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신문 신인문학 당선작 소설부문
독서신문 신인문학 당선작 소설부문
  • 신현지
  • 승인 2007.10.22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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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舞臺)
          
  "엄마! 클라라가 없어"
아이는 분명 클라라가 없다고 가랑잎 같이 바스라지는 여린 목소리로 한남동을 지나 강변북로를 접어드는 날 불러 세우고 있었다. 
 “뭐! 클라라라니?”
 "내 튜튜말이야, 클라라의상 어제 리허설 끝내고 분명 캐비닛에 넣어 두었는데 ...근데 없어 어떡하지 내 클라라...나 클라라 못하면...”
아이의 바스라지는 저음은 거의 울음에 가까운 것으로 클라라 의상인 튜튜가 없어졌다고 처음과는 달리 정확하게 발음하고 있었다. 하지만 울음이 묻어 나오는 아이의 말투에는 무기체의 의상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유기체의 부재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여전했다.
 ‘아! 튜튜 그렇지 클라라 그래! 그 클라라!...’순간 난 딸아이의 말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딸애가 튜튜와 클라라를 아니 자신과 클라라를 같은 동급체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어쩜 당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 것은 누구나 선택해 집어들 수 있는 선물코너의 진열 상품 같은 것이 아닌 크리스마스이브에 드로셀메이어가 클라라에게 준 환상의 세계, 즉 발레지망생의 행운의 마스코트, 무지개빛의 찬란함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매년 크리스마스시즌 g극장에서 공연되는 호두까기는 독일 호프만의 동화에 차이코프스키의 감미롭고 부드러운 음악으로 가족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화려한 발레작품 중에 하나다. 이 작품이 매년 성탄시기에 맞춰 공연되는 이유는 아마도 어린 관객들이 좋아한다는 것에 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린 그들은 작품 속의 소년 소녀들이 서구풍의 환상적인 크리스마스를 배경으로 갖가지 캐릭터와 세계민속춤들을 보여주는 화려함에 호기심어린 시선을 모은다. 다시 말해서 호두까기는 클래식이 가지고 있는 그 이해 어려움이 아닌 어린 그들의 눈으로도 쉽게 이해되고 재미를 유발하는 구성이라서 날뛰고 산만한 아이들조차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이들이 지루해 하지 않고 좋아하니 가족 모두 즐길 수 있는 작품으로 선정은 당연한 것일 것이고, 마찬가지로 그러한 매력은 이곳의 발레교실 아이들을 몸살 나게 하는 것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그들이 크리스마스이브에 초대되는 어린 클라라의 친구들로서 작품에 출연되기 때문이다. 물론 발레교실 아이들이 전부 선택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어린 그녀들은 푸른 가면을 뒤집어 쓴 생쥐역할이라도 g발레단원들과 크리스마스 시즌을 한 무대에서 갈채를 받을 수 있다면 행운이었고 그 행운은 이 발레학원에서만 누려보는 대단한 특혜였다. 더군다나 이곳의 엄마들은 언제부턴가 ‘어린 클라라역할을 한번만이라도 맡아보게 되면 언젠가는 이 대극장에서 프리마돈나로 꼭 서게 된다더라,’ 는 말을 신앙처럼 믿고 있었다.
 물론 누가 그와 같은 말을 퍼트렸는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니 클라라 역은 그녀들의 찬란한 행운의 빛 일수밖에 없었고 당연 그 역은 모두가 소망하고 꿈꾸는 자리일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연 호두까기 오디션에 통과하기 위한 전략들이 만만치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 어린세대에 포기해야 하는 것들, 또 노골적으로 나타내는 경쟁의식 같은 것들이 소녀들을 일찍부터 말라비틀어진 여우들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천연덕스런 웃음 뒤에 우정을 가장한 어둡고 끈적이는 교활함. 서로 상대에게 초콜릿을 권하곤 정작 자신은 그 달콤함을 과감히 무시하는 냉정함. 초콜릿 덩어리를 뭉뚱그려 발밑에 슬쩍 짓이겨 버리는 앙큼한 그녀들은 확실히 소녀의 결정적 발달시기를 놓쳐버린 말라비틀어진 여우들이었다. 

  "잘 찾아봐, 니가 어디 딴 데다 두고 찾는지"
워낙 덜렁대는 아이의 산만함을 아는지라 나는 다시 찾아볼 것을 이르고는 까만색 폴더를 접었다.
 일요일 아침. 강변북로는 바람에 돛이라도 매단 듯 거침없이 미끄러진다. 물론 막히지 않을 것을 예상하고 출발하긴 했지만 매일같이 주차장을 가장하고 있던 도로에 익숙해 있는 나에게 활짝 내려 그어진 도로는 누군가가 나를 시뮬레이션에 이용하는 것 같은 묘한 착각에 빠져 들게 했다. 매일 도로를 빼곡하게 채웠던 운전자들이 성난 군중처럼 한 곳에 모여 커다란 화면을 통해 나를 지켜보고 있을 것 같은 뒤통수 따가움이랄까. 시원하게 뻥뻥 뚫린 도로에 속도감을 그들은 대리만족이라도 해보겠다는 듯 시뮬레이션을 즐기는 건 아닐까.
 ‘지금 그들은 내가 내는 속도감에 환호성을 내지르겠지, 어쩜 차가운 맥주라도 들이키면서 말이야. 속력을 더 내어줄까. 아니지 저기에 속도계가 있지 않은가! 언제 어디서든 포위망에 걸려들기를 바라며 음흉하게 내려다보는 저 깊은 동공.’ 나는 브레이크를 밟아 스피드를 덜어낸다. 생각이 많다. 한 생각에 머무르지 않는 산만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어떻게 알았을까? 아무도 모르게 움직였던 일인데. ‘제기랄 그렇다고 내가 잘못한 일도 아니면서 움츠려들기는’.... 나는 어느새 핸들을 움켜잡던 한 손을 들어 머리카락을 훑어 검지에 빙빙 돌려 감고 있다. 긴장하면 나 자신도 모르게 나타나는 의식되지 않는 버릇이다.
 
