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제의 '닭으로 본 인문학' _ (57) 원님과 아전과 농부의 닭 한마리
백민제의 '닭으로 본 인문학' _ (57) 원님과 아전과 농부의 닭 한마리
  • 이보미 기자
  • 승인 2015.05.25 18: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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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민제 칼럼니스트
조선 선조 때 문신인 우복룡이 있다. 그는 용궁현감으로 재직 중 임진왜란을 만났다. 주위 지역이 적에게 점령됐으나 그는 현을 끝까지 지켰다. 그 공로로 다음 해에 안동부사로 승진했다. 강원도관찰사, 충청감사, 나주목사 등을 역임한 그는 원칙주의자 면모가 강했다.

1567년(명종 22년) 국상을 당하자 유생으로서 3년간 상복을 입고 지냈다. 그는 성균관 유생으로 있던 1573년(선조 6년)에 사마시에 합격했다. 당시 성균관 관습은 대과 시험을 볼 때는 당상관은 명륜당에 앉고, 유생들은 뜰 아래에서 절을 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우복룡은 임금이 아니면 절을 할 수 없다며 읍례로 대신했다. 그의 주장을 들은 좌의정 노수신이 여러 대신들과 상의하여 절 대신 읍례를 예로 정했다. 이로써 유생들의 권위가 서게 되었다.

질서에서는 대쪽 같은 원칙론을 고수한 우복룡이지만 백성에게는 많은 융통성을 보였다. 그에게는 닭 한 마리의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가 1592년 용궁현감으로 부임했을 때다. 한 농부가 나라의 곡식을 빌려다 대책 없이 다 사용했다. 너무 가난한 농부는 대출 곡식을 갚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우복룡이 농부를 불렀다. 빌려간 곡식을 갚으라고 했다. 농부는 갚아야 하지만 가진 게 없어 방법이 없다고 하소연했다.

우복룡은 "네 비록 가난하지만 나라의 법은 지엄하다. 고을 수령은 나라의 곡식을 축낼 수 없다. 돈이나 곡식이 없으면 네 집에 있는 다른 것이라도 대납을 해야 한다"고 준엄하게 이야기했다. 농부는 "집에 변변한 게 하나도 없다. 다만 닭 한 마리가 유일하게 돈이 될 재산"이라며 선처를 호소했다. 우복룡은 "그렇다면 그 닭이라도 바쳐라. 관아로 닭을 삶아서 갖고 와라. 그러면 내가 먹은 뒤 네가 갚아야 할 대출곡식을 탕감해주겠다"며 타협안을 제시했다. 농부는 감사의 인사를 한 뒤 집으로 갔다. 농부는 다음 날 삶은 닭을 우복룡에게 올렸다.

 
우복룡은 얼굴에 미소를 지으면 말한다. "내가 농담을 했는데, 네가 진담으로 여겼구나. 고을 수령이 어찌 백성의 닭을 먹을 수 있겠는가. 더욱이 나라의 곳간 채우는 일을 사사롭게 해결할 수 있겠는가"라며 닭을 받지 않았다. 농부는 삶은 닭을 다시 보자기에 싸 관문을 나섰다. 이 때 문 주위에 있던 관아의 아전들이 삶은 닭을 다 먹어치웠다.

다음 날 우복룡이 농부를 다시 불렀다. "내가 많이 생각했다. 수령이 백성에게 닭을 삶아 오라고 했다. 농담이었지만 네가 진실로 알아들었다. 내가 너에게 닭을 삶아오라고 한 뒤 받지 않으면 수령이 약속을 어긴 셈이 된다. 그 닭을 다시 가져오너라. 내가 너에게 한 약속을 지키겠다."

농부는 그간의 사정을 말했다. 우복룡은 닭을 먹은 아전들을 불러들였다. 그들로 하여금 농부의 곡식 값을 납부하게 했다. 이에 농부는 기뻐하고, 아전들은 원님의 지혜에 탄복했다.

우복룡의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지혜의 일화다. 그러나 중간 관리인 아전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다. 타인의 닭을 먹은 것은 잘못이지만 책임 이상의 징계를 받았기 때문이다. 닭 값만 물어내는 게 상식이다. 그런데 그 몇 십배나 몇 백배의 금전적 피해를 강요받은 것이다. 선비 등 옛 지배층의 일화는 권선징악이나 백성사랑 또는 지혜를 강조하다 보니 때로는 모순적인 내용도 있다.


■ 글쓴이 백민제는?
맛 칼럼니스트다.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10년의 직장생활을 한 뒤 10여 년 동안 음식 맛을 연구했다. 특히 건강과 맛을 고려한 닭고기 미식 탐험을 했다. 앞으로 10여년은 닭 칼럼니스트로 살 생각이다. 그의 대표적 아이디어는 무항생제 닭을 참나무 숯으로 굽는 '수뿌레 닭갈비'다. www.supu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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