 해도 지겹거나 피곤하지 않았다. 밤이 늦어도 헤어질 때는 늘 아쉽기만 했다.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어도 입에서만 맴돌 뿐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헤어지기 전에는 꼭 해주고 싶었다. 벤치에 앉아 밤하늘 별을 보며 소년이 소녀에게 에둘러 말했다. "저 별보다 네가 더 예뻐." 소녀가 수줍어하며 답했다. "나는 하늘의 별이 되기보다 네 가슴의 별이 되고 싶어." 사람은 누구나 가슴에 각자 저마다의 별을 품고 있다. 별은 어머니이거나 첫사랑 또는 고마운 이의 모습이 되어 나타난다. 간절한 그리움이 되면 별은 시가 되고 노래가 되고 그림이 된다.

푸른 담쟁이덩굴 휘감은 청라언덕에 있는 대구 계성고의 남학생과 신명여고 여학생이 같은 교회에 다녔다. 백옥처럼 고운 피부를 가진 여자는 한 송이 백합이고 흰 새였다. 학교를 갈 때 그녀만 보면 하루가 즐거웠다. 하루는 그녀가 교회에 자두를 가지고 와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남학생은 부끄러워 오르간 뒤로 숨었다. 내성적이던 그 남학생은 그녀를 보듯 오르간 위에 놓여있던 자두를 날마다 바라보았다. 마침내 자두가 말라비틀어지자 자두를 손수건에 싸서 보관했다. 남학생은 자두를 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청라언덕에서 여학생을 기다렸다. 라일락 이파리를 씹으며 사랑의 맛을 음미하고 있을 때 여학생이 나타났다. 남학생은 가슴이 떨리고 흥분이 되었다. 수십 번 연습했던 "자두 고마웠어요"라고 한다는 것이 그만 "라일락 고마웠어요"라고 해버렸다. 그래도 여학생은 조용히 웃기만 했다.

그때는 그랬다. 자주 보지 못해도 변함이 없었고 실수를 해도 감싸줄 여유가 있었다. 달콤한 말을 할 줄은 몰랐지만 여학생은 이미 남학생의 가슴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다.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어느 날 남학생의 마음은 급해졌다. 졸업을 하면 청라언덕에서의 기다림은 끝내야 한다. 새로운 만남을 이어가고 싶었다. 남학생은 백합을 들고 여학생의 길을 막고 물었다. "졸업하면 뭐 할거고?" 여학생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일본으로 유학…" 순간 남학생은 말문이 막혔다. 목숨 같은 첫사랑이지만 일본으로 따라갈 형편은 못되었다. 사랑하는 여인에게 상처를 남기는 장애물은 되고 싶지 않았다. 남학생은 흐느끼며 돌아서야만 했다. 그녀는 일본에서 결혼하여 살다가 폐결핵으로 국내에 다시 귀국한 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한다. 이십대 초반의 꽃다운 나이에 그렇게 봄날은 갔다. 백합처럼 박태준의 첫사랑도 그렇게 갔다. 그러나 박태준은 그녀를 그대로 보낼 수가 없었다.

'… 청라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박태준의 상처, 박태준의 별은 가곡 '동무생각'으로 다시 태어났다.

바람이 지나가도 나무는 바람을 따라가지 않는다. 바람이 나무를 유혹해도 나무는 변함이 없다. 세월 따라 모두가 떠나가지만 나무는 떠나지 않는다. 나무는 늘 그 자리에 있어 주어서 고맙다. 그래서 눈물이 날 때면 자꾸만 나무를 보게 된다. 오랜 시간이 흘러도 각자는 가슴 속 깊이 자리잡은 자신만의 나무를 가지고 있다. 바쁜 듯 잠시 잊고 지내다 보면 어느덧 훌쩍 더 커져버린 나무,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늘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리움. 고향 같고 어머니 같고 첫사랑 같은 나무가 있다. 어떤 이에게는 상처와 눈물의 나무일지 모르지만 거기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야 한다. 첨단과학이 세상을 아무리 빠르게 바꾸어도 근본 도리를 잊을 수는 없다. 가슴에 칼을 품으면 언젠가는 손에도 칼을 들게 되고, 가슴에 꽃을 품으면 언젠가는 손에도 꽃을 들게 된다. 가슴에 별이 노래가 되고, 가슴에 나무가 시가 된다면 삶은 진실로 따뜻하고 풍요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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