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평범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치열한 물음, 연극 '괜찮냐'
지극히 평범한 사회의 부조리에 대한 치열한 물음, 연극 '괜찮냐'
  • 김누리 객원문화기자
  • 승인 2014.03.24 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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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신문 김누리 객원문화기자] 해가 뜨고 지고 하루의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사람들은 각자 그 일상을 치열하게 살아간다. 그 속에서 무던히 살아남기 위해. 혼자 살기에도 퍽퍽한 이 세상에서 교과서에 나오는 “더불어 사는 사회”를 실현하기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하루에도 무수히 변화하는 사회의 흐름과 집단 가치에 적응해나가기 위해서 사람들은 항상 외부에 귀를 기울인다. 그러나 그것은 오로지 개인의 생존을 위한 것일 뿐, 결코 나와 함께 살아가는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는 아니다. 이런 개개인의 심리가 맞닿은 듯 현 사회는 점차 주변을 돌아보지 않는 ‘비정함’이 당연시 돼간다. 오히려 스스로 자신을 추스르지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수준 낮게 평가하고, 제 자신의 현명함에 뿌듯해한다.

그럼에도 아이러니한 것은 결국 우리는 그 누구에게든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자 한다. 그런 부족한 이들을 위해서 손을 뻗고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제 자신들에 대해 만족한다. 그렇다면, 진정 “좋은 사회”란 무엇이며, 그것은 과연 실현 가능한 것인가? 연극 <괜찮냐>는 지극히 당연하게 부조리화 돼가는 사회와 사람들에 대하여 진지하게 고찰하며, 그들에 의해 재단되고 평가받는 또 다른 그 누군가들을 주목한 작품이다.

▲ 연극 <괜찮냐> 공연 장면 [사진 제공=씨즈온]

다문화 사회와 이주 여성 성매매. 화두를 던지다

이른바 글로벌 사회다. 한국은 더 이상 단일민족 국가가 아닌, 완벽한 다문화 사회로 정착했다. 자유롭고 개방적인 문화 성격이 발전함에 따라 결혼과 같은 개인의 가치관을 결정하는 척도가 국내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나날이 한국에는 노동 등을 목적으로 한 이주민 등이 늘어나고 있으며, 국제결혼 빈도 수 또한 증가하고 있다. 이제는 외국인이 거리를 지나가고, 교실에 혼혈아가 있는 것이 낯설지 않다. 특히 일명 다문화 가족이 형성되는 데에는 국내 농촌으로 결혼하기 위해 온 이주 여성들의 증가 문제가 큰 영향을 끼쳤다. 연극 <괜찮냐> 또한 우선적으로 오랜 시간동안 현재 사회에서 큰 시사점으로 자리하고 있는 다문화 사회와 그 안에서의 이주 여성 생활 문제 등을 소재로 차용하고 있어, 깊이 있는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이 작품의 여주인공인 숙은 흔히 우리가 TV나 주변에서 접하던 농촌에 거주하는 동남아 이주 여성이다. 그녀는 극 중 과거 커다란 화재로 인해 남편, 큰 아이, 뱃속의 아이를 잃었을 뿐 아니라 눈까지 화상을 당해 시력을 잃어버린 기구한 운명의 여성이다. <괜찮냐>에서 그녀는 남편과 같이 제 곁에서 저를 보살펴 주는 장씨라는 존재에 의해서 생활을 영위한다. 하지만 마냥 그녀가 과거의 상처를 잊고 새로운 남자와 단란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장씨는 김씨, 면사무소 직원, 보건소 의사 등 숙에게 관심을 가지는 농촌의 몇 남성들이 숙과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연결한다. 숙은 자신을 성매매 시키는 장씨와 자신들을 성욕을 푸는 도구로 이용하는 남자들 사이에서 건조하고 피폐한 일상을 이어간다. 이 연극은 실제 이미 수많은 공중파 뉴스 및 시사 프로그램 등을 통해 떠올랐던 이주 여성 성매매 문제를 숙을 통해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낯선 땅, 낯선 문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거침없이 유린당하는 한 여성의 삶을 조명하고, 그 여성을 대하는 마을 사람들의 태도를 통해 다문화 사회, 이주 여성에 대해 현대 사회가 가진 편견과 폭력적 태도를 지적한다.

▲ 연극 <괜찮냐> 공연 장면 [사진 제공=씨즈온]

‘이방인’들의 왜곡된 관계와 사랑

한적한 농촌 마을, 홀로 살아가던 장씨는 화재로 모든 것을 제 몸도 챙기기 힘들어진 숙을 데리고 와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그의 일상은 지극히 평범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식사를 준비하고 좁은 방 안 누워있는 숙을 깨워 밥을 먹이고, 그녀를 단장시킨다. 너무 아름답고 예쁘다며 숙에게 애정을 담긴 언어를 늘어놓고, 스킨십을 한다. 제 무릎을 베고 누우며 행복을 느끼는 장씨에 대해 숙 역시 잔잔히 미소를 짓는다. 경제적 능력이 없는 장씨와 이주 여성 숙은 특히 농촌이라는 지역에서조차도 소외되어 있는 ‘이방인’이다. 오히려 ‘이방인’이기에 서로 함께 의지하며 살아가는 두 사람의 모습은 훈훈하게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행복은 찰나와 같다. 실제로 장씨는 집에 찾아오는 남자들이 숙을 찾아와 방에 들어가면, 홀연히 등을 돌린 채 담배를 태우기 바쁘다. 성욕을 푼 남자들이 자리를 뜨고 난 뒤, 더러워진 자리를 정리하는 것도 숙의 몸을 닦는 것도 모두 장씨의 몫이다. 아주 정적이고 자연스럽게 진행되는 성매매 현장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숙에게 사랑을 속삭이던 장씨를 알기에 더욱 소름끼치지 않을 수 없다. 숙도 특별히 거부감이 없다. 그녀를 아이를 잃은 슬픔에 여전히 빠져 있었고, 그 누가 상대든 아이를 다시 가졌으면 하는 소망을 품고 있었다.

