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 '동굴의 우화'로 본 영화 '설국열차'
플라톤 '동굴의 우화'로 본 영화 '설국열차'
  • 황인술
  • 승인 2013.09.25 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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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생 와이드 철학논술
▲ 황인술 논설위원     © 독서신문
[독서신문] Ⅰ. 생각해보기 

설국열차 밖으로 탈출
  설국열차(동굴) 안 인간(죄수)들은 절대로 열차 밖으로(이데아) 나갈 수 없다. 밖으로 나가기 위한 시도는 있었지만 번번이(番番) 실패하고 만다. 밖으로 나갔지만 얼마가지 못해 꽁꽁 얼어 죽은 7인의 반란자들 모습을 교훈 삼아 절대 나갈 수 없다고 훈육한다.(소피스트) 이 훈육에 열차(동굴) 안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겠다는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안시설 설계자 남궁민수(철학자)는 매년 같은 곳을 지나는 차창 밖을 통해 오래전 추락한 비행기 잔해를 뒤덮은 눈이 해가 갈수록 녹아내리고 있다는 것을 세심하게 관찰한다.(이데아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됨) 눈이 녹는다는 것은 지구 기온이 서서히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누군가 모험을 시도하지 않으면 인간(죄수)은 설국열차 안의 사람들 모두는 일인 통치를 하고 있는 독재자 윌포드 망령에 사로잡혀 영원히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고착된 관념과 신념, 생각을 떨쳐버려야 밖으로 나갈 수 있다. 밖으로 나가려는 위버멘쉬(Übermensch, overman)정신이 있어야 한다. 위버멘쉬정신 없이는 새로운 경험과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마지막 장면에서 보여주고 있다. 위버멘쉬는 니체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한 말로 자기 자신을 극복하는 신체적 존재, 인간 자신과 세계를 긍정할 수 있는 존재이자, 지상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를 완성시키는 주인 역할을 하는 존재를 말한다.
  위버멘쉬정신이 있는 사람은 현실의 고통을 떨쳐버리고 자신의 의지와 판단에 의해 환하게 웃는 자로 변화된 사람이다. 인간의 힘 의식이 이렇게 상승되면 고통과 분열, 몰락의 길로 들어서지 않고 고통에서 일어설 수 있는 것이다. 남궁민수는 두꺼운 열차 문을 폭파하고 죽지만(열차 승객 모두 죽는다.) 흑인소년과 요나는 살아남는다. 흑인소년과 요나가 두발로 하얀 눈을 밟고 새로운 세상 이데아(유토피아)로 나가는 것은 새로운 희망의 메시지이다. 오늘날 찬란한 문명을 일으킨 호모사피엔스는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종말인(der letzte Mensch)은 위버멘쉬와 반대되는 인간유형으로 허무적 인간을 말한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종말인 살펴보기
  보라! 나 너희들에게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 종말인을 보여주겠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창조는? 동경은? 별은?’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 종말인은 이렇게 묻고는 눈을 깜박인다. 대지는 작아졌으며 그 위에서 모든 것을 작게 만드는 저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날뛰고 있다. 이 종족은 벼룩과도 같아서 근절되지 않는다.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 누구보다도 오래 산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은 이렇게 말하고 눈을 깜박인다. 저들은 살기 힘든 고장을 버리고 떠나갔다. 따뜻한 기운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아직도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의 몸에 자신의 몸을 비벼댄다. 따뜻한 기운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병에 걸려 신음하는 것과 의심을 품는 것이 저들에게는 죄스러운 것이 된다. 그리하여 저들은 아주 조심조심 걷는다. 아직도 돌에 걸리거나 사람에 부딪혀 비틀거리는 것은 바보나 하는 짓거리가 아닌가! 때때로 마시는 얼마간의 독, 그것은 단꿈을 꾸도록 한다. 그러고는 끝내 많은 독을 마심으로써 편안한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 저들은 아직도 일에 매달린다. 일 자체가 일종의 소일거리인 즐거움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소일거리인 즐거움으로 인해 몸을 해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한다. 이제 저들은 더 이상 가난해지거나 부유해지려 하지 않는다.
  그 어느 것이든 너무나도 귀찮고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아직도 다스리려드는 사람이 있는가? 아직도 고분고분 따르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그 어느 것이든 너무나도 귀찮고 힘든 일이거늘. 돌볼 목자는 없고 가축의 무리가 있을 뿐! 모두가 평등하기를 원하며 실제 그렇다. 어느 누구든 자기가 특별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제 발로 정신병원으로 가게 마련이다. ‘옛날에는 세상이 온통 미쳐 있었지!’ 더없이 영민한 자들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깜박인다. 저들은 총명하여 일어난 일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그러니 저들의 조소에 끝이 없을 수밖에. 저들도 다투기는 하지만 이내 화해한다. 그렇지 않으면 위에 탈이 나기 때문이다. 저들은 낮에는 낮대로, 밤에는 밤대로 조촐한 쾌락을 즐긴다. 그러면서도 건강은 끔찍하게 생각한다. ‘우리는 행복을 찾아냈다.’ 비천하기 짝이 없는 인간은 이렇게 말하고는 눈을 깜박인다.
  종말인들의 특징들이다. 종말인은 첫째, 이웃사랑이나 형제애 그리고 동정이나 관용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다. 이런 덕목은 현대에도 여전히 인류애 유형으로 유효하다. 하지만 이런 덕목은 자신과의 끊임없는 긴장과 싸움을 통해 자기극복을 실천하려는 인간에게는 유해한 덕목이다. 개인의 힘에의 의지를 약화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우리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지 못할 때나, 혹은 자기 자신을 잘못 사랑할 때, 우리는 자기 자신과의 직접적인 관계맺음인 고독한 삶을 일종의 “감옥”으로 여기며, 다른 사람을 찾게 된다고 말한다.
- 출처 :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해제, 「종말인과 위버멘쉬」,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04.

