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은 29년(1447년) 별시 문과 시험에서 '인재 등용 방법'을 물었다. 이 시험에서 강희맹이 장원을 했다. 그의 문집 『사숙재집』에 답안이 실려 있다.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적합한 자리에 앉으면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단점의 지적 대신 장점을 찾는 것이 인재를 구하는 기본입니다.'
세종은 강희맹의 답안에 흐뭇해했다. 가려움을 시원하게 긁어주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세종은 인재난에 허덕였다. 할아버지 태조를 도와 조선을 개국한 공신들은 물러났고, 중진들은 두 차례 왕자의 난과 태종의 외척 제거로 인해 큰 타격을 받은 상황이다.
특히 고려를 잊지 못해 출사를 거부하는 지사들도 많았다. 세종이 집현전에 연연한 것도 나라를 경영할 인재의 부족이라는 현실 탓도 컸다. 임금은 신진 세력을 하루빨리 키워야 할 절박한 상황이었다.
세종은 신진세력이 성장할 때까지 기존의 관리들을 최대한 활용해야 했다. 이 같은 필요성에 의해 혜택을 본 인물이 황희 정승이다. 세종은 양녕대군의 폐세자에 반대해 귀양을 갔던 황희에 대해 장점만 봤다. 능력만 보고 단점은 덮어주었다. 약점이 있으면 더욱 절제된 생활을 하는 게 사람심리다. 황희는 재상이 된 후 청백리로서의 모습을 보였고, 24년 간 정승의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젊은 시절의 그는 여러 추문에 휩싸였다. 사관은 아예 뇌물을 받은 그를 '황금 대사헌'으로 표현했다. 어머니가 천민이라는 손가락질 속에 박포의 처와 간통했다는 비난도 일었다. 아들의 매관매직과 사위의 살인사건 은폐조작도 도마 위에 올랐다.
하지만 세종은 황희의 경륜과 학문, 정책 아이디어 등을 보고 감쌌다. 임금은 그의 사직서를 몇 차례 반납하고, 잠시 쉬면 복직시켰다. 연로한 그를 위해 가마를 보내주기도 했다.
이 같은 임금의 각별한 사랑 속에 황희는 나랏일에 전념했고, 명재상으로 이름을 남겼다. 지금과 달리 인재가 귀하던 세종 시대의 특별한 시대운이라고 할 수 있다.
어진 황희는 생활도 검소했다. 매우 청렴한 황희는 관복도 한 벌로 생활하고, 장마철에는 초가집에 비가 샐 지경이었다. 세종은 황희 정승의 가난을 안쓰럽게 여겼다. 도와줄 방법을 생각하였다. 왕은 궁리 끝에 묘안을 냈다. "내일 아침 남대문을 열었을 때부터 문을 닫을 때까지 문 안으로 들어오는 물건을 다 사서 황희에게 주겠다."
그러나 그 날은 뜻밖에도 새벽부터 밤까지 폭풍우가 몰아쳤다. 장사하는 사람이 드나들지 않았다. 밤이 다가와 성문을 닫으려 할 무렵, 시골 영감이 달걀 한 꾸러미를 들고 들어왔다. 왕은 약속대로 달걀을 사 황희에게 주었다. 달걀을 받은 황희는 집에 도착해 삶았다. 그런데 달걀이 모두 곯아서 한 알도 먹을 수가 없었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는 속담을 생각나게 하는 내용이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던 사람에게 모처럼 기회가 왔다. 그런데 예상 밖의 상황이 전개돼 그마저 물거품이 된다. 가난한 황희 정승은 모처럼 계란을 얻었는데 하필이면 곯은 것이었다. 밀가루 장사를 하는 데 바람이 분 격이다. 여기에서 나온 고사가 '계란에도 뼈가 있다'는 '계란유골(鷄卵有骨)'이다. '골'은 원래 뼈가 아닌 곯았다는 의미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뼈로 와전됐다.
■글쓴이 백민제는?
맛 칼럼니스트다.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10년의 직장생활을 한 뒤 10여 년 동안 음식 맛을 연구했다. 특히 건강과 맛을 고려한 닭고기 미식 탐험을 했다. 앞으로 10여년은 닭 칼럼니스트로 살 생각이다. 그의 대표적 아이디어는 무항생제 닭을 참나무 숯으로 굽는 '수뿌레 닭갈비'다. www.supur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