 월 수 금 일주일에 3일은 아이를 데리고 일산에서 자유로를 달려 g부설학원에 나가는 일이 만만치 않은 어려움이란 걸 난 안다. 하지만 g부설학원만 들어갈 수 있다면 그깟 것 매일이라도 다닐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그 학원 오디션에 통과 될 수 있느냐가 문제였고 지금 다니는 s학원에서 어떻게 빠져 나오느냐가 그 다음 문제였다.
 딸애가 일곱 살에 발레를 시작한 이후 지금껏 한 번도 학원을 옮기지 않았지만 이제 나도 무용학원의 생리를 안다면 아는 이상 그냥 있을 수는 없었다. g학원의 학원장이 무용계에서는 모두가 알아주는 인사라니 g학원에 적을 두어야만 내 아이가 제대로 클 수 있다는 생각이, 그리고 나에게 무엇보다 급한 건 아이의 학교 진로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이 역시 발 빠른 은밀한 소식에 의하면 그 학원 단장이 예술학교 외부강사로도 출강한다고 하니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아무래도 자신의 학원생들에게 입김이 작용되는 건 당연할 것이라는 생각에 일단 오디션이라도 봐 보자는 생각으로 결론을 지었던 것이다.
 ‘12명만을 선발한다니 되면 다행이고 아니면 할 수 없지’라며 오디션을 봤던 게 벌써 한 달 전이다. 그리고 지금 아이는 그 학원에서 매년 크리스마스에 공연되는 작품에서 운 좋게도 어린 클라라 역을 따냈고. 그런데 기어이 우려했던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공연이나 끝나고 s학원장에게 말하려고 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학원장이 그 사실을 알고 말았던 것이다. 그녀는 마치 성난 고양이가 털을 바르르 곤두세워 일격에 상대를 내려누르듯 단방에 날 제압했다.

  “내가 애써 키워났더니 그런 은혜도 모르고 이렇게 뒤통수를 쳐요...”라고. 은혜도 모르는 철면피한 인간으로 날 몰아세우는 데는 정말 얼굴이 화끈화끈 달아오르면서 또 한편으로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다. 솔직히 내 아이에게 많은 관심을 쏟아준 건 인정하지만 그러기 위해서 그동안 s학원에 들어간 돈도 만만치 않았던 것이 사실인데 말이다. 솔직히 학원비 때문에도 학원을 관둘까 하는 생각을 가져보기까지 했었으니까.
 처음 그저 흥미로 시작했던 무용이 딸애가 학년이 올라가면서 원장의 본격적인 콩클 위주로 수업이 되고 또 그러한 수업은 개인레슨으로 이루어지게 되어있어 울며 겨자 먹기로 했던 것이 고액의 지출이었다. 단체 레슨과 개인 레슨비의 차는 엄청난 차이가 났다. 그렇다고 개인레슨을 못한다고 할 처지도 못되었고 더욱이 콩클의 유혹도 뿌리칠 수가 없었다.
 전공할거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학원장의 노골적인 압력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속만 태우고 있었던 것인데. 그런 나에게 g부설학원은 굳이 개인레슨을 따로 하지 않아도 예술학교에 들어갈 수 있는 확률이 어느 학원보다 높다 라고 했으니 솔깃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g학원에 나가면서도 한 달이 넘도록 s학원에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고 있었던 내 우유부단함이었다. 그동안 아이의 늦은 학교수업시간을 핑계 삼아 단체레슨만 받고 있었는데,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그냥 두 학원에서 단체레슨만 받았으면 하는 내 심정이었다. 그래봐야 개인레슨 보다 경제적 부담이 덜하니까.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s학원장의 욕심을, 아니 이 바닥의 흐름을.
 그래서 여자들은 말한다. 처음 학원을 선택하기는 쉽지만 나가기는 어렵다는 사실들을. 그간 다른 학원으로 옮겨 앉은 아이의 엄마들이 얼마나 구설수에 올라앉았는지. 타 학원으로 옮겨간 아이의 엄마가 무용콩클에 나와서 학원장과 마주치지 않으려고 슬슬 피해 다녀야만 했던 고충을. 내 돈 주고 내 자식 가르치는데 하는 생각이겠지만 절대 그렇지만은 않았다. 언제 어떻게 만나게 될지... 차라리 아이가 무용을 포기하면 속 편할까 매끄럽지 않은 관계는 언제든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솔직히 그것이 두려웠다.

“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더니...어디, 이 바닥에서 지나가 얼마나 잘 클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요.”
 그렇게 s학원장의 전화는 무리를 이탈한 배신자를 처단하듯 날카로운 독설로 내 숨구멍을 콕콕 쑤셔 박았다. 그러니 일단 이 문제를 해결해야만 숨구멍이 트일 것 같았다.

