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사유와 글쓰기
새로운 사유와 글쓰기
  • 독서신문
  • 승인 2014.06.17 14:39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황선생 와이드 철학논술

[독서신문] 루카치(Gcorg Lukacs, 1885~1971)

 

마르크스주의 철학 대가·문학사가·미학자로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은행가인 유대계 아버지는 자신과 같이 금융에 관련된 일을 하기 원했지만 루카치의 관심은 사회학, 철학, 미학에 있었고, 특히 미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철학은 리케르트, 빈텔반트, 라스크 등으로부터 신칸트주의 영향을 받았으며 헤겔과 마르크스에 많은 관심을 갖고 공부했다.
하이델베르크대학에서 M.베버에게 사사했으며 1918년 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입당 후 1928년 헝가리 공산당 대회에 제출한 정치 논문인 「블룸 테제」(‘블룸’은 루카치 가명)에서 헝가리는 소비에트공화국으로 전환하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에 당은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아니라 노동자와 농민에 대한 민주주의 독재를 중요한 실현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여 공산주의자들로부터 기회주의자라는 비난을 받게 된다. 루카치는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믿었지만 곧 파시즘과 싸울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자아비판을 결단하여 실행 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이론연구에만 몰두했다.
이후 그의 인생은 모스크바 망명, 1944년 귀국, 문화장관, 루마니아로 추방, 1957년 4월 부다페스트로 돌아오는 등 많은 굴곡을 겪게 된다. 루카치는 모든 정치적인 일에 참여하지 않고 미학과 철학에 대해서 연구와 저술 활동을 하다 1971년 6월 세상을 뜬다. 그는 “최악의 사회주의라 할지라도 최선의 자본주의보다 항상 더 낫다”(l994)는 믿음을 끝까지 잃지 않았다. 저서로는 『젊은 헤겔』(1948), 『이성의 파괴』(1952),『사회적 존재의 존재론』(1957), 『윤리학』, 『소설의 이론』 등이 있다.

변신 신화와 SNS사회

루카치(1885~1971)가 『소설의 이론』(1915)에서 고대 그리스 신화시대 영광을 떠올리며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라고 했듯 시인은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어떠한 방법으로 알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무엇을 신뢰해야하고 우리의 희망은 무엇인가에 대한 통찰을 통해,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찾아, 끝없이 몸 바꾸기를 시도하면서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존재, 물음을 던지는 반역의 존재, 고독한 존재이다. 즉, 시인은 자신이 발붙이고 살아가는 시대와 현실에 대한 직관, 살아가게 될 미래에 대한 기다림,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역사인식을 찾아 살아가는 변신의 존재인 것이다.

Ⅱ. 개념 확대하기

1. 변신

변신은 어떤 모습이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몸 고치기나 몸 바꾸기로, 우리는 시각을 통해 몸 고치기나 몸 바꾸기에 대한 적극적인 형식을 인식한다. 그리스 신화에 몸 바꾸기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다는 것을 찾아낸 사람은 오비디우스이다. 아폴론의 채근을 피해 달아나던 다프네가 월계수로 변한 이야기, 목욕하는 아르테미스를 몰래 훔쳐본 악타이온이 사슴으로 변하게 되는 이야기, 빌어먹는 귀신에 들린 에리직톤이 끝없이 먹다가 먹을 것이 없자, 자신의 몸까지 뜯어먹으며 자신을 파멸로 이끌고 가는 이야기(신자유주의처럼)들이 오비디우스 신화가 가지고 있는 몸 바꾸기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여기서 몸 바꾸기에 대한 신화는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던져줌을 알 수 있다. 몸 바꾸기에 대한 변화 서사는 세계와 인간에 관한 사건들과 관계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 바꾸기에 의한 반역은 문학의 출발점이 된다. 신화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변화하는 세계에 대한 시간성, 운동성, 의미성을 부여하는 서사가 되어왔다. 이러한 변화를 노래하기 위해 시인들은 뮤즈(영감 靈感)를 불러내 신의 도움을 빌거나 기원과 주문, 기도를 통해 본질에 대한 근원을 찾아 왔다.
몸 바꾸기에 대한 신화와 같이 인류는 수많은 변화를 거쳐 오늘날에 이르게 되었다. 세계화와 디지털 기술에 의한 하이퍼미디어인 트위터·페이스북 등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NS)사회가 열리기까지 끊임없는 몸 바꾸기를 해왔으며, 세계화와 SNS사회는 문학과 문화의 지형을 강력하고 빠르게 변화시키고 있다.
세계화와 하이퍼미디어인 SNS에 의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은 사라졌으며, 이로 인해 문학과 문화 간 소통과 교류는 그 폭을 넓혀가고 있다. 하지만 예전에 없었던 급격한 문화와 사회변동으로 인해 갈등과 가치관에 대한 충돌이 예전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문제들이 갑자기 등장했다고 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변화의 시기엔 문학과 문화, 사회, 정치문제들에 관한(새롭게 지형이 바뀌는 상황에서) 문제는 항상 있었고 이들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는 언제나 중요한 과제였다. 오늘날 이러한 문제 상황은 예전과 비교할 수 없이 다양해지고 있으며, 갈등양상 또한 구체화 되고 있다.

2. 사회관계형서비스(SNS)

21세기에 불어온 사회관계형서비스(SNS) 바람은 강하고 빠르다. 스마트폰 보급으로 더욱 확대되어가는 SNS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망을 만들어 개인을 넘어 기업, 사회 그리고 문화 전반에 걸쳐 혁신적 변화를 일으키며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관계를 창조하는 신개념 네트워크서비스로 주목 받고 있다.
핵심은 소통이다. SNS로 쉽고 빠르게 상호 간 상호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강점과 위기가 함께 공존한다. 작가가 메시지를 손쉽게 전달 할 수 있게 됐다면, 독자의 비판과 냉정한 판단에 대한 의사전달도 또한 간편해졌다. 이제는 독자들에게 접근하고 그들의 요구를 이해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인간적이며 섬세한 접근법에 의존할 때 SNS를 통한 소통은 문학의 위기가 아니라 문학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한 좋은 기회가 된다.
SNS 환경에서 페이스북은 매력적인 도구로 작용할 것이다. 그 이유는 전 세계인들과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각 나라마다 독자들의 성향과 환경이 다르고, 문화가 다르지만 SNS를 통해 시간과 장소에 구애 받지 않고 글로벌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자국의 문학과 문화를 유통시킬 수 있다는 점이 의미를 갖는다.

