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제의 '닭으로 본 인문학' _ (19) 남의 떡이 커 보일 때
백민제의 '닭으로 본 인문학' _ (19) 남의 떡이 커 보일 때
  • 한지은 기자
  • 승인 2015.03.24 2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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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민제 칼럼니스트
꼭 필요한 존재의 소중함을 잊을 때가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태양의 따뜻함도 그렇고, 공기의 신선함도 그렇고, 인생 동반자의 도움도 그렇다. 톨스토이는 세 가지 자문을 했다. "가장 중요한 순간은 언제인가. 가장 중요한 사람은 누구인가. 가장 중요한 일은 무엇인가." 또 답도 말했다. "가장 소중한 시간은 현재이고, 가장 소중한 사람은 옆에 있는 사람이고, 가장 소중한 일은 지금 옆에 있는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하는 것이다."

주변 사람의 가치를 잊는 것은 새로움에 대한 갈망일 수 있다. 이 같은 본능 덕분에 사회는 발전하고 인간관계는 풍성해질 수 있다. 역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을 소홀히 대함으로써 인생의 큰 것을 잃기도 한다. 황혼이혼이 대표적이다. 수십 년간 소중한 존재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서운함이 나이 들어서 결별하는 큰 이유다.

신실한 인간관계를 강조하는 고사가 '귀곡천계(貴鵠賤鷄)'다. '고니는 귀하게 생각하고 닭은 무시한다'는 뜻이다. 먼 사람은 소중하게 생각하는 데 비해 가까운 사람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음을 빗댄 것이다. 또 이 같은 행위가 인지상정이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귀곡계천'은 한나라의 왕충이 쓴 『논형(論衡)』에 나온다. '세상의 학문을 저울질한다'는 제목인 『논형』에서 읽을 수 있듯이 왕충은 창조지식인이었다. 세상의 요구나 권위자의 주장에 그저 따라가는 게 아니라 궁금함을 풀려고 했다. '공자에게 묻는다(問孔篇)', '맹자를 비판한다(刺孟篇)'는 글을 통해 학문이나 가치관을 스스로 찾으려고 했다.

그는 논형을 쓴 목적을 '사물의 가볍고 무거움과 참과 거짓의 표준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했다. 진실이 거짓에 묻히고, 가짜가 진실로 둔갑하는 것을 미워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말이 '귀곡천계'다. 가까움에서 진실을 찾고, 주변에서 귀함을 찾아야 함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문구다. 이 과정에서 닭과 고니를 비유했다. 닭은 쉽게 볼 수 있기에 가치가 쉽게 잊혀지고, 가끔 오는 고니는 소중하게 여겨질 수 있다.

우리 역사에서의 '귀곡천계' 용법을 살필 수 있다. 신라 최치원이 당나라에 쓴 항의 편지다. 최치원은 '당나라 입장에서 보면 신라는 닭이고, 발해는 고니'라고 했다. 그런데 당나라가 고니는 귀하게 여기고, 닭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다.

배경은 과거시험이었다. 9세기의 당나라는 외국인을 관리로 선발하기 위해 빈공과(賓貢科)를 실시했다. 872년 시험에서 발해 유학생 오소도가 장원을 했다. 신라 유학생 이동은 다음 순위였다. 최치원은 심한 수치감을 느꼈다. 당나라가 신라를 홀대하고 발해를 우대한다는 생각을 했다. 최치원은 2년 뒤에 직접 시험에 응해 합격했다. 877년 시험에서도 신라 유학생 2명이 합격했다.

신라인의 자존심이 약간 회복될 무렵에 최치원은 당나라 예부상서 등에게 편지를 보냈다. 발해인의 합격을 불공정한 시험 관리로 규정하고 세상에 부끄러운 일이라고 공박했다. 이와 함께 '귀곡천계(貴鵠賤鷄)' 표현으로 발해인을 우대하는 듯한 당나라에 대해 화살을 날렸다. 872년 발해인 오소도의 수석합격은 정상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당시 시험감독관인 정공 최시랑의 편협한 조치나 당나라의 정책에 대한 의구심을 나타냈다.

이로 인해 열등한 나라인 발해의 뒷줄에 신라가 앉는 수모를 당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874년 예부상서 배찬과 877년 고대부의 정당함으로 합리적인 시험이 실시된 것은 감사한다는 내용이다. 최치원의 편지는 남북국 시대 신라와 발해의 당나라를 사이에 둔 치열한 외교전의 한 장면이다.

나라의 외교관계나 개인의 인간관계나 친소관계 지속은 참 힘들다. 상황이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옆에 있고, 관계가 많은 사람이 소중함은 진리다. 이를 바탕으로 다른 사람도 사귀는 관계의 폭을 넓혀야 한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남의 떡이 커 보이지만 내 떡에게 더 잘해야 하는 이유다.

■ 글쓴이 백민제는?
맛 칼럼니스트다.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10년의 직장생활을 한 뒤 10여 년 동안 음식 맛을 연구했다. 특히 건강과 맛을 고려한 닭고기 미식 탐험을 했다. 앞으로 10여년은 닭 칼럼니스트로 살 생각이다. 그의 대표적 아이디어는 무항생제 닭을 참나무 숯으로 굽는 '수뿌레 닭갈비'다. www.supur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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