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치마폭에 담은 측천무후
중국을 치마폭에 담은 측천무후
  • 신금자
  • 승인 2007.10.02 15: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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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속의 여인들③
                                  
▲ 신금자[수필가 · 독서신문 편집위원]     ©독서신문
요즘 텔레비전 주말극 ‘대조영’에서 측천무후가 한창 뜨고 있다.
그 당시 공포정치로 권력을 휘두른 여제 측천무후를 보는 재미와 그녀의 리더십을 사실감 있게 연기하고 있는 ‘양금석’의 카리스마를 보는 맛이 보태진 듯도 하다.
 
 당 왕가 역사에서 측천무후가 등장한 후, 그 영향력 아래 놓인 시기가 3분의 1쯤 된다. 무려 40년 이상을 실제적으로 통치하였다. 한때 태종의 후궁이면서도 베일에 싸였던 그녀가 아니던가. 국사의 전권을 도맡으며 타고난 영리함과 수시로 변화하는 인물간의 이해관계를 섣불리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적합한 인재를 파악하여 끌어들이는 능력이 탁월했다고 보아진다.
좋은 예로 자신을 권력에서 밀어내려고 하는 고종의 유지를 대신들 앞에서 명명백백 공개해버렸다. 이는 결국 훗날 황후가 아닌 황제가 되려는 측천무후의 포석이었다. 대신들은 이런 무후의 차분함에 오히려 더 두려움을 느낀 것이 아닐까. 그러니 당태종 이세민을 섬겼던 많은 공신들이 이런 사태를 가만히 지켜볼 수밖에. 아니 지켜보고만 있었던 게 아니라 오히려 고종을 옹호하려했던 장손무기와 두여회가 측천무후의 눈총을 사 죽게 되었는데도 누구도 나서서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측천무후를 도와준 꼴이 되어버렸다.
 그들이 간신이었단 말인가. 아니면 그 옛날 한나라 여후가 권력을 휘두를 때 진평이나 주발처럼 기회를 노리고 있었을까. 그렇다고 해도 ‘이적'은 어찌 이해를 해야 하는가. 자기 평생을 당태종 이세민에게 바쳤고 측천무후가 권력을 잡았을 때 그의 나이 이미 팔순이 넘었다. 이는 기회를 노리기보다 측천무후 쪽 사람이 되어버렸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측천무후가 그만큼 인재를 끌어들이는데 재능이 있었단 뜻도 된다. 자신이 여자임을 최대한 이용하면서도 실제로는 남자 뺨치는 냉철한 판단과 뛰어난 수완으로 국가를 통치한 이 통 큰 여제에게 그야말로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측천무후의 본명은 무조, 무후, 무측천 등이 있다. 무후는 13세에 당 태종의 후궁으로 궁에 들어왔다. 당 태종 이세민은 무후의 용모가 뛰어나다는 소식을 듣고 재인(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으로 삼았다. 그러나 입궁한 지 13년이 되도록 태종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듯 별반 사랑은 받지 못했다. 그러다 태종이 만년에 병석에 누워 있을 때의 일이다. 궁녀로써 대기하며 시중을 들던 어느 날, 병문안을 왔던 태자(후의 고종)의 눈에 들어 가슴 뛰는 사랑을 받았다.
 그 후 태종이 세상을 뜨자 무후는 황실 법도에 따라 절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 태자가 고종황제에 오른 이듬해 선제의 기일을 맞아 감업사에 갔다가 절에서 외롭게 지내는 무후를 보고 궁으로 데려와 ‘소의’라는 비의 지위를 내렸다. 한편 무후가 황궁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데는 고종의 황후 왕씨와 후궁 소숙비의 암투도 한몫했다. 당시 고종이 소숙비를 총애하고 있었는데 이 소숙비에 푹 빠져있는 고종의 마음을 떼놓기 위해 황후 왕씨가 고종에게 무후의 입궁을 슬며시 귀띔했다.
그로인해 무후는 황제 부부의 사랑을 받으며 정이품까지 승승장구했다. 9빈 중에서도 으뜸이 된 그녀는 이때부터 환관과 궁녀들을 자기편으로 만들었다. 이어 황후와 함께 소숙비를 찍어내는 일은 식은 죽 먹기였다. 마침내 무후가 아들을 낳자 왕황후는 그녀가 슬슬 두려워졌는데 무후는 즉각 마수를 뻗친다. 마침 무후가 둘째아이로 딸을 낳았고 자식이 없던 황후 왕씨가 아이를 좋아해 자주 내방하는 것을 이용해 계략을 꾸몄다.
황후가 딸을 보러온다는 전갈을 받고 자기의 딸을 목졸라 죽여 강보에 싸두고 태연히 고종과 산책을 하다 들어온 후 고종에게 딸을 보여주려다 실신하듯 쓰러져 대성통곡을 하였다. 이에 고종이 노하여 방문한 사람을 문책하니 황후 왕씨가 속절없이 폐위되고 자신이 황후가 되었다.
 고종의 총애와 4남1녀를 둔 무후의 세력은 날로 커만 갔다. 아울러 눈엣가시였던 태종 때부터 충직한 중신들을 모두 숙청했다. 이들은 무후가 황후에 봉해지는 것을 반대했던 대신들이었다. 황족인 고종의 숙부마저 주살했고 그의 삼대까지 유배당하거나 몰락시켰다.