3. 탈신화·탈정치 중심으로 SNS사회

문화에 대한 어원인 Cultus(희랍어)는 밭을 갈아서 경작한다는 뜻으로 노동을 통해 자연으로부터 수확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때문에 문화는 자연을 인위적으로 가공한 것으로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모두가 포함된다. 인간과 관계된 모든 것은 문화가 된다. 문화란 인간의 생활방식이기 때문이다. 문화에는 음식·건축·의복 등과 같은 생활방식과 미술·음악 등 예술과 문학도 포함된다. 이러한 문화는 새로운 생산양식과 정치양식에 따라 변화한다. 그 대표적인 보기가 바로 대중문화(popular culture) 출현이다.
산업사회뿐만 아니라 후기산업사회에서 대중문화를 결정하는 주요한 변수는 대중매체이다. 산업사회에서는 소수 특권집단만이 정보를 공유하는 전근대와 달리 인쇄기술과 디지털기술에 기반을 둔 대중매체에 의해 같은 정보가 여기저기에 전달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획일적인 문화라는 문제점이 발생했다.(지식의 공유라는 민주적 정보양식이 형성되었지만) 더군다나 후기산업사회에는 신문·라디오·영화·텔레비전과 같은 아날로그 기술뿐만 아니라 디지털에 의한 하이퍼미디어기술의 급격한 발전은 다량의 정보를 세계인에게 동시에 전달하고 있다. 하이퍼미디어에 의한 시공간 압축이 극단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로 인해 대중매체는 산업화된 국가뿐만 아니라 전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대중문화를 생산하는 결정적인 변수가 되었다.
이렇게 대중문화는 미디어를 빼놓고 말할 수 없으며, 미디어에 대한 바르트 견해에 의하면, 1차 기호층위는 언어차원 모형으로 정보 전달층위이고, 2차 기호층위는 언어차원 모형이 신화체계로 전환되면서 그 구성요소들은 새로운 명칭과 기능을 부여받아 문학적 신화차원으로 문화층위가 된다.(신화도 언어와 같이 생각이나 뜻이 잘 통함을 목적으로 하는 체계이다.) 이를 통해 바르트는 신화란 과거 신화읽기가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에서 유통되고 있는 텍스트들에 대한 기호학적 작용원리와 구조에 대한 의미를 명확하게 분석하여 부르주아 신화를 밝혀냈다.

-부르주아 신화 : 바르트가 분석한 분석 대상은 문자 텍스트가 아니라 사진·광고 등 이미지 텍스트와 스포츠·복장 등과 같은 문자가 아닌 기호들에 관해서이다. 바르트는 이러한 기호개념으로 후기 산업사회에서 만들어진 신화 텍스트들을 기호학적 방법으로 해석해야 하지만 해석의 최종 목적은 반드시 그 이면에 은폐되어 있는 이데올로기를 찾아내야 한다고 보았다. 때문에 바르트의 이러한 분석틀은 기호학적으로 신화 읽기에 대한 정치화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바르트의 기호학적 독해는 그 속에 숨어있는 정치성을 찾아내려는 형식 분석이라 할 수 있다.-

 

▲ <파리 마치> 표지

바르트는 신화층위의 역사 걷어내기에 대한 근거를 보여주기 위해 <파리 마치>지 표지사진을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사진 속 흑인 병사는 프랑스 국기를 향해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1차 의미작용인 외연의미는 군복을 입은 젊은 흑인이 삼색기를 올려다보며 경례하고 있는 모습이다. 어떤 의미를 전달한다는 점에서 사진은 언어기호로 작동한다.
그러나 2차 의미작용인 내포적 의미에서 보면 이 사진기호는 1차 의미의 삼색기에 경례하는 흑인 병사가 아니라 프랑스 제국주의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로, 인종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충성하는 위대한 프랑스 제국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이 사진기호는 프랑스 제국이념을 보내고 받는 강력한 코드가 된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파리 마치>지의 독자층이 문학코드를 공유하기 때문이다. 문학코드에 대한 공유는 문제의 사진에서 1차 기호인 외연차원이 아니라 2차 내포의미에서 신화를 만들어 신화적 기표가 된다는데 있다.
바르트 분석은 구조보다 구조화에, 생산물보다 생산(생산성)에 관심을 기울여, 특별히 정해져 있는 기호가 어떤 방식에 의해 신화적 기표로 변하는가를 찾아내, 기표가 가지고 있는 서사를 읽어냈다.
신화를 생산하는 기표는 신화적 의미를 생산하며, 이렇게 생산된 의미는 사진기호의 신화 텍스트로 인식되며, 이 과정에 의해 신화서사는 생산된다. 생산된 신화서사는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언어의 생산이 아니라 소비로 바뀐다는 점이 문제다.
자본주의 구조 속에서 텍스트 안으로 텍스트 의미가 감추어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자본의 이데올로기가 작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이데올로기 기능에 의해 텍스트는 생산되며, 이러한 관점에서 크리스테바도 “주체란 결코 없다, 주체는 의미작용의 과정일 뿐이다(의미작용 과정으로 파악하면서)”(-출처 : 『현대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인문학』, 경상대학교 인문학 연구소, 1994, 223쪽.)고 말한다.
이와 같이 산업사회에서는 의미작용 과정에서 미디어에 의한 주술효과가 만들어진다.