  오늘은 ‘호두까기’의 공연이 시작되는 첫날이라서 엄마들은 아이들만 먼저 연습실에 데려다주고 공연시간에 맞춰오면 된다. 그래서 나는 그동안 미루고 해결 짓지 못했던 학원 문제를 오늘 해결 짓기로 했다. 서둘러 아침 일찍 아이를 데려다 주고 다시 되짚어 일산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s학원에 들러 원장의 심기를 풀고 이일을 매듭지어야만 이 불편한 마음에서 해방이 될 것 같다. 나는 이왕 일이 이렇게 된 이상 확실하게 나의 생각을 밝힐 작정이었다. 
 여전히 학원의 복도는 원생들의 엄마들로 북적였다. 그녀들은 통유리 너머 수업 받는 자신들의 아이를 한 동작 한 동작 세밀하게 관찰한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다고 했던가. 아이들 동작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평가하는 그녀들의 눈은 예리한 전문가들처럼 그럴듯하게 냉철하다.
 물론 자신의 아이에게 몇 번의 선생의 손길이 미치는지도 정확하게 파악해 계산에 넣는다. 그녀들은 나를 보자 뜻 모를 미소를 지어 보냈다. 통유리 너머 원장의 눈치를 살피면서, 애써 애매한 표정들이지만 난 그녀들의 표정들을 충분히 읽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나 역시 그녀들 시선에 애써 어설픈 웃음을 지어 창밖으로 던졌다.

 한해를 갈무리하는 12월의 하늘빛은 정체가 분명치 않은 희붐한 어설픔으로 상가의 불빛마저 을씨년스럽게 한다. 5층에서 건너다보이는 그랜드 백화점이 허기진 식충처럼 보이지 않는 빨판으로 거리의 인파들을 흡입하고 있다. 모두 한 구멍으로 빨려드는 듯 쓸려 들어가고 있다. 저 만큼 리어카를 끌다말고 파란 사각 보도블록에 걸터앉은 구부정한 노인네만이 그림속의 인물처럼 붙박이로 남아있다.
 한 참의 시간이 흘렀는데도 원장은 여전히 눈길 한번 보내지 않는다. 자신의 수업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홀에 들어가 애써 날 외면하는 눈치다. 아! 이 모멸감. 무서운 여자. 순간 난 차라리 잘 되었다 싶다. 아무리 이 바닥이 좁아 저 여자로 인한 내 아이의 진로가 막힌다 하여도 인격이 저 정도라면 무 자르듯 단칼에 잘라 돌아서는 게 낫다 싶다.
 물론 시간 약속을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찾아온 내가 기다리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지만 원장은 평소에도 특별하게 전화약속 같은 건 필요 없이 언제나 학원에 오면 만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평소처럼 일부러 평범함을 가장하고 왔었는데. 물론 그 가장한 평범함 속에는 계속 이 학원에 남아서 단체레슨을 받고 싶다는 내 강한 의미이기도 했다.
 그러나 눈길 한번 보내지 않고 딴청을 펴 무시하는 그녀에게 나 역시 더 이상의 미련은 없다. 복도에서 내 비쳐오는 눈길조차 실눈으로 싸늘하다. 책상 한쪽 모서리를 차지하고 있는 케잌마저 들고 온 동냥자루마냥 추레하게 나의 모멸감에 무게를 실고 있다.
 
 아침과는 달리 오후의 도로는 꽉 막혀있다. 숨이 막힌다. 아이의 부재중 전화는 무려 9번이나 찍혀있다. ‘제기랄’ 나는 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진동을 풀어 폴더를 닫았다. 제대로 할 말도 못하고 시간만 낭비했으니 그리고 무엇보다 무시당한 내 자신의 꼴이 한심스러워 아무리 생각해봐도 열이 치받는다.
 9번의 전화를 해 댄 아이는 전화를 받지 않고 도로는 막혀 꼼짝을 않고 있으니 엉덩이가 근질근질하게 조바심이 난다. 그러고 보니 아침부터 클라라가 없어졌다고 여린 한숨을 내쉬었던 아이였는데. ‘하필 공연 첫날에... 그나저나 옷은 찾았겠지? 얘가 누굴 닮아 그렇게 덜렁되는지...’
 차들이 길게 늘어진 도로 아래로 파란 강줄기가 희미하게 꿈틀댄다. 저만큼 63빌딩 아래로 커다란 유람선이 지나고 있다. 여유만만하게 잔잔한 강물을 흔들어 깨우는 몸짓이 도도하게 거만스럽다. 녀석의 주위로 하얀 물보라가 진저리를 치며 아우성 댄다.
 갑판에라도 선뜻 올라설 듯 볼멘 기운이 차안에서도 선명하다. 순간 하얀 물살에 갈증이 난다. 아니 배가 고픈 건가. 그러고 보니 아침에 은박지에 싸들고 나온 김밥덩어리가 차갑게 굳어져 비릿한 김 냄새를 풍기고 있다.   
 

 오늘 공연은 2번을 하게 된다. 1부가 4시에 시작되고 2부는 밤 7시에 시작된다.
 이른 시간인데도 벌써부터 주차장의 사각의 실선은 빼곡히 채워져 있다. 난 주차장을 돌아 분장실로 향했다. 2시가 넘어 공연시간이 가까우니 아이들은 분장실에 있으리라. 단원들의 분장실과는 별도로 아이들의 분장실은 제일 뒤쪽 방을 단체로 사용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아이들의 분장실은 단원들의 방을 지나야한다. 단장의 방과 사무실 그리고 단원들의 방이 있는 긴 복도는 그동안의 공연준비의 어수선함과는 전혀 무관하게 착 가라앉아 있다. 괜히 내딛는 걸음이 조심스럽다. 슬며시 열려있는 방문 하나가 내 호기심을 자극한다. 흘깃 곁눈질을 해본다. 제대로 보일 리  없다.
 하지만 그 슬며시 내비치는 방안의 공기에서는 어딘가 모르게 구조주의적인 냄새가 났다. 무대에서의 역할에 따라 방이 주어지는 탓일까. 순간 내 전신에 알 수 없는 희열 같은 게 등줄기를 뜨겁게 타고 흘렀다. 실실 새어 나오는 웃음에 누가 볼세라 애써 얼굴 근육을 눌렀다.
 ‘오늘 내 딸이 이 공연에서 어린 클라라야. 어린 클라라는 당연히 훗날 화려하게 무대를 누비는 멋진 프리마돈나가 될 것이고. 흐흐흐.’ 지금 이 순간 일산에서 받았던 수모, 그것 잊을 수 있는 것이었다.