Ⅱ. 생각확대하기
 
▲ 설국열차 구조 : 전체 60칸(1칸 당 25m, 60칸 × 25m = 1.5km)꼬리 칸, 감옥 칸, 단백질 블록 생산 칸, 물공급 칸, 온실 칸, 교실 칸, 객실 칸, 기계실     ©  CJ엔터테인먼트

 
설국열차 구조
  상류계급이 지배하는 기본 방식은 기만전술이다.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밖으로 나가면 얼어 죽는다고 끊임없는 거짓말로 속인다. 이를 비판하거나 폭로하면 조직의 쓴맛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자신들이 만든 법칙과 규율에 따르라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이탈하면 즉각 물리적인 힘이 동원된다. 다리를 못 쓰게 만들어 걷지 못하게 만든다거나, 정신을 오락가락하게 만들어 말을 못하게 하거나, 심지어는 목숨까지도 서슴없이 빼앗는다. 
  조직의 폭력은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한다. 이는 조직이 갖고 있는 시스템 원리이다. 그러니 선뜻 아니라고 용기 있게 맞설 수 없는 것이다. 설국열차는 그런 의미에서 많은 시사성을 준다. 조직 시스템에서 복종하여 붙좇기를 그만두고 시스템 밖으로 뛰어나가라고 부추기는 영화다.
  그러나 뛰어나가기란 쉽지 않다 시스템이 완벽한 사회에선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다간 제 명대로 살 수 없다. 죽을 각오를 하지 않는 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는 마오쩌둥이 이끈 공산당군이 중국 대장정에서 보여주듯 오지 농촌에서 굶어 죽으나 장제스 국민당군과 싸워 죽으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라면 어느 편을 선택해야 할까?
  문제는 설국열차 시스템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속에 있으면 안전하다고 교육받았기 때문에 안전하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안에 있으나 밖으로 탈출하는 것 중 죽기는 마찬가지라면,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는 것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를 설국열차는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주어진 시스템(동굴) 안에서 꼬리 칸의 노예가 될 것인가 아니면 밖으로 나와 주인이 될 것인가 그것은 각자 개인의 선택에 달려있다.
 
▲ 광장 칸     © CJ엔터테인먼트


꼬리 칸
  광장 칸, 공공의 칸, 숙소 칸, 난민촌, 길리엄의 텐트 전체 60칸 중 끝 쪽 20칸으로 설계 당시 용도는 식량과 원자재 등을 싣는 화물칸이었다. 불법으로 승차한 사람들이 타면서 식량과 원자재 등은 앞 칸으로 옮겨졌고 남겨진 사람들은 남은 기자재들을 개조하여 사용한다. 시간이 갈수록 인구과밀, 물 부족, 위생, 주거 등 모든 것이 열악해져 간다. 열악한 생존 조건과 앞 칸의 억압이 꼬리 칸 사람들에게 반란을 일으키게 한다. 꼬리 칸 사람들은 군인들에 의해 통제된다.
 
▲ 감옥 칸     © CJ엔터테인먼트


감옥 칸
  본래 설계에는 닭과 돼지 등을 사육하고 말과 소 등을 보관하는 공간이다. 정치범이나 흉악범 등 질서를 어지럽힌 자들을 가둔다.
 