-주술효과 : 미디어를 통해 간접 매개되는 1차 기호는 실제 본질의 모습과 상관없이 2차 기호인 신화가 만들어진다. 이때 만들어진 신화는 텔레비전 안에 사람들이 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이 신화가 만든 신비주의는 잘 통할 수밖에 없다.
텔레비전이라는 미디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수록 신비주의는 잘 통할 것이다. 각종 분장과 조명은 물론 분위기 연출이 평범한 개인과 사물을 영웅과 신으로 만들기 쉽다. 때문에 신화 만들기에서는 이들에 대한 경외감이나 선망의식이 들 정도로 일상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를 구축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그러나 2차 기호인 신화에 대한 미디어 주술 효과는 21세기가 되자 탈주술 현상으로 바뀌게 된다. 하이퍼미디어인 인터넷 등장으로 인해 미디어에 등장하는 신화 속 영웅에 대해 경외감이나 신비감을 갖지 않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더 이상 신비주의 전략을 사용할 수 없는 탈신화·탈정치 상태가 된 것이다.

동백 꽃잎을 단 나를 클릭한다/ 검색어 나에 대한 검색 결과로/ 0개의 카테고리와/ 177개의 사이트가 나타난다/ 나는 그러나 어디에 있는가/ 나는 나를 찾아 차례대로 클릭한다/ 광기 영화 인도 그리고 나…… 나누고/ ……나오는…나홀로 소송……또나(주)…/ 나누고 싶은 이야기……지구와 나……/ 따닥 따닥 쌍봉낙타의 발굽 소리가 들린다/ 오아시스가 가까이 있다/ 계속해서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이원, 「나는 클릭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부분

인터넷 공간에서 검색엔진을 통해 나를 검색한다. “177개의 사이트가 나타”나지만 그 안에‘나’에 대한 신비스러움이 없다. ‘나’의 실체는 사라졌다. ‘나’는 무수하게 많지만 그 속에 나는 없다. 기호나 검색어로 나만 존재하고 있다. ‘나’에 대한 기의가 사라진 기표로만 존재하는 이러한 탈신비주의 현상이 이루어진 것은 하이퍼미디어인 인터넷 등장이다.
인터넷 등장은 갖가지 정보와 자료들을 쏟아내기 때문에 경외감이나 신비감이 생기지 않는다. 당연히 우리와 같은 환경과 조건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2차 의미작용인 신화성과 권위가 사라지고 말았다. 스마트폰이 일반화된 한국사회는 2차 기호인 신화가 말하고 있는 대상으로부터 모든 역사를 지우는 탈중심 기호로 SNS를 작동시키고 있다.

-소셜 미디어 : 인터넷을 통해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의사소통하고, 경험과 느낌 및 가치관 등을 공유하는 기능(서비스)을 소셜 미디어라고 부른다. 소셜 미디어에 해당하는 것은 블로그 ·SNS·인터넷 포럼·팟캐스팅·위키·비디오 블로그 등이 있다. 소셜 미디어 중 글이나 사진·동영상·음악 등 콘텐츠를 통해 취미, 사상 등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고 공유하며 인맥을 넓히고 관리하도록 도와주는 서비스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Social Network Services : SNS-사회관계형서비스)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는 미니홈피를 갖고 일촌 맺기를 통해 인맥을 관리했던 싸이월드와 카카오톡, 카카오스토리, 라인 등이 있다. 이렇게 디지털 기술은 새롭고 낯선 문화를 빠르게 변화시키는 변신의 능력을 가지고 탈영토화와 재영토화를 통해 새로운 중심을 만들어 나가고 있다.-

나는 마우스 위에 오른손을 얹고 있다/ 내 몸의 일부는 적막에 묻혀 있고/ 내 몸의 일부는 바람에 붙어 있고/ 내 몸의 일부는 지워졌고/ 내 몸의 일부는 그가 떼어갔고/ 내 몸의 일부는 꺼진 모니터 속에 들어가 있다// 그러나 마우스가 여자의 얼굴 속에 들어가 있어도/ 여자의 한쪽 눈과 콧구멍 하나는 얼굴 밖의 세계를 벌름거리고/ 내가 마우스 위에 온전한 손을 얹고 있어도/ 여자와 마우스는 따뜻해지지 않고/ 그러나 마우스는 피카소의 여자 속에/ 나는 마우스의 등 위에 손을 얹고 있다/ (김종삼의 묵화처럼, 소의 잔등처럼, 지금은 저물녘이다)

-이원, 「마우스와 손이 있는 정물」 부분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 브라우저를 띄우기 위해 “나는 마우스 위에 오른손을 얹고” 있다. “피카소의 여자”처럼 “김종삼의 묵화처럼” 무심한 마우스를 클릭하여 트위터에 들어간 후 로그인하면…, “What are you doing?”이라는 문장과 마주하게 된다. 세계는 지금 내가 지금 뭐하고 있냐는 단순하고 맹랑하게 물어보는 이 문장 하나로 시작되는 가상세계의 마력에 빠져들고 있다. 스마트폰의 터치 또한 2차 신화기호를 지워 탈신화·탈정치 얼굴의 이미지기호를 만드는 중심축으로 작동시키고 있다.

Ⅲ. 개념 정리하기

1. 없지만 있는 있지만 없는 공간과 익명의 얼굴 탄생

지도는 현상된 세상을 이미지로 나타낸 것으로 2차원 평면이다.

