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웰다잉', 그리고 '아름다운 삶'
'웰다잉', 그리고 '아름다운 삶'
  • 조석남 편집국장
  • 승인 2015.06.02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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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석남 편집국장

[독서신문 조석남 편집국장]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시인 천상병은 「귀천(歸天)」이라는 시에서 이승에서의 삶을 '아름다운 소풍'으로 표현했다. 죽음이라는 삶의 끝자락에서 이처럼 아름답게, 편안하게 떠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죽음은 모두가 두려워한다. 현세의 고통에서 구원되고 '새로운 여행'을 떠난다기보다는 모든 것이 끝이요, 상실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죽음에 대해서는 수많은 철학자와 문학가들이 나름대로의 사상을 피력하고 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이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떤 삶이 의미가 있을까. 아름다운 시간을 보낸 사람이 아름다운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 얼마 전부터 우리 사회에는 음식과 문화 전반에 '웰빙(well-being)' 바람이 불고 있다. 하지만 '100세 수명 시대'를 맞아 최근에는 진정한 '웰빙'의 완성은 '웰다잉(well-dying)', 즉 '품위 있는 죽음'이란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웰빙(Well-being)', 사람답게 죽는 것을 '웰다잉(Well-dying)', 사람답게 늙는 것을 '웰에이징(Well-aging)'이라고 한다. 영국의 심리학자 브롬리는 '인생의 4분의 1은 성장하면서 보내고, 나머지 4분의 3은 늙어가면서 보낸다'고 했다. '100세 쇼크'라고 불리는 이 시대의 화두는 더 이상 '장수'가 아니라 '웰에이징', '웰다잉'이다.

'웰다잉' 문화가 한국에 처음 소개된 것은 지난 1991년 창립된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회'를 통해서이다. 이 모임은 그동안 죽음학 공개 강좌와 슬픔 치유 모임, 공동 추모제 등으로 죽음 준비 교육의 필요성을 사회에 강조해왔다. 죽음학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죽음 준비 교육은 어린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받아야 할 평생교육"이라고 말한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과 생명의 존엄성을 깨닫도록 해 급증하는 청소년 자살과 비행 예방에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국내 '웰다잉' 문화의 현실은 교육 중심, 계몽 중심이므로 좀 더 폭넓은 교육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이를 위해 장년층 이상을 대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교육을 젊은 연령대까지 확산시킬 수 있는 방법과 종교성을 뛰어넘는 일반화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 준비는 죽음을 생각하면서 '바로 지금 여기서' 잘 사는 일이다.

『죽음에게 삶을 묻다』의 저자 유호정은 "죽음은 아쉽지만 억울하지 않은 것, 고통 대신 편안할 수 있는 것, 슬프지만 감사한 것, 두렵지만 설레는 것, 맞이할 만하나 뛰어들 만하지는 않은 것"이라고 말한다. 죽음은 두렵고 부당한 것이 아니라 삶의 일부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앞에 놓인 삶에 조금 다른 색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30년 동안 수천 명의 죽음을 지켜본 세계적인 호스피스 전문의 아이라 바이오크는 저서 『아름다운 죽음의 조건』에서 뜻밖의 죽음을 당하거나 갑자기 병마가 덮칠 수도 있는 삶을 후회 없이 살아가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고통스러운 임종을 앞둔 수많은 환자들에게 세상에서 가장 단순하지만 실천하기 힘든 네 가지 진리를 일깨워 주었다.

'용서해요. 고마워요. 사랑해요. 그리고… 잘 가요.' 한낱 몇 글자로 이루어진 이 짤막한 네 가지 말이 인생에서 결코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소중한 사실들을 함축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자에게 알려준 사람은 바로 '죽어가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우리의 관계는, 아니 우리의 삶은 타성에 젖기 십상이어서 살아 있다는 것이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 느끼지 못할 때가 많다. 우리에게 주어진 순간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도 모른다. 스티븐 레빈은 『생애 마지막 일 년(a year to live)』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우리가 거짓으로 고마워할 수 없듯이 거짓된 용서도 있을 수 없다. 감사는 이해하고 존재하는 방식이다. 켜켜이 쌓인 혼란을 풀어가는 타고난 지혜이기도 하다. 아울러 감사는 우리가 잠시 발을 딛고 서 있는 깨달음의 땅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사랑을 치료할 방법은 더 많이 사랑하는 것 뿐이다'라고 썼다. 죽음은 우리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소중한지, 삶을 지탱해주는 사랑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일깨워준다. 자신과 아주 가까운 누군가가 죽어가고 있거나 이미 고인이 되었을 때에 사랑은 우리의 슬픔을 불살라버릴 수 있다. 그리하여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싹트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게 된다.

때늦은 후회를 하지 않으려면 기회가 닿을 때마다 용서, 감사, 사랑의 말을 전하고 서로를 따뜻하게 감싸주어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소중한 관계들을 아름답게 꾸려나갈 수 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안전망이 무너지면서 사람의 생명을 소홀히 하는 '인명경시'의 개탄스런 나라가 됐다. '억울해서', '충동적으로', '복수심으로', '생활고 때문에' 너무나 쉽게 목숨을 버린다. 더욱 큰 문제는 이런 안타까운 현실에 사람들이 갈수록 무감각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삶과 죽음에 대한 진지한 태도와 성찰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마치 지금 이 순간만 사는 것 같은 사람들, 마치 영원히 살 것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묻고 싶다. 우리가 시간 앞에 절대적으로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닌지.

세상은 온통 '살아남는' 얘기로 가득차 있다. 악착같이 살고, 부정하게 살고, 부당하게도 산다. 그러나 모든 삶은 결국 소멸한다. 부당한 과정에 아름다운 종말은 없다. 부정한 욕망을 비우고, 혹은 좌절하고 싶은 마음도 비우고 한번쯤 생각해볼 일이다. '웰다잉'이라는 말 앞에서, 우리는 잘 살고 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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