  
  긴 복도를 지나 아이들 방을 찾았을 때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아무렇게나 벗어던진 옷이며 갖가지 소품들이 어지럽게 흩어져있었다. 아이들이 부산스럽게 나간 모양새가 역력했다. 나는 다시 허겁지겁 되짚어 나왔다. 급하게 분장실을 돌아 공연장 문을 밀쳤을 때 막 마지막 리허설이 시작되고 있었다.
 무대 가득 푸른빛의 조명이 신비로운 색채로 은은하게 빛을 품어내 무대는 환상적인 동화나라의 크리스마스이브다. 커다랗고 화려하게 무대를 꽉 채운 트리장식. 빨간 리본을 매달은 트리 위로 조명등이 동글동글 주홍빛 원을 그리다 빨간 소파위에 머문다. 클라라다! 가슴이 뛴다.
 차이코프스키의 경쾌한 행진곡이 무대와 객석을 압도하면서 아이들이 입장하고 있다. 클라라는 여전히 빨간 소파에 파묻혀 있다. 난 소파에 묻혀 있는 클라라 아니, 내 딸에게 황홀한 미소를 보냈다. ‘짜식 아침부터 옷이 없어졌다고 난리더니...’ 행진곡에 맞추어 들어오는 사내아이와 계집아이들의 율동이 깜찍하게 발랄하다. 소녀의 사내아이 분장은 노란 곱슬머리 가발로 영락없는 개구쟁이 소년의 모습이다. 가만, 그런데 난 사내아이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그 순간 누군가가 내 어깨를 가볍게 툭 치고는 옆 좌석에 털썩 앉는다. 빛이 없는 어두운 좌석이라 쉽게 알아보지 못하겠는데 돌아보니 긴 검은 모피코트를 몸에 휘어감은 나리엄마다. 두툼한 볼 살이 모피 깃에 파묻혀 겨울잠을 자러 들어가는 영양 좋은 흑곰처럼 둔해 보였다. 그녀 역시 급하게 들어 왔는지 어깨가 들썩이는 가픈 숨을 몰아쉬고 있다.  

 “응! 나리 엄마, 이제 오는 거예요?”
 “아유! 지나 엄마!, 속상해서 어떡하냐? 그래도 할 수 없지 뭐 지나 엄마가 이해해야지...”
 “뭘?... 응! 그렇지  뭐!”

 뜬금없이 뭘 이해해야한다는 건지. 내가 s학원 문제를 이 엄마에게 말했었나. 아닌데... 서두 없이 시작되는 그녀의 말이 귀에 좀 거슬리긴 했지만 내 시선은 무대 위의 사내아이에게로 다시 올려졌다. 그녀가 무슨 말을 하든지 지금 그것엔 별 관심이 없다. 원래 그녀는 말이 너무 많다.
 해도 될 말인지 해서는 안 될 말인지 생각 없이 쏟아내는 통에 어느 땐 신경이 곤두서기도 하는 좀 거북스런 상대다. 하지만 이곳 원생엄마들 중 그녀만큼 많은 정보를 가진 엄마는 없을 것이다. 이 바닥의 모든 정보를 꿰어 차고 있는 그녀는 일명 발레교실의 소식통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있는 자리는 밝혀내는 짜릿함과 은밀하게 공유하는 비밀스러움이 있다.
 ‘누구누구가 무용계에 알려진 ㅇㅇ 선생에게 고액레슨을 받고 있다, 하더라. 누구는 얼마를 들여 ㅇㅇ콩클에 나가고 그 의상 값은 얼마고 마사지는 어디에서 얼마에 받고, 누구는 ㅇㅇ 선생 미움을 사 곤욕을 치루고 있다, 하더라. ㅇㅇ의 줄을 서야 이 바닥에서 확실한 성공이 보장된다, 더라.
 ㅇㅇ 엄마는 이 꼴 저 꼴로 스트레스 받는 우리나라 의 교육계의 시스템이 싫어 외국으로 보냈더니 맘고생 안 해 좋다하더라, ㅇㅇ단원들 중 누가 누구하고 사귀고 헤어졌다더라.’ 등등. 아무튼 원생들에 대해서 그리고 무용계의 크고 작은 일들에 대해선 모두 꿰고 있는 그녀라서 그녀가 있는 자리는 항상 흥미진진하게 넘쳐나는 얘깃거리로 아이들 기다리는 지루함을 덜어주곤 했다.
 하지만 정작 자신의 일은 절대적으로 함묵할 줄 아는 그녀다. 하기야 이제 초등학생인 나리가 비밀이 있다손 치더라도 기껏해야 어디서 비밀레슨이나 받고 있을 정도겠지만. 아무튼 그녀가 무슨 비밀스런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그건 관심 없다. 지금 난 무대 위의 노란 곱슬머리 사내아이에게 온통 신경이 쏠려있으니까. 분장을 잘 못 해놔서 그런지 꼭 그녀석이 꼭 내 딸 지나를 닮았다는 게 지금 내 신경을 자극하는 이유다. 도대체 저 녀석이 누군지 감이 안 온다. 클라라는 여전히 빨간색의 커다란 소파에 푹 잠겨 있는데 말이다.