-이미지 : 이미지란 한마디로 정의 내릴 수 없는 인간 정신활동의 특수한 현상이다. 이미지는 구체적 현실도, 막연한 개념도 아니다. 이미지는 그것을 보는 관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와 분류를 가질 수 있는데 그것은 이미지가 어떤 대상에 대한 의미를 규정한 것이 아니라 대상을 감각적으로 재현해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이해한다는 것은 이미지를 간접적으로 이해하는 것이고, 이미지의 심층으로 침투하는 것이며, 그 의미의 여러 차원을 해석하는 것이다. 이미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미지의 의미를 속단하기보다는 그것이 가지고 있는 잠재적 의미를 포착해내야 한다. 간단해 보이면서도 실제적으로는 대단히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홍명희,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살림, 2005, 65쪽.-

평면에 그려진 이미지는 공간이 없다. 하지만 지도는 종이 위에 그려진 또 다른 세계다. 지도는 축척에 의해 넓게 보이게 그릴 수도 있고 좁은 지역을 작고 자세하게 그릴 수 있다. 이미지 얼굴만 그려져 있을 뿐 지도 속엔 사실을 나타내는 현실은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얼굴이 없는 것 같지만 전철역도 있고 교회도 있고 병원도 있고 산과 강, 바다도 있다. 없는 것 같지만 있고 있는데 또한 없다.
얼굴의 있음과 없음에 대한 기준은 약속된 정보에 의해서이다. 정보에 대한 약속. 약속을 해석하는 정보, 그려진 정보, 표정의 얼굴 또는 얼굴로 나타난 표정, 이러한 것이 지도 위에 그려진 정보이다. 정확한 얼굴에 대한 정보는 지도를 살리고 부정확한 얼굴에 대한 정보나 정보 없는 지도는 가치 없는 지도이다. 가치 없는 지도와 가치 있는 지도는 정보에 의해 살아나기도 하고 죽기도 한다. 때문에 스스로 아무런 가치를 가질 수 없다.
지도를 볼 때 ✝/ 卍/ ☨/ ⚒/ ⚓의 이미지 속에서 정보라는 생각을 지우고 그려진 대로 십자가나 만자 표시를 교회나 사찰로 보며 문화재 표시를 능묘로 보고, 곡괭이 표시를 광산으로 닻 표시를 항구로 읽으면 정보 없는 읽음으로 아무것도 없는 공간읽기가 된다. 그러나 정확한 정보를 전달하는 살아있는 이미지로 읽으면, 지도 속에 시간과 공간이 있고, 인간이 있고 길이와 넓이와 높이·부피 등 모든 개념이 포함된 3차원 세계가 있게 된다. 지도 위에 그려진 공간 그 공간은 지도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지도 속에 있다. 2차원 평면에 그려진 한 장의 얇은 지도, 면의 세계에 공간이 없다 할 수 있는가, 그런데 있다.

훨훨 날아다니면서 말들은 욕망을 찢어내고 있다./ 욕망의 손금을 들여다보면/ 우리가 하늘이라 부르는 곳의 지도를 그리고 있다./ 그때, 빈 盞으로 채운 天啓로의 生涯를/ 마시면서 누워 있는 곡식들./ 祭日에 질주하는 바람이/ 날개 밑에 빛을 감추고 길을 떠날 때/ 타성 속에서 荊冠을 씻고 땅과 하늘 한 쪽을/ 받쳐 이고 서 있는 수렵인을 만났다.
[……]
점령당한 지도 위에 우화는 깃발로 나부낀다./ 이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를 붙잡고 있는/ 예지는 시간 속으로 밝게 혹은 어둡게/ 들어가고 있다./ 의식에 젖어 쓰러지듯 기운길이 슬펐다./ 한 줄기 길이 쫓아와 혼돈을 찢어 버린 뒤/ 부서지는 음울 사이로 아이의 침묵을 쏘았다./ 浦獲, 빛이 던지는 화살이 꽂히는 데/ 처음 열리는 하늘은 시간을 태우고/ 땅의 넓이와 하늘의 넓이를 태우고 있다./ 그림자를 갖지 않는 하늘 사이로/ 우리는 그림자를 밟고 다닌다.

-박주택, 『꿈의 이동건축』, 「爬行」 부분

“욕망의 손금을 들여다보면” 몸을 만들지만 또한 지우기도 한다. “하늘이라 부르는 곳의 지도를 그리고 있다./ 그때, 빈 盞으로 채운 天啓로의 生涯”는 있지만 없고 없지만 있는 지도공간에 이미지로 약속 속에, 약속이라는 단단한 체계 속에 무한으로 얻어지는 공간이 된다. “점령당한 지도 위에 우화는 깃발로 나부낀다./ 이제 멀리 떨어져 있어도 우리를 붙잡고 있는/ 예지는 시간 속으로 밝게 혹은 어둡게/ 들어”간다. 그러나 “한 줄기 길이 쫓아와 혼돈을 찢어 버린” 얼굴은 현실 아닌 세상, 이미지뿐인 지도 속에 공간이 없음을 나타낸다. 때문에 없지만 있고 있는데 없다. 아무것도 없는데 다시 보면 분명하게 있다고 말해진다. 그리고 인식 속으로 들어온다. “그림자를 갖지 않는 하늘 사이로/ 우리는 그림자를 밟고 다”닐 수 있는 것이다. 지도 위에 그려진 약속 때문이다.
뫼비우스 띠 또한 같은 의미를 가진다. 뫼비우스 띠는 몇 가지 흥미로운 성질을 가진다. 어느 지점에서 띠의 중심을 따라 이동하면 출발한 곳과 반대면에 도달한다. 이렇게 계속 나아가면 두 바퀴를 돌아 처음 위치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연속성에 의해 뫼비우스 띠는 단일 경계를 가지게 된다. 띠의 중심을 따라 뫼비우스 띠를 자르면 두 개의 띠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두 번 꼬인 띠가 된다.
이것은 뫼비우스의 띠가 단일한 경계를 가지기 때문인데, 자르기를 하면 두 번째 경계가 생겨난다. 이는 앞면의 색상이 다른 종이로 뫼비우스 띠를 만들어보면 이 점이 더 분명해진다. 띠 길이의 절반이 다른 색일 때 그건 뫼비우스 띠가 아니다. 때문에 한 면으로 만들어진 뫼비우스 띠는 상상 속에 존재한다. 현실에 존재하게 할 수 없다. 두께가 없는 면은 현실 물질계에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뫼비우스 띠는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인식 속에는 분명히 있다.
인식은 정의된 체계로 의심되지 않는 약속 안에 아주 명확하고 분명하게 비틀어져 있다. 과연 이미지 얼굴이 없는가, 그러나 이미지 얼굴은 분명히 있다.