▲ 단백질 블록과 단백질 생산 칸     © CJ엔터테인먼트

 
단백질 블록 생산 칸
  설계 당시 용도는 온실 칸에 쓰일 비료를 생산하는 기계장치가 있는 칸이다. 모든 식재료는 앞 칸에서 소비된다. 꼬리 칸 사람들에게는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식량이 지급된다. 이 식량은 검정색 연질성 블록(양갱 모양)으로 바퀴벌레가 원재료이다. 열차에 실려 있는 식량과 자체 생산하는 식량만으로는 꼬리 칸 사람들까지 먹일 수 없기 때문에 개발된 먹거리이다.
 
▲ 물 공급 칸(왼쪽)과 온실 칸     © CJ엔터테인먼트

 
물 공급 칸
 열차의 상수도 시스템으로 열차의 머리가 얼음을 깨트려 얼음 조각들을 빨아들이고 이를 녹이고 정화하여 깨끗한 물을 공급하고 있다. 꼬리 칸으로도 물은 공급 되지만 적은 양으로 인해 위생상태가 극도로 좋지 않다.
 
온실 칸
  초록식물로 가득 찬 칸으로 설계 당시에는 식량 배급을 위해 설계된 칸이 아니기 때문에 재배되는 식물의 양은 극히 적다. 앞 칸 사람들이 자연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 졌으며, 이 곳에서 생산되는 과일들은 앞 칸 사람들 일부만 먹을 수 있다.
 
교실 칸
  운행이 길어지면서 앞 칸 아이들의 교육이 중요해진다. 교육은 주로 열차의 역사나 윌포드에 대한 찬양 등을 주입하는 과정으로 짜여 있다.
 

Ⅲ. 생각정리하기
 
1. 유토피아
  utopia는 현실적으로는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국, 또는 이상향(理想鄕)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래 토마스 모어가 그리스어 ‘없는(ou-)’, ‘장소(toppos)’라는 두 말을 결합하여 만든 용어이다. 이 말은 ‘좋은(eu-)’, ‘장소’라는 뜻을 연상하게 하는 이중기능을 지니고 있다.
  유토피아는 플라톤 『국가』에 나오는 이상국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정확히는 모어의 『유토피아』(1516)를 시초로 하여 캄파넬라의 『태양의 나라』(1623), 베이컨의 『뉴아틀란티스』(1627) 등 근세 초기, 즉 16∼17세기에 유토피아 사상이 연이어 출현한 시기를 그 탄생의 시점(時點)이라고 볼 수 있다.
  유토피아는 중세 사회질서에서 근대 사회질서로 옮아가는 재편성의 시기를 맞아, 또는 거기에서 생기는 사회 모순에 대한 단적인 반성으로, 또는 근세 과학기술 문명의 양양한 미래에 대한 기대에서 생긴 것이다.
  전자의 예로는 종교개혁 사상 가운데 가장 과격파인 ‘천년지복설(千年至福說)’의 비전을, 후자의 예로는 『뉴아틀란티스』를 각각 그 전형으로 들 수 있다. 이들 유토피아 비전은 또한 18∼19세기의 생시몽, 푸리에, 오언 등 이상사회 계획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이 근대의 유토피아 사상과, 나아가서 루소 등 원초적 자연상태로 황금시대에 대한 꿈이나 플라톤의 이상국에 대한 꿈까지를 포함하여 일관된 특징은, 그것들이 이상향을 아무데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라고 하면서도, 실은 어디까지나 현세와 시공간적 연속선상에서 꿈꾸고 있다는 점이다.
  즉 유토피아는 ‘도원경(桃源境)’, ‘황천국(黃泉國)’, ‘하데스(Hades)’ 등 원시시대 이래 인류 일반에게서 볼 수 있는 다른 세계에 대한 생각(타계관념 他界觀念)처럼 시공을 단절한 양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은 에른스트 브로호, 마르쿠제 등 20세기 유토피아 사상 계승자들의 사상에 있어서나 또는 조지 오웰, 올더스 헉슬리 등 20세기 '역(逆) 유토피아' 사상에 있어서도 같다.

2. 이데아론(Theory of Ideas)

▲ 플라톤 이상 국가 - 질서 있는 국가는 선을 향한다.    