 “그렇잖어! 지나가 실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키가 너무 커서, 아니 종아리가 굵다고 그랬던가? 아무튼 그렇다고 하니까 너무 속상해 하지 마, 근데 있잖아! 웃기지 않아, 솔직히 지나나 희정이나 키가 비슷하잖아, 아니 지나가 좀 적으면 적었지 희정이보다 크지는 않잖아!”
“뭘?” 무슨 말인데? 순간 무심코 흘려듣던 그녀 말이 귀에 와 걸린다.  
“있잖아! 저 자기만 알고 있어, 꼭 자기만 알고 있어야 돼, 있잖아...”
나리 엄마는 무슨 중대한 비밀얘기라도 할 듯 주위를 한번 돌아보고는 내 곁으로 바짝 다가와 내 귀를 잡아당긴다. 아직 객석은 드문드문 자리가 채워졌을 뿐 더군다나 우리 주위엔 그녀와 나뿐인데 그런데도 굳이 내 귀를 잡아채는 그녀 행동이 꼭 어린 소녀들 유치한 장난 같아 나까지 유치하게 어색하고 쑥스럽다.
“있잖아, 희정이 걔 여기 단원인 ㅇㅇ선생에게 개인레슨 받고 있는 것 알아? 내가 그럴 줄 알았다니까, 오디션 볼 때부터 짐작은 하고 있었는데, 근데 내 예상과는 달리 지나가 클라라를 맡 길래 솔직히 좀 의아해 했지.”
난 또 뭐라고. 새삼스럽게 웬 희정이는 들먹이고, 그리고 우리 지나가 클라라를 따낸 게 뭐가 의아할일이야. 그게 무슨 큰 비밀이야기라고 구릿한 입 냄새를 풍기면서 속닥거리는지 그녀 말에 비위가 상했다.
 난 다시 시선을 무대 위로 두었다. 점점 시력에 노화가 오는지 뒤 섞인 아이들이 이젠 흐릿하게 구분이 안 된다. 갑자기 무대 아래에서 메가폰의 탁한 소리가 차이코프스키의 감미로운 음악을 잘랐다. 중앙 의 객석에서 총 지시하고 있던 b반 선생이다. 그녀가 무대를 향해 소리를 지른다.
 
 “야 친구 2번! 너 그래! 지나! 너, 말이야, 너 그 표정이 뭐야, 어디 아프니?  좀 밝게 표정을 지어야지, 그리고 아직까지 자기 자리도 몰라서 헤매고 있는 거야 응.”
  순간 뭔가가 내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쳤다. 등줄기를 태우는 뜨거움과 함께 나도 모르게 헛바람이 ‘허걱’ 새어나왔다 그건 순간의 일이었다.
‘뭐야? 지금 지나라고 한 거야? 분명 친구 2번 지나라고 한 것 같았는데, 잘못 들은 건가, 설마 아니겠지. 이건 정신이 하나도 없다. 노란 곱슬머리 사내아이가 내 딸 지나라니? 우리 지나는 클라라잖아!.....’
 “아니 그럼 오늘 갑자기 배역을 바꾸었는데 몰라서 헤매는 게 당연하지, 그렇다고 얘에게 소리는 지르고 그러냐. 지나 엄마! 그 ㅇㅇ선생이 단장님 오른 팔이잖아. 그러니 희정이가 클라라일 수밖에, 근데 왜 웃기게 그동안 가만히 있다가 오늘 갑자기 배역을 바꾸냐?, 사람을 무시해도 이만저만이지 안 그래! 그 여편네 며칠 전 과일바구니 들고 단장님 실에 들어가다 나한테 들켰잖아.”
  ‘뭐야! 지금 그러니까 클라라가 바뀌었다는 얘기야! 이건 말도 안 돼, 말도 안 돼. 그것도 공연 당일 날 배역이 바뀌는 경우가 어딨어.’ 습기 진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묘한 아득함과 함께 분노가 솟구쳤다. 이건 분명 따지고 넘어갈 문제였다. 지금 아이가 받았을 상처를 생각하니 너무도 분하고 속상해 가시를 삼킨 목처럼 따끔따끔하게 쓰리고 아팠다.
 그러니까 결국은 클라라의상은 배역이 바뀐 희정의 몸에 맞추느라 가져갔던 것인데 내 아이는 그 의상을 잃어버렸다고, 클라라가 없어졌다고 아침부터 놀라 애타게 찾았다니.... 기가 막혔다.
그래서 전화통을 붙잡고 무려 9번이나 엄마를 찾았구나, 그런데 정작 난 아이의 바람막이가 되어주지 못했으니 ...

  원래 콩클에 나간다던가, 단체나 개인 작품이 주어지는 경우에는 각자가 발표작품 성격에 따라 거기에 맞는 의상들을 개인들이 맞춰 입어야 한다. 그런데 무대의상은 생각이외로 만만치 않은 고액이라서 경제적 부담이 크다. 물론 작품비와 레슨비용이 별도인 것은 당연하고. 그래서 아이를 여러 콩클에 많이 내 보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집안이 경제적 능력이 된다는 얘기이다.
 또 그만큼 자주 무대에 오르는 아이는 그 대가만큼 실력도 향상되어 경제적인 조건과 아이의 실력 향상은 절대적으로 비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원생들의 엄마들은 부담이 되더라도 자주 무대에 세우길 원한다. 하지만 이 곳 g학원에서 공연되는 작품에 출연할 때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 갖추어진 의상실에서 작품에 맞는 의상을 무용수의 몸에 맞게 수선하여 입으면 되었다. 그래서 고액의 의상을 따로 준비해야 할 경제적 부담이 없고 유명무용수들과 함께 춤을 출 수 있다는 점이 이곳 오디션의 치열한 경쟁을 부추기는 점이기도 했다. 물론 무용수들은 자신이 입었던 의상이나 소품 등을 손상 없이 깨끗하게 입고 돌려주어야 한다.
 그런데 내 아이는 그 의상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배역까지 빼앗겼으니. 난 무릎에 놓여 진 가방을 움켜쥐고 벌떡 일어섰다. 순간 의자가 튕겨질듯 등받이에게 가 털썩 달라붙었다.