알 수가 없다/ 내가 자꾸 무덤 곁에 오게 되는 이유/ 무덤 가까이에 몸을 둬야/ 겹겹의 모래 구릉 같은 하늘을 이고/ 나를 살게 하는 것들이/ 무덤처럼 형체를 갖는 이유// 그러나, 알고 있다, 오늘도 나는/ 내 봉분 하나 넘어가지 못한다/ 새들은 곳곳에서 찢긴 하늘처럼 펄럭이고/ 그들만이 유일한 출구인 듯 눈이 부시다// 알 수가 없다/ 무덤만 있는 이곳에 멈춰 있는 이유/ 막막함을 구부려 몸속으로 되밀어 넣으며/ 싱싱했던 것들이 썩는 열기를/ 느끼고 있는 이유// 사람들이 몇 줄 글로 남겨놓은/ 비문을 찾아 읽거나/ 몸을 잿더미처럼 뒤지며/ 한 생명이 무덤 곁에 있다

-조은, 『무덤을 맴도는 이유』, 「무덤을 맴도는 이유」 전문

무덤의 얼굴은 이중적인 얼굴로 “알 수가 없다”. 무덤은 죽음을 마음속 이미지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죽음을 포장하여 은폐시킨다. “막막함을 구부려 몸속으로 되밀어 넣어”보는 행위는 삶과 죽음의 구별 없는 뫼비우스 띠처럼 무덤을 통해 죽음을 갈무리하고, 죽음의 진실이 있는 무덤 속을 살펴보기 위한 것이다. “알 수가 없”지만, 무덤을 맴도는 이유는 그곳에서야말로 삶의 근거와 형식이 선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죽음의 얼굴이 없다 할 수 있는가, 분명 없는데 약속된 체계 속에 들어 있는 혼돈의 몸 바꾸기, 그려진 뫼비우스 띠는 흔들리는 이미지 얼굴이다.

어둠이 몰려서 온다. 녀석들. 녀석들/ 검은 비닐봉지 같은 얼굴을 하고 걸어오면서 찢어지는 얼굴을. 툭, 하고 떨어지는 물체. 죽은 건 줄 알았는데 개의 죽음은 또 아주 멀었다는 듯이 발을 모아 높이 뛰어오르고. 착지와 비약으로 이루어지는 선상에서 음표처럼/ 빵, 하고 택시가 지나가고 빵, 하고 택시가 지나가고 빵, 하고 택시 아닌 바퀴들이 지나가고/
[……]
툭, 다른 곳에 떨어지는 물체처럼 죽은 건 줄 알았는데. 녀석들 어둠 속에서 얼굴을 . 얼굴을. 나라고 부를 수 없을 때까지

-김행숙, 『이별의 능력』, 「얼굴의 탄생」 부분

이미지의 얼굴을 그리고 보고 듣고 맛보기 위해 컴퓨터를 켜고 인터넷에 연결하여 얼굴을 탄생시킨다. 가장 먼저 하는 것은 웹브라우저를 실행하고 WWW를 통해 필요한 정보를 검색하는 일이다. 정보를 찾고, 메일을 확인하고, 카페에서 수다 떨고, 미니홈피와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에 일상사를 담는 모든 행위는 WWW를 통해 구현된다. 인터넷 세계를 지배하는 WWW가 점령해야할 고지는 이제 스마트한 사회이다. 세상의 모든 정보와 서비스가 스마트한 사회로 흘러들어가고 있다. 신문뉴스나 방송사의 비디오 등도 지면이나 TV 속에만 존재해서는 미디어의 가치와 영향력을 확대할 수 없다. 이미 신문사, 방송사는 물론 수많은 데이터들이 스마트폰으로 연결되어 공간과 얼굴을 만들고 있다.

2. 익명의 얼굴에 의한 탈신화·탈정치

스마트폰에 위한 스마트한 세상에 그려진 공간은 현실 속 공간보다 실제적이고 세밀한 부분까지 포함하고 있어 흥미롭고 재미있게, 그리고 맛있게 끌어 들이며 당긴다. 공간은 침묵 속에 조용히 있는데 그려진 얼굴 없는 공간은 스스로 말한다. 현실 공간에 몸을 드러내지 않는 공간은 있지만 공간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아무튼 그려진 공간은 공간이 아니다. 그려진 것들이 힘을 발휘할 때는 이미지의 얼굴이 읽혀질 때이다. 얼굴이 읽혀지고 파악되지 않는 존재는 허무한 존재이다. 그려진 욕망은 해독을 거부하지만 또한 읽혀지길 욕망한다. 공간에 대한 의지는 얼굴이 이미지로 그려지면서 자신에 대한 정체성을 드러낸다. 얼굴의 탄생이다. 그래서 스마트세대는 공간보다 그려진 공간에 드러난 얼굴을 신뢰한다. 무엇 때문에 그려진 공간은 공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려진 공간을 믿는가. 대답은 얼굴을 그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를 그리고 공간을 만들고 있는 스마트세대는 트위터나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등을 통해 전 세계 뜨거운 이슈들을 재잘대며 소통 시키고 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카카오스토리 등에 모인 수많은 사람의 보이지 않는 얼굴과 목소리는 Real time 이슈 검색의 훌륭한 소재이기도 하지만 SNS사회에서 데이터 교환과 데이터 간 긴밀한 연동은 1+1=2가 아닌 1+1=무한대로 이미지의 얼굴을 생산하며 기호를 확장하고 있다. 이 얼굴은 표현기호로 작동된다. 있지만 없는 얼굴, 없지만 있는 얼굴의 혼돈에 의한 몸 바꾸기를 익명성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지구와 달의 거리가 지금보다 훨씬 가까워/ 달이 커 보였던 때/ 일년은 팔백일이었고/ 하루는 열한 시간이었을 때/ 덫을 놓아 잡은 짐승을 질질 끌고 가는 당신,/ 당신이 낸 길을 없애려 눈은 내려 덮이고/ 하늘 아래 모든 것이 얼어붙은 날이 있었다/ 다시 얼음 녹으면서 세상은 잠시 슬퍼지고/ 그 익명의 밤은 다시 강처럼 얼고/ 언 밤 저편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듯 강가에 모여 불을 피우자/ 밤 이편의 사람들도 강 건너를 걱정하느라 불을 피웠다/ 그 어두운 밤 서로를 생각하고 생각하느라/ 당신은 그만 손가락을 잘랐다

