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린다. 완벽할 수는 없는 인간의 판단으로, 고통 받을 수도 있는 사람의 처지를 되살피는 것은 바람직하다는 시각이다. 또 교통법규 위반 등 민생에 관련된 경우, 경제 활성화를 위한 조치 등도 때에 따라서는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경영인과 정치인의 잦은 사면은 돈과 권력이 없는 서민에게는 특별사면을 부정적으로 보게 한다. 또 궁극적으로는 시민의 준법의식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
특별사면은 옛날부터 있었다. 주로 귀양 간 정치인에 대한 동료들의 구명운동의 결과였다. 다산 정약용도 유배 10일 만에 특별사면을 받은 적이 있다. 그는 당시 심정을 『다산시문집』에 남겼다.
귀양 열흘 만에 받은 특사교지(在謫十日特蒙赦旨)
탱자 꽃핀 성 마을에서 대궐 꿈을 꾸는데/천상금계 보이더니 금방 사면 되었네/
이웃이 선물한 술이 아직 남아 있고/나그네는 시 몇 수도 짓지 않았네/
비 내린 산에는 매실 풍성하고/여름으로 가는 역로에는 버들가지 무성하네/
임금의 후덕한 은혜를 입었지만/황혼이라 감히 갈 수 없어라
옛사람의 사면은 닭과 연관이 있다. 정약용도 꿈에서 하늘의 금계를 본 뒤 석방되었다. 금계는 하늘에서 계절의 흐름을 담당하는 별인 천계성(天鷄星)을 상징한다. 동양에서는 이 별이 나타나면 나라에서는 사면령을 내렸다. 수서의 『형법지』에는 '죄수를 석방할 때는 창합문 밖 오른쪽에 금계와 북을 설치한다. 북을 일천 번 친 뒤 죄수를 풀어준다'고 하였다. 『송사(宋史)』 「의위지」에도 '하늘의 천계성이 움직이면 나라에서 사면령을 내린다. 육조(六朝) 이래로 금계를 사용했다'는 구절이 있다. 당나라에서는 특별사면 때 붉은 옷을 입은 관리가 금으로 만든 금계를 들었다.
하지만 사면이 되어도, 자중하는 선비도 있었다. 정약용은 열흘 만에 석방이 되자 기뻐하면서도 임금 곁으로 가지 않을 뜻을 비친다. 사면이 되었지만 죄인이기에 임금을 모실 수 없다는 의미다. 정약용은 이를 '황혼이라 감히 갈 수 없다'고 노래했다. 미인과의 즐거운 만남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는 이 표현은 죄인이 왕을 감히 모실 수 없다는 양심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중기의 학자 이익은 『성호사설』에서 '금계방사(金鷄放赦)'라고 했다. 금계와 사면의 관계를 설명한 그는 특별사면에 대한 시각을 당나라 태종의 생각을 빌려 표현했다.
한밤중이면 양기(陽氣)가 움직인다. 이 까닭에 닭이 반드시 날개를 치고 울면서 기쁜 소식을 전한다. 나라도 경사가 있으면 죄수를 석방한다. 천계성(天鷄星)이 움직이면 반드시 사령(赦令)을 내린다. 이 같은 이치로 북쪽 전문(殿門)밖에 금계(金鷄)를 상징으로 세웠다. 금계방사(金鷄放赦)다.
하지만 사면은 바르지 않은 사람의 바람이다. 이 행위가 어찌 하늘의 별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당나라 태종은 "한 해에 사면령 두 번만 내리면 좋은 사람은 벙어리가 된다"고 하였다.
옛사람은 금계를 세워 하늘에 죄인 석방을 고했음을 알 수 있다. 『당서(唐書)』의 「예의지(禮儀志)」에는 사면령 내리는 날 의식이 적혀있다. 넉 자쯤 되는 나무로 닭을 만든 뒤 머리를 금으로 장식하고, 입에는 비단으로 만든 기를 물린다. 그리고 채반(采盤)에 높이 세웠다. 하늘의 천계성(天鷄星)을 상징한 것이다. 그러나 당나라 태종인 이세민은 특별사면령이 한 해에 두 번 이상 내려지면 선량한 사람이 수긍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 글쓴이 백민제는?
맛 칼럼니스트다.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10년의 직장생활을 한 뒤 10여 년 동안 음식 맛을 연구했다. 특히 건강과 맛을 고려한 닭고기 미식 탐험을 했다. 앞으로 10여년은 닭 칼럼니스트로 살 생각이다. 그의 대표적 아이디어는 무항생제 닭을 참나무 숯으로 굽는 '수뿌레 닭갈비'다. www.supur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