 “지나 엄마....!”
나리 엄마가 놀란 표정으로 황급히 부른다. 그녀의 입이 산소 부족인 수족관의 물고기 입처럼 헤벌어져 눈알만 뒤뚱인다. 그녀는 나의 태도에 순간적으로 당황하는 표정이다.
 “어디 갈려고? 혹시 단장님 실에...?”
분한 마음에 벌떡 일어서긴 했는데 이건 누구에게 가서 따져야 하나, 제기랄 왜 이렇게 심장은 벌떡대는 거야.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저 아래 중앙의 좌석에 총 지휘하는 b반 선생 옆자리에 단장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그의 트레드마크인 밤색 모자가 희미한 빛에 검은색으로 보였다.
 난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 그에게로 갔다. 아마도 이렇게 직접적으로 단장을 마주하게 되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처음 이곳에 오디션을 보던 날 공개석상에서 본 것 말고는 단장과 마주치는 일은 없었던 것 같다. 아니 어쩜 내 성격이 몹시 말라보이고 그래선지 날카롭고 깐깐해 보이는 단장을 부러 피했는지 모르지만...
왠지 그는 나뿐만이 아닌 우리 엄마들에게 말붙이기 어려운 존재였다. 하지만 훤칠한 키에 이지적인 눈빛의 소유자인 그가 가끔씩 어린이 반에 들러 아이들과 눈 맞추어 놀아준다는 사실에는 그가 보여주는 외모와는 달리 또 다른 따뜻한 내면의 소유자임을 인정하고는 있었다.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서는 보폭의 진동만큼 심장이 벌렁거려 제대로 목소리조차 나올까 염려스러운데, 갑자기 무대 위의 아이들이 우르르 무대 뒤로 몰려나간다. 마치 그 모습은 생쥐들의 먹이 찾기 훈련 같았다. 한 구멍을 찾아 빠져 나가는 일순간의 움직임이 너무 민첩했다.
 아마도 푸른 생쥐가면을 뒤집어 써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겠지만. 아이들이 빠져 나간 무대는 조명까지도 꺼졌다. 순간 꺼진 무대 조명에 객석조차 까맣게 묻혔다. 하지만 금방 객석은 빛이 밝혀져 단장의 밤색 털실 모자가 선명하게 눈앞에 나타났다. 난 지긋이 심호흡을 했다.
 “안녕하세요, 단장님! 저, a반 지나 엄마입니다.”
순간 눈치 빠른 b반 선생이 나에게 끔벅 눈인사를 하며 잽싸게 일어섰다.
 “저 단장님! 무대 뒤 아이들 좀 보고 올게요.”
그녀는 벌써 내가 온 이유를 이미 짐작하고 있다는 듯 슬그머니 피해 나간다.
 “아! 네 안녕하세요, 지나 어머님!”
그의 목소리가 생각이외로 고음으로 맑았다. 아주 거만한 저음으로 낮게 깔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아도 오늘 지나 어머님을 뵙고 싶었어요, 속상하시죠!”
“네!”
난 일단 짧고 분명하게 대답했다. 단장이 빙긋이 웃는다. 뭐야! 저 웃음은. 웃음에 색깔을 분명하게 드러내지 않으며 그는 자신의 옆 좌석을 가리켰다.
 “잠깐 앉으세요,... 지나가 여기에 들어 온지가...?”
 “네 저번 달 초에 들어왔습니다. 제가 단장님을 이렇게 뵙고자 하는 것은...”

 “네 잘 압니다, 무슨 말씀을 하시려고 하는지. 제가 어제 리허설 끝내고 비디오를 보면서 어린 클라라 배역을 바꾸라고 지시했어요. 솔직히 지나가 가냘픈 클라라 이미지와는 너무 맞지가 않았어요. 지나 하체가 너무 굵어요. 선생님들도 그간 연습들 하면서 발견하지 못했던 문제였는데 튜튜를 입혀놓고 보니 그 문제를 발견하게 된 거죠. 물론 공연 당일 날 바꾼다는 건 부모님께 죄송하고 또 전체적으로도 너무 무모한 모험이 되는 사항이 될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어린클라라가 무대에 나오는 시간이 극히 짧습니다.
아시겠지만 1막의 첫 부분에서 잠깐 보여주는 정도고 그다음은 모두 주역 무용수가 춤을 추게 되죠. 그래서 어린 클라라는 약 5분 정도 될까요. 즉 배역을 바꿔도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다는 얘기고 그만큼 이번 어린 클라라의 비중이 크지 않다는 얘기가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나로 봐서도 클라라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고 봅니다. 이곳에 온지 약 한 달 정도 밖에 안 되었는데 그렇게 순탄하게 클라라배역이 주어진다면 지나의 자만심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할지도 몰라요.
 춤을 춘다는 것은 너무도 혹독하고 냉혹한 자기와의 싸움인데 일찍 자만심을 배워버린 아이는 조그만 일에도 크게 좌절하게 됩니다. 섭섭하시겠지만 이번 배역문제는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아참! 그리고 이곳에 단원들 체형관리 해주시는 선생님들 계시니 지나 마사지 좀 신경써주시고요 그리고 시간이 되시면 이곳에 좋은 선생님들 많이 계십니다.”