-이병률, 『바람의 사생활』, 「봉인된 지도」 부분

익명은 이름이 붙여지지 않거나 숨긴 이름이다. 나를 갖지 못한 얼굴들이 “다시 강처럼 얼고/ 언 밤 저편 사람들이 걱정스러운 듯 강가에 모여 불을 피우자/ 밤 이편의 사람들도 강 건너를 걱정하느라 불을 피”우고 있다. 익명성을 가진 얼굴들이 걱정스러운 표정(얼굴을 뜻하는 프랑스어 visage는 표정을 뜻한다. 이 말은 본다는 의미의 라틴어 videre 과거분사 visus에서 파생된 말이다.)을 가지고 있다. 표정이 있는 신체 외부는 모두 얼굴이 된다. 표정이 얼굴이 되며 이 얼굴들은 하이퍼미디어인 SNS공간에서 탄생된다.
젊은 미래파 시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얼굴에 대해 표정이 사라졌다고 일부 평자들은 분석하고 있다.(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함돈균, 『얼굴 없는 노래』, 문학과지성사, 2009. 서동욱,『익명의 밤』, 민음사, 2010.) 미래파 시인들은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도구와 기호로 표정을 사용한다. 그러나 이들이 그려내는 얼굴과 표정에는 이름이 없다. SNS사회에서는 기본적으로 익명을 통해 소통된다. 정확한 얼굴의 표정만이 실질적인 의미를 규정하는 조건이지만 익명의 얼굴은 몸 바꾸기기가 가능하기에 모호하다.
모호하기에 “나는지금거울을안가젓소만은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잇소”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만은/ ㅼㅗㅺㅙ닮앗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업스니퍽섭섭하”(「거울」-김주현, 『이상문학전집 01-詩』, 소명출판, 2005, 79쪽.)다고 한다. 이 모호함을 벗어나기 위해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 보”(「참회록」-최동호,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깊은샘, 2011.)지만, “거울 속/ 갈라진 얼굴의 틈새”만 바라(「河馬相인 그의 얼굴」-박주택,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문학동네, 1996, 57쪽.)본다. 때문에 더욱 “강가에 앉아 이름을 비천한 생애의 지도를 새기”(「생애의 지도」-『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문학과지성사, 2004, 84쪽.)고 싶은 것이 아닐까. 이 얼굴 없는 모호한 익명들이 옷을 벗기고 있다.

미안하게도 나는, 거울 앞에서 그대를 생각한다 오랫동안 닫혀 있던 서랍을 열듯 나의 기억은 사뭇, 뻑뻑하다 구멍가게에서 풍선껌을 훔치는 어린 내가 있다 오래 전 나 아닌 모습부터 있었을 공포와 죄의식의 노예, 쾌락의 말단 하수인, 전혀 새로울 건 없다 나의 모든 열정은 출생 이전의 것이므로/ 나는 오랜 옛날의 사건들을 검증하기 위해 순간의 욕망을 이용한다 거울 속에 누군가 거울을 안고 나타난다 그대이다, 그리고 그대의 거울 속에는 그대를 품은 내가 있다 그러므로 그대와 나는 과거와 미래를 꿰뚫는 무수한 ‘그들,’- 나는 그대의 옷을 벗긴다

-강정, 『처형극장』, 「춤」 부분

익명의 얼굴과 표정은 개인적인 것으로 작용하지 않는다. 표정은 내부로부터 외부로 기호의미가 드러나게 하는 고유한 전달 방식으로 명령어이다. 언어기호 못지않게 의미를 드러내는, 그것을 만들어내는 것으로, 또는 그 결과로 충분히 알아볼 수 있도록 만들어져 나타난 것이 표정이다. 때문에 표정은 계산되어 나타난다.
표정을 통해 보는 사람이나 드러내는 사람은 밖으로 표현된 기호에 대응하여 주관적인 판단을 하고, 그에 따라 주관적인 개인이 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얼굴에 존재하던 필연성의 결과가 바로 개인화이다. 개인적인 어떤 느낌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얼굴들을 조직하는 주관적인 표현을 통해서, 주관적인 개인이 된다. 따라서 어떤 경우든 그것을 작동케 하는 것은 얼굴의 주관적인 개별성이 아니라 계산의 결과이며 그 효과이다. 때문에 이는 권력과 경제에 대한 문제가 된다.(2차 신화영역)
여기서 얼굴, 얼굴의 능력이 권력을 발생시킨다거나 그것을 설명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특정한 권력의 배치가 얼굴의 생산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다른 배치라면 그렇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얼굴은 정치임을 알 수 있다. 얼굴은 그것의 생산을 필요로 하는 권력 배치의 산물이란 점에서 그 자체로 권력과 결부된 것이고, 따라서 얼굴의 문제가 권력의 문제인 한, 얼굴 자체가 바로 정치가 된다. 때문에 미래파 시인들은 2차 신화영역의 얼굴을 버리고 싶은 것이다.

나의 진짜는 뒤통순가 봐요/ 당신은 나의 뒤에서 보다 진실해지죠/ 당신을 더 많이 알고 싶은 나는/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 「커밍아웃」 부분

“얼굴을 맨바닥에 갈아버리고/ 뒤로 걸을까 봐요” 하면서 탈신화·탈정치화를 향해 가고 있다. 이는 포장된 신화 벗기기 작업으로 순수한 본질로 복귀하려는 몸짓이다.