 때는 바야흐로 고종이 오랫동안 중병으로 정사를 돌볼 수 없게 되었다. 이를 빌미로 무후는전권을 장악하였다. 천성이 나약했던 고종은 무후에게 전적으로 의지했고 고종이 죽기까지 23년간 실질적인 통치를 그녀가 했다. 그러면서 1%의 독트린, 즉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 닥치게 될 가능성이 단 1%에 지나지 않더라도 마치 그것이 확실히 일어날 것처럼 정적들을 계속 제거해 나갔고 그 정적이 자신의 피붙이일 때도 숙청을 주저하지 않았다.
반란, 아니 뜻을 거스를 기미만 보여도 그 삼대까지 숙청하였던 측천무후는 거짓이든 참이든 밀고를 하도록 독려했다. 그녀는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고 도전 세력이 있을 때 자신을 지원한 사람들 중 인재를 등용하여 제국의 행정을 효율적으로 운영해 나갔다. 무후의 이런 뛰어난 행정수완, 용기, 과단성으로 인해 당제국은 무후가 등용한 군사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신라에까지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녀의 포악한 성격을 강조하여 측천을 부정적 인물로 평가하기도 하지만 출신을 불문하고 유능한 인재들을 과감히 등용하는 등의 혁신적인 정책으로  주나라를 세우고 대제국으로 이끈 여걸이었다.

 창업수성(創業守成)이라 했던가. 일을 시작하기 쉬우나 이를 지키기는 어렵다는 말이 있다. 그토록 잔혹하게 정적을 숙청하고도 무측천은 82세의 나이로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났다. 세계역사를 다 뒤져보아도 보기 드문 일이다.  
유언에 따르면 그녀의 피도 눈물도 없는 듯한 생과 다르게 여자의 통한을 정히 두고 갔다. 여황제도 첫 남자도 다 잊고 여전히 과거 고종의 태후였던 시절을 상기시키며 측천대성황후로 불러 달라함과 묘비에도 아무런 글자를 새기지 말라하였으며 다만 고종의 무덤인 건릉에 묻어 달라 하였다. 12년 동안 모셨던 첫 남자 대신 자신에게 여섯 명의 자녀를 낳게 했던 고종과 함께 유하고자 했다.
어찌하여 야누스의 두 얼굴인가. 사랑하는 아들에게 사약을 내릴 정도의 냉정한 이면에 한 남자를 지극히 사랑하는 지고지순한 면을 보여주어 그나마 보고 듣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쓸어내리게 한다. 비천한 궁녀에서 황제가 되기까지 분명 그녀 안에서 울고 있을 또 다른 속내가 새기지 못한 비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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