 “네, 그건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번 일은, 그 동안 저희 지나가 얼마나...”
 “네 잘 압니다,” 
그는 내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니 말의 시작도 전에 내 말을 싹둑 잘랐다. 자신이 내린 행동에 대해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말라는 강한 의도가 그의 눈빛에 실려 있다.
 “물론 지나가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했으리라는 것 잘 압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춤은 그렇게 자기 자신감만 있다고 되는 문제가 아니죠, 앞으로도 여러 번 넘어지고 일어서고 수없이 반복될 겁니다. 그때마다 일어서는 것은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예요, 어머님이 해 줄 수 있는 것은 용기와 격려죠. 그리고 아이가 자신이 가진 재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보살펴주시는 겁니다. 아이와 같이 넘어진다면 할 수없는 거죠.”

  단장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꼿꼿하게, 분하고 속상하고 자존심이 뭉개져 따지러온 날 혼란스럽게 했다. 이 혼란스러움을 수습하려면 객관적인 검증이 필요하다. 즉 희정이의 허벅지가 우리 지나보다 가늘고 예쁘다고 인정할 수 있으면 된다. 그럼 나의 혼란스러움도 정리되고 그의 말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인데, 그런데 일단은 이 어미 눈으로 봐서는, 아니 누가 본다 해도 지나의 하체가 희정이보다 굵어 보이지 않으니 그렇다면 결국 객관적인 검증이 필요한데... 그렇다고 줄자라도 들고 들어가 녀석들의 허벅지에 감아 볼 수도 없는 문제다. 설사 감아본다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인 것을. 
 아! 오늘 하루해는 너무도 길다. 그냥 이곳에서 훌쩍 사라져 버렸으면, 아니 무대 위의 아이를 찾아 챙겨들고 떠날 수 있는 용기만 있다면, 그럴 용기도 나에겐 없다. 나리엄마는 줄곧 먼발치에서 내 눈치만 살핀다. 단장과 목에 핏대 세워 무슨 일이라도 한 판 벌릴 줄 알았는데 그러지 못해 실망이라도 했다는 것인지, 내 주위를 빙빙 돌며 그녀의 예리한 탐색망으로 탐색하고 있다.
 ‘제기랄, 또 누군가에게 속닥거리겠지.’ 자꾸 실룩이는 표정단속에 자신 없어 난 그녀의 탐색망을 피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반들반들 맑게 닦여진 거울 속에 한 여인이 서 있다. 세상의 온갖 불신에 항변할 능력 없음을 기막혀 하는 표정으로 눈빛만 살아 번뜩인다. 

 ‘그래 내 오늘을 꼭 기억한다. 아이를 챙겨들고 가긴 어딜 가. 그래 끝까지 갈 때 까지 가보는 거다. 죽기 아니면 당당하게 살아남기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오기가 생겼다. ‘하체가 굵다고, 아이와 같이 넘어진다면 할 수없는 거라고... 안되지 넘어질 순 없는 거지. 그깟 것 마사지 그래 좋아, 그것 매일이라도 시켜야지.
 개인레슨!, 그래, 물론 그것도 당연히 해야지. 언젠가 누군가가 빈정대며 말했었지, 춤은 아무나 추는 거냐고, 네 집 형편에 춤이 가당키나 한 거냐고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산다고. 천만에 요즘 송충이는 솔잎 갈잎 가리지 않고 아무거나 먹어대도 잘 살더라. 제기랄, 끝까지 해보는 거다.’ 
 
 
 무대 뒤 대기실에 들어가자 지나가 먼저 날 발견하고 홱 하니 돌아서 외면한다. 난 돌려세워진 아이 등을 꼭 끌어안아 다독였다. 그러자 아이 등이 격하게 출렁인다. 그깟 이런 일로. 난 아이를 억지로 돌려세웠다. 고집스럽게 앙탈을 부리는 노란 곱슬머리 소년의 자그마한 얼굴에 두 줄기 진한 물고랑이 그어져 내린다. 검게 칠해진 마스카라가 녀석의 얼굴을 온통 점령하고 있다.
  공연시간이 가까이 오자 갑자기 로비가 화려하게 술렁인다. 두 개의 커다란 전나무 트리가 빛을 환하게 밝히고 곳곳의 준비된 장식들이 마치 외화에서나 봤음직한  무도장처럼 멋스럽다. 한껏 성장한 관람객들이 성탄절 파티에 초대되어 온 귀족처럼 명품을 휘감고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기고 있다. 그들은 파티에 선택되어진 여유로운 미소로 로비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고조시킨다.
 이제 좀 있으면 남편도 어린 아들을 데리고 저들 무리 속에 섞여질 것이다. 이번 공연에 남편도 기대가 컸을 텐데... 아무리 회사일이 바빠도 그동안 아이의 콩클엔 한 번도 빠지지 않는 관심을 보였었는데. 출입구가 훤히 내다보이는 의자에 앉아 남편을 기다리는 마음이 영 편치 않다. 그렇게 편치 않게 앉아 있는 나의 시야로 사람들은 갑자기 준비도 없이 얼굴부터 불쑥불쑥 떠올라 로비 문을 밀고 들어선다.
 긴 직선의 계단을 올라와야 들어설 수 있는 높은 건물 탓에 사람들은 마치 한순간에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처럼  까만 머리부터 불쑥 올라와 서서히 몸체를 드러낸다. 그래서 그들이 가파른 계단의 헐떡임으로 올라와도 이렇게 앉아 볼 때는 그들이 마치 에스컬레이터라도 타고 올라오는 것처럼 편안해 보인다. 또 한 무리의 사람들이 그렇게 얼굴부터 디밀고 올라선다.
 아마도 한 집안의 총 출동인지 나이 지긋한 노부부를 중심으로 중년, 젊은 부부들. 그리고 크고 작은 층층의 어린 아이들까지 출입문을 그득하게 밀치고 들어선다. 다들 각자의 손에 탐스런 꽃다발과 포장된 꾸러미들을 들고 시끌벅적 요란하다. 대단한 대가족들답게 이들 가족 역시도 열심히 차려입었다. 입은 모양새가 제법 사는 냄새가 난다.