3. 젊은 시들의 반역, 그리고 미래파

이러한 최근 시 경향은 하이퍼미디어인 스마트폰의(SNS) 영향으로 다양화·다원화에 의해 산만한 혼재가 분화된 욕망이라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우려의 목소리와 긍정하는 목소리가 있다.(-1980년대 중후반에는 베스트셀러 1,2위를 시집이 차지했고 1988년에는 1~3위를 석권했는데 무려 7권의 시집이 20위권에 진입했다. 그러나 지난해에는 단 한 권의 시집도 순위에 오르지 못했다. -《실천문학》, 2007년 봄호, 514쪽.)
최동호는 한국 시 경향에 대해 난삽하고 장황하며 소통이 없는 시가 만연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 수 없는 다변적이고 소모적인 시들이 많습니다. 아무리 소비경제 시대의 시적 양산이라고 하더라도 한 단계 극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이렇게 방만한 시들의 유행을 그대로 방관하는 것은 시인 개개인은 물론 우리 시단을 위해서도 반성적 논의가 요구되는 문제입니다. -세계일보, 2011.01.07.)
유성호는 “이들의 자의식은 감각의 쇄신 과정에 깊이 침윤되어 나타난다. 우리 시대의 젊은 시인들 중 일부는 공적 기억이나 사회적 차원의 사유 체계보다는 민활하고 개별적인 감각으로 경사를 시적으로 담론화 하였다. 그만큼 그들은 타자와 소통하는 사회적 울림보다 난해성의 회로를 외장으로 택하는 미적 고립을 선택한다든지, 미시적 감각과 표현을 중점적으로 보여주었다”고 지적하면서 “이러한 젊은 시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감각 중시의 움직임은 2000년대 들어 매우 광범위한 시적 지형을 형성하였다. 그야말로 새로운 시의 존재론을 펼쳐낸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내부로부터 외부로 기호의미가 드러나게 하는 고유한 전달방식의 명령어인 표정의 코드를 그들만의 방식으로 능숙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이해해야한다. 이를 소통과 불통으로 이해하려하지만 이는 그들만의 상호성에 의한 난해성 코드를 해독하지 못하는 데서 출발한 문제들이다.(《문예중앙》, 2007년 봄호, 14~15쪽) 이들은 감각적이며 분자화 된 욕망으로, 움직이는 영상세대로, 비논리적이며 비선형적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는 방향감 상실로 나타났다. 방향을 잃어버리다는 익숙한 방향이나 위치감각을 상실하여 정상적 위치나 관계에서 강제로 퇴거당하는 원인이 되고, 시간, 공간 혹은 정체성 인식을 상실하게 되는 원인이 되며, 혼란스럽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때문에 하이퍼미디어 글쓰기에 익숙한 신세대 작가들이 쓴 텍스트를 만났을 때 혼란을 느끼거나 당황할 수밖에 없다.(제프 콘클린은 방향감상실은 하이퍼텍스트라는 매체 그 자체에 내재되어 있다고 보고 있으며, 케네스 어팅과 니콜 얀켈로비치는 하이퍼미디어가 독자들, 작가들, 그리고 학습자들을 놀랄 정도로 혼란스럽게 하고 혼동시킬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비선형적 문서에서 독자들의 위치와 방향감각의 상실 경향이라는 콘클린의 방향감 상실에 대한 정의를 인용한다. -조지 p.랜도우, 『하이퍼텍스트 2.0』, 문화과학사, 2001, 168~169쪽.)
특히 비논리적이며 비선형적 특징인 하이퍼미디어세대, 스마트폰세대 작가들에게 있어 갈등, 불연속성, 무작위성, 치유하기 힘든 인식론적 불확실성, 인식론적 소외가 자연스럽게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이퍼미디어 SNS사회는 질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에 의해, 방향감상실에 의해, 경험의 연속성이 아니라 불연속성을 가지고, 감정적 카타르시스가 아니라 감정의 교란을 위해 존재하기 때문이다.(시는 애초부터 비논리적, 비선형적인 반역의 정신으로 우리에게 생존 능력을 강화시켜주는 장르로 존재해 왔다.)
이를 혼돈에 의한 창조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창조는 무로부터 유의 생성이 아니라 이미 있는 어떤 것으로부터 다른 것이 만들어짐이다. 그리스 시인 헤시오도스는 『신통기』 116~138행에서 천지창조에 대해 태초에 모든 것을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났다고 노래한다. 카오스다. 하이퍼미디어 세계(소셜 미디어)는 무정형의 말랑말랑한 혼돈의 세계이다.
질서를 뜻하는 코스모스와 대립되는 혼란으로 해석되지만 뭔가를 담아낼 수 있는 빈 그릇의 가상공간이다. 단순한 물리적 공간이 아니라 모든 것을 품어 안는 거대한 몸집의 신(神)과 같이 작동하여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태초에 카오스에서 나온 것이 가이아이다. 카오스는 깊을 현(玄)으로 어둠인 에레보스를 아들로, 검을 현으로 밤인 닉스를 딸로 낳았다. 깊은 어둠과 검은 밤은 그 자체가 움직이는 신이다. 최초의 남매인 에레보스와 닉스는 맑고 끝없이 열린 하늘인 아이테르와 밝은 날인 헤메라를 낳는다. 환한 하늘이 깊은 어둠으로부터 열리는 찬란한 슬픔 같은 아침 풍경은 탈정치·탈중심·다양성·다원성·경계의 소멸로 시 쓰기가 아닐까. 열려있는 반역으로, 입 벌린 혼돈으로부터 얼굴을 내민, 어둠과 밤이 사랑한 결과이며, 끝없이 열린 하늘과 날의 위대한 탄생처럼.
억압, 반역, 거세의 반복 원칙이 시 정신이다. 아들-딸의 세대가 아비-어미의 세대와 충돌하고 반역을 일으켜 앞선 세대를 거세한다는 것이 그 원칙이다. 낮인 헤메라와 빛인 아이테르는 밤인 닉스와 어둠인 에레부스에 반역하고 이들을 거세, 추방한다. 어둠을 몰아내지 않으면 빛이 들어설 수 없고 밤을 몰아내지 않으면 낮이 올 수 없기 때문이다. 거세와 추방은 다음 세대가 태어나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과 공간의 확보이고 기회의 빼앗음이다. 그것은 뜨거운 열정임과 동시에 장애물 제거이며 빈터 만들기이다. 집을 짓기 위해서는 숲을 쳐내어 빈터를 만들어야 하듯, 어둠과 밤을 쳐 빈자리를 빼앗지 않고서는 빛과 낮이 태어나 활동할 공간은 없다.
이 논리에서 보면 밤이 그 상반물인 낮을 낳는다는 신화적 사건 플롯은 오히려 아주 정연한 질서를 갖고 있다. 그 질서는 창세 질서이며 시 쓰기이다. 시는 명징한 개념적 언어로 그 질서를 노출시키는 것이 아니라 밤이 낮을 낳았다는 황당해 보이는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본질에 대한 순서와 질서를 감추면서 상징으로 암시하는 압축언어이다.
땅이 하늘을 낳고 그 다음에……로 이어지는 가이아 서사가 충돌, 반역, 거세의 모티프이듯. 몸 바꾸기를 통해 탈코드화 된 표정으로 초코드화하여 신화를 걷어내며 반역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시는 닫힌 체계가 아니라 반역의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서사이다.

