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딸 아이의 유치원 시절 친구 엄마들을 만났다. 그들의 화두는 욘사마 배용준의 결혼 이야기였다. 민망하게도 나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어서 딱히 해줄 말을 찾지 못했다. 질문 공세를 받으며 드라마의 위력을 다시 한 번 느꼈다.
한 엄마는 최근에 보고 있는 한류 드라마 이야기를 하면서 고개를 계속 갸우뚱댔다. 은행 지점장인 남편이 한직으로 밀려나 부인이 가족 몰래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그 딸이 우연히 식당에서 일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엉엉 울면서 "엄마가 왜 이런 일까지 해야 하느냐,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궁금증을 한국인인 나를 통해 풀고 싶은 듯했다. "한국에서는 엄마가 식당에서 일하면 창피해 하느냐?", "드라마를 보면 직업의 귀천 같은 차별이 있는 것 같은데 현실도 그러냐?", "상대 직업에 따라 결혼에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장면이 많이 나오는데 실제 생활도 드라마와 같은가?" 등.
난처했다. 한마디로 딱 잘라 아니라고 말하기엔 좀 양심에 찔리기도 했고, 또 그렇게 하면 드라마를 지나친 과장으로 만들어버릴 것 같기도 해 잠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을 좀 벌 셈이었다고나 할까. 궁여지책으로 "일본에는 직업 차별이 없는가"라고 반문했다. "수입이 좋으면 좋은 직업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르바이트를 창피하게 생각하거나 가족 몰래 할 일로 여기지는 않는다"고 딱 부러지게 말했다.
딸이 어렸을 때 구청에서 소개해준 도우미 할머니한테 아이를 맡긴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할머니가 집으로 오는 조건이었는데 일터가 할머니 집에서 가까워 아이를 할머니 집에 맡기기로 했다. '나이 든 분이 오죽 생활이 힘들면 이런 일을 할까' 생각했지만 이런 선입견을 떨쳐버리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이를 데리러 할머니 집을 방문했을 때는 내 눈을 의심할 정도였다. 제법 넓은 정원이 있는 고급 주택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느 정도 친분이 생겼다 싶었을 때 왜 이 일을 하는지 물었다. "여행을 좋아하는데 집에 있으면 답답하고, 그리고 연금으로 여행 가기는 아까워서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이 들어 직접 번 돈으로 매년 여행을 다니다보니 더 많은 나라를 다닐 수 있게 되었다"며 "몸도 마음도 건강해졌다"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이런 일본인들에게 한국 드라마에서 나오는 직업관은 이해하기 힘들다기보다 어이가 없을 수 있다. 어릴 때 미국 영화를 보면서 미국은 집안에서 신발을 신고 다닌다는 것을 알았고, 일본 영화를 보면서 혼자 식사할 때도 잘 먹겠다는 인사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지구촌 곳곳에 한류가 흐르고 있다고 매스컴에서 연일 자화자찬이다. 단 한 편의 드라마나 영화가 한국인을 알리고 한국 문화를 알리는 홍보대사 역할을 하고 있음을 잊지 않기를 바란다.
대중매체는 군중의 심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 있다. 한국에서 맞벌이를 해야 하는 가정이 적지 않다. 그 모든 사람들이 다 전문직일 수는 없다. 우리의 현실에 맞는 드라마, 나아가 편견을 줄여가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있는 드라마 제작에 대중매체들이 앞장서야 한다.
한국 사회는 급변하고 있는데 드라마 속 한국 문화는 아직도 신분 차별, 직업 차별 속에 그대로 머물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직업에 대한 편견을 부추기는 듯해 더없이 안타까울 뿐이다.
/ 도쿄(일본)=이하빈(르포 작가, 동경싱싱아카데미 부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