 언제부턴지 사람들의 옷 입는 패턴이 강북과 강남으로 갈려 나 같이 명품에 둔감한 사람도 그들의 주거지를 옷의 스타일로 가늠해볼 수 있게 되었다. 난 아무런 생각 없이 무표정으로 그들 무리에 시선을 박고 졸졸 뒤를 따른다. 대부분 꽃을 든 관람객들은 무용수들의 가족이나, 친구, 연인들로 엮여진 사람들이다.
 벌써부터 로비 한 곳에 마련된 물품 보관소에는 그들이 맡겨 논 갖가지 꽃들로 넘쳐나 그것들이 뿜어내는 향기 또한 만만치 않게 공연장의 분위기를 상승시키고 있다. 그 대가족들도 싸들고 온 꽃다발을 들고 물품 보관소로 향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 무리 속에 난데없이 희정이 엄마의 커다란 얼굴이 하얗게 클로즈업되어 들어왔다.
 은색의 모피자락을 찰랑찰랑 흔들어대는 뒤태의 모양새가 아니, 그녀의 높고 뾰족하게 웃어대는 하이톤의 목소리가 유독 내 시선을 잡아끈다 했더니 역시나 그녀였다. 원래도 비음 섞여 약간은 간지러운 목소리. 그녀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윤기 자르르하게 미끄러지는 콧소리로 내 심기를 뒤틀었다. 더군다나 그녀의 살랑살랑 흔들어대는 모피자락의 하늘거림이 누군가를 현혹시키려는 꼬리 짓처럼 영 편치 않게 밉다.
 그래서 그 뒤틀린 심기가 내 눈빛에 실렸나 보다. 순간 그녀가 돌아본다. 찰나적으로 그녀와 내 시선이 얽혔다. 하지만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 어색하게 빗겨나갔다. 재빠르게 눈빛을 거두어 돌아서는 그녀의 푸짐한 어깨가 보일 듯 말 듯 으쓱 한번 추슬러졌다.

 '여우같은 여편네, 언젠가 ㅇㅇ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자신이 그 백화점에 가지 않아 대견하고 고맙다고 시아버지가 선물로 주었다던 이름도 모르는 보석세트를 가지고 나와 흔들어대더니 그날 아이들 간식으로 먹은 푼돈은 차안에 두고 온 지갑을 핑계 삼아 쏙 빠져나간 여편네. 그 능청스런 짓으로 ....'
 난 그녀가 얄미워 그녀의 뒤통수에 한참동안 시선을 거두지 못한다. 그녀는 분명 내 심기 불편한 시선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그녀 자신이 오늘의 무대 주인공이라도 되는 듯 잔뜩 상기된 표정으로 가족들을 거느리고 로비 사람들과 인사나누기에 여념이 없다. 발그레하게 핀 만족스런 웃음이 안면가득 떠나질 않는다.
 그런데 문득 그녀를 따르던 내 시선이 부끄러워졌다. ‘ 하기야, 그녀가 무슨 잘못이겠는가. 어쩌면 그녀의 뛰어난 처세술이 부모의 역할로써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세상이고 또 그렇게 받쳐주는 그녀의 탄탄한 경제력이 부러울 뿐인걸.’
난 여태 그녀를 흘깃거리며 따르던 내 시선을 거두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로비의 여기저기 아는 얼굴들이 꽤 보인다. 다들 무용계에서 알려진 인사들이다. 저들 역시도 여기까지 오는 것에 다양한 사연들이 많을 터, 아마도 오늘에 나 같은 심정으로 만만치 않은 세계에 눈을 흘겼던 이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늘의 저들은 저렇게 편안한 웃음으로 이 자리를 즐기고 있지 않은가. 더군다나 고맙게도 저들의 참석으로 인해 이 공연이 한층 품위를 높이고 있음을 이 바닥에서는 모두가 아는 사실인걸.

 ‘그래 세상은 쟁취하려는 자에게만은 어쩌지 못하는 것. 나비도 번데기의 허물 벗는 고통 끝에 빛나는 날개를 달아 하늘을 훨훨 날지 않던가.’
징~~~징~~~징이잉!!
 어느새 공연시작을 알리는 징소리가 로비의 사람들을 술렁이게 한다. 여태 징소리만을 기다렸다는 듯 남편은 어김없이 아들의 손을 잡고 급하게 들어서고 있다. 아들 녀석의 품에 한 다발의 안개 섞인 장미가 안겨있다.
 제 누나에게 줄 꽃다발이 행여 다칠세라, 제 엄마를 발견하고도 뛰지 못하고 살포시 조심스러워 하는 폼이 제법 어른스럽다. 그런 녀석을 보는 순간 알 수없는 뜨거움 같은 게 왈칵 가슴을 타고 올라왔다. 마치 종일 낯선 거리를 헤매다 발견한 낯익은 풍경에 눌렸던 세포들이 활기를 찾아내듯 뜨거움이 전신에 돌아 기운이 났다.
 난 아들을 맞아 안으며 내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아니 다짐한다. 마치 로사리오를 암송하듯 숭고하게 아까부터 줄곧 반복적으로 되뇌었던 단어를 또박또박 천천히 내 뱉어본다.
 “나비의 화려한 날개 짓에 모두의 숨통이 막히는 그 날. 그날의 무대를 위해 오늘의 번데기에게 파이팅!!”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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