玄(검을 현) : 玄(검을 현)은 亠(머리 두, 돼지해머리 두)와 幺(작을 요)가 합하여 이루어진 글자로 본래는 가물거림을 뜻하며, 검은 실을 묶은 모양을 본떠 검은 실을 나타내며 깊다는 뜻으로 쓰인다. 머리(亠) 속에 아주 작은 생각이 일어난 상태와 같이 실(幺)이 가늘어 하늘거리듯 하늘(亠: 뚜껑 상으로 천체 덮개 )이 아득하여 가물가물하므로 볼 수 없는 검은 빛으로 쓰이게 되었다. 때문에 검을 현, 하늘 현, 아득할 현이라고도 한다. -이윤숙 외, 『종요의 대서사시 천자문 역해』, 경연학당, 2008, 48쪽 참조.

Ⅳ. 개념 찾아보기

▲ 황인술 논설위원 / 인문학당 아르케 교수

땅이 하늘을 낳고 그 다음에……로 이어지는 가이아 서사가 충돌, 반역, 거세의 모티프이듯. 몸 바꾸기를 통해 탈코드화 된 표정으로 초코드화하여 신화를 걷어내며 반역하는 그들은 누구인가. 시는 닫힌 체계가 아니라 반역의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서사이라고 보는 글이다. 하이퍼미디어, 스마트폰세대의 거역/ 변신/ 반역에 대하여 개념을 정리해 보세요.

참고문헌

단행본
김원태 『대중문화의 이해』, 일진사, 1991.
리처드 로티, 『실용주의의 결과』, 민음사, 1996.
-----------,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민음사, 1996.
-----------,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까치, 1998.
마틴 앨브로우, 『지구시대』, 일신사, 2005.
스티븐 밀러스, 『현실세계와 사회이론』, 일신사, 2003.
위르겐 하버마스, 『의사소통행위이론』, 나남출판, 2006.
이윤숙 외, 『종요의 대서사시 천자문 역해』, 경연학당, 2008.
조지 p.랜도우, 『하이퍼텍스트 2.0』, 문화과학사, 2001.
존 스토리 저, 『대중문화와 문화연구』, 2006, 경문사.
존 톰린슨, 『세계화와 문화』, 나남출판, 2004.
홍명희, 『상상력과 가스통 바슐라르』, 살림, 2005.

비평서
서동욱, 『익명의 밤』, 민음사, 2010.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함돈균, 『얼굴 없는 노래』, 문학과지성사, 2009.

시집
강 정, 『처형극장』, 문학과지성사, 1996.
김주현, 『이상문학전집 01-詩』, 소명출판, 2005.
김행숙, 『이별의 능력』, 문학과지성사, 2007.
박주택, 『꿈의 이동건축』, 천년의 시작, 2004.
------,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 문학동네, 1996.
------,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 문학과지성사, 2004.
이병률, 『바람의 사생활』, 창비, 2007
이 원,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 문학과지성사, 2008.
이 원, 『야후!의 강물에 천 개의 달이 뜬다』, 문학과지성사, 2004.
조 은, 『무덤을 맴도는 이유』, 문학과지성사, 1996.
최동호, 『윤동주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깊은샘. 2011.
황병승, 『여장남자 시코쿠』, 랜덤하우스코리아, 2005.

계간지 및 학술서
《문예중앙》, 2007년 봄호.
《실천문학》, 2007년 봄호.
《현대시학》, 2011년 1월호.
『현대의 새로운 패러다임과 인문학』, 경상대학교 인문학 연구소, 1994.

▲ QR코드를 스캔하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 서울특별시 서초구 논현로31길 14 (서울미디어빌딩)
  • 대표전화 : 02-581-4396
  • 팩스 : 02-522-6725
  • 청소년보호책임자 : 권동혁
  • 법인명 : (주)에이원뉴스
  • 제호 : 독서신문
  • 등록번호 : 서울 아 00379
  • 등록일 : 2007-05-28
  • 발행일 : 1970-11-08
  • 발행인 : 방재홍
  • 편집인 : 방두철
  • ⌜열린보도원칙⌟ 당 매체는 독자와 취재원 등 뉴스 이용자의 권리 보장을 위해 반론이나 정정보도, 추후보도를 요청할 수 있는 창구를 열어두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 고충처리인 권동혁 070-4699-7165 kdh@readersnews.com
  • 독서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독서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webmaster@readersnews.com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