철저히 일그러진 관계 속에서 사랑을 이어가고 있는 장씨와 숙의 모습은 도저히 일반상식 선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다. 장씨는 성매매는 묵묵히 진행하지만 숙이 타인과의 섹스 이상으로 뽀뽀와 같은 스킨십을 하는 것은 이해하지 않는다. 숙에 대한 애정은 순간순간 폭력으로 변하여 우수수 쏟아진다. 특히 이 연극은 아비가 누구인지 확신할 수 없는 숙의 임신이라는 사건을 통해 장씨와 숙의 관계가 더욱 극적으로 치닫게 한다. 친 어미에게 버림받은 기억이 있는 장씨는 숙이 출산을 하지 않길 바라며 애를 지우길 강요한다. 이방인이 또 다른 이방인이 나오지 않길 바라는 몸부림과도 같다. 결국 사랑받을 수 없고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을 아이. 성매매로 하여금 누구의 씨인지도 알 수 없는 아이. 그러나 숙은 끝까지 병원 가기를 거부하며, 보건소 의사 강선생조차 돌아가게 한다. 새로운 삶의 희망조차 쉽게 품을 수 없이 저들끼리 치열하게 맞붙는 둘의 관계는 관객에게 불편함은 물론 먹먹함까지 선사한다. 이들의 처절함은 장씨가 결국 스스로 눈을 찌르는 행위로 하여금 보다 직접적으로 표출된다. 삶의 목표가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스스로 누군가들에 의해 유린당하고 내몰리며 소외되는 두 남녀 모습으로 하여금 우리는 괜히 주변을 돌아보게 된다. 그들의 모습은 결코 비현실적이지 않고, 어디서나 어떤 방식이나 집단 가치에 의해서든 쉽게 ‘소외’될 수 있는 현 사회를 생각했을 때, 관객인 ‘우리도 어쩌면’ 이라는 전제와 함께 깊은 공감을 하게끔 한다.

▲ 연극 <괜찮냐> 공연 장면 [사진 제공=씨즈온]

인간의 지독한 생존 방식, 이중성과 이기주의

연극은 단순히 장씨와 숙만을 조명한 것이 아니라 결국 그 둘과의 긴밀한 관계를 맺으며 주변부를 둘러싸는 마을 사람들 또한 주목하고 있다. 부인이 있음에도 연신 숙에게 성욕을 품는 김씨, 어리숙하지만 의도를 가지고 장씨의 집을 찾는 면사무소 직원, 보건소 의사 강선생. 특히 숙과 성관계를 맺거나 했던 남자들 뿐 아니라 김씨 부인까지 등장하며 본 연극은 극히 제한된 인원만으로도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이 가진 위선과 이기심을 충분히 보여준다. 그들은 애초에 장씨와 숙에 대해 큰 관심이 없다. 모두 목적에 의해서 그들의 집을 찾을 뿐이다. 성욕을 풀기 위해서, 또는 이장 당선을 위해서. 김씨 부인은 김씨와 함께 장씨와 숙에게 이장 선거에서 자신을 밀어달라 부탁하며 살가운 태도를 취한다. 철저히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는 선한 면모를 보여주던 그들은 숙의 임신, 그리고 김씨의 이장 당선이라는 일련의 사건과 함께 완전히 돌변한다. 특히 숙이 임신을 하고, 결국 출산을 하게 됐을 때, 사람들은 그 아이가 사산이 됐음에 놀라는 한편 각자 자신의 핏줄이 아닌 것에 지극히 당연하게 안심한다. 그리고 각자 급히 자리를 뜬다.

또한 마지막 사산된 아이를 장례하지도 않고 방문 안에 몸을 숨긴 두 남녀를 두고 동향을 살피러 왔던 마을 사람들은 장씨의 집에 화재가 발생하자 다급히 자리를 떠난다. 누가 수발을 드냐의 문제부터 마을의 이미지만 생각하는 그들의 모습은 마치 현 사회에서 당연하게 소외 주민들을 외면하고 자기 살 길만 찾기 바쁜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제 안위만 생각하며 결국 자연스럽게 제 일상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이 관객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선사하지 않을 수 없다. 항상 ‘도덕’의 가치, “더불어 사는 사회” 실천의 중요성을 외치는 현대 사회에 짙게 베인 위선의 현장에 과연 지금의 사회는 얼마나 ‘괜찮은 사회’인가 깊이 고민하게끔 한다.

“괜찮냐?“ 당신이 보기에 과연 이 사회는, 이 사회를 사랑들은 괜찮은가. 연극 <괜찮냐>는 지극히 사회가 감춰뒀던 추악한 내면, 그것도 현재 진행형인 문제들을 가감 없이 보여주며, 관객이 치열하게 각성할 수 있도록 한다. 한편, 극의 제목처럼 보다 사회와 사람들이 변화해 진정 주변을 향해 따스한 시선과 말 한마디를 던질 수 있기를 바라는 소망을 드러낸다. 물론 현대 사회가 점차 개인의 안위만 지향하게 되는 사실을 온전히 바꾸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러나 결국 항상 사람들은 서로 부딪히며 살아간다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임을 인지해야 한다. 개개인이 한명마다 조금씩 변화한다면 그것은 충분히 또 다른 새로운 ‘희망’이 될 지 모른다. 연극 <괜찮냐>는 아주 극단적인 상황에서 새로운 사회가 발현되는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했다.

연극 <괜찮냐>는 4월 6일까지 스튜디오 76에서 공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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