  이데아란 그리스어의 eidos(에이도스)와 비슷한 말로 idein(이데인)이다. 이데아는 ‘본다’라는 동사에서 왔으며, 모양이나 모습을 뜻하며 오직 이성에 의해 파악될 수 있는 이데아의 세계만이 참된 세계로 본다.
  이데아는 오직 지적 능력으로 알 수 있으며, 여기서 이유와 근거 없는 미루어 헤아리는 추측 즉 근거 없이 제멋대로 상상하는 억상(臆想)인 억견(臆見, doxa/opinion, belief/ 일종의 판단할 수 있는 능력으로 그리스어 독사dóxa가 어원이다. ) 또는 억측(臆測)에 대한 생각이나 의견(세속적이거나 통속적인 견해인 속견), 지식(사물에 대해서 가지는, 그것이 참이라고 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인식)은 구별된다.
  여기서 인식이란 그 대상이 이데아에 관한 것으로 억견은 감각을 자극하는 경험을 통해 애초부터 생각 속에 들어 있는 움직이지 않는 생각이나 견해(見解)로 사물의 참된 모습에 대한 근본을 캐어 들어가 연구하지 않고 겉면만을 다루어 처리하는 판단을 말하며, 시인과 예술가들의 창작이 상상력을 통해 없는 것을 만들어내는 행위 등이 이에 해당한다.

정삼각형 꼭지점은 선의 이데아
  만물이 지니고 있는 최고의 보편적인 형상은 선의 형상이며 이는 다른 형상들의 원인이 된다. 다른 형상들을 우리에게 무엇인지 알게 하는 원인이 된다. 형상들은 변하지 않고 영원하기 때문이 참된 실재이며 초월해 있고, 경험하여 깨달아 가는 세계와 독립되어 있다.
  경험하여 깨달아 가는 세계(되어 지고, 보여 지는 세계)는 형상의 세계를 본떠서 만들어졌다. 결국 세상은 아무런 인과 관계 없이 뜻하지 않게 일어난 것이 아니고 선에 의해 다스려진 결과이다. 플라톤은 영혼 불멸과 우주를 생성하는 물질로 세계영혼(World-Soul)을 믿었다.
  플라톤의 모방 개념은 세 개의 침대로 설명되고 있다. 맨 처음에 등장하는 침대는 신에 의해 만들어진 침대이다. 이것은 본래 성질을 가지고 있는 침대의 이데아로 거짓 없는 참인 가치를 지닌 오직 그것 하나뿐인 존재가 된다.
  그 다음 등장하는 침대는 신이 만든 침대의 이데아를 본떠서 목수가 만든 침대로 실재 사용되는 현실 속에 있는 침대이다. 이 침대들은 이데아를 본떠서 만들어 졌지만 특수한 현상일 뿐이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침대는 목수가 만든 침대를 본떠서 화가가 그린 그림 속에 있는 침대이다. 이 침대들은 이전 제작자가 만든 침대를 본떠서 만들었기 때문에 본래의 모습을 완전하게 본뜨지 못하고 침대의 현상 일면만을 본떠서 만든 것에 불과할 뿐이다.
  즉, 신을 창조자(creator), 목수를 제작자(maker), 화가를 모방자(imitator)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우리가 현실에서 사용하는 침대는 감각적인 사물로 나타난 침대로 생각이나 의견에 비하면 거칠고 잡스러워 품위가 없는 것이지만 사용가치를 가지고 있는 침대이다. 그러나 화가가 그려놓은 침대는 순수하지도 않고 사용가치도 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플라톤은 이와 같이 화가나 시인은 진리에서 세 단계나 떨어진 모방자로 보았으며, 시인은 부도덕하고 무가치한 대상을 모방하므로 시는 진리의 세계로 이끌어 가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감정을 자극하여 이성을 마비시켜 갈 길을 방해하기 때문에 시인은 비난 받아 마땅하며 이상국가인 공화국에서 영원히 추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학이 가지고 있는 오직 하나뿐인 쓸모는 감정적인 쾌락이기 때문에 진리를 이념으로 삼고 정의를 실현시켜 이상 국가를 건설해야 하는 이성적인 사람들은 감정적인 쾌락에 빠지는 감성을 조심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문학은 진리를 추구하는 보편적인 도덕성을 가지고 쓸모 있는 가치를 만들어 낼 때만이 문학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의미와 목적을 실현할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3. 배에 대한 비유
  플라톤은 부정적인 통치권 운용 형식(정체 政體)과 긍정적인 통치권 운용 형식을 다루면서, 부정적 운용형식으로 명예정치, 과두정치, 민주정치, 참주정치 등을 언급한다. 네 가지 통치권 운용 형식은 당시 그리스 도시 국가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적 통치 유형에 대한 플라톤의 분석을 담고 있다. 플라톤은 무엇 때문에 민주정치를 부정적으로 생각했을까? ‘배에 대한 비유’를 통해 당시 아테네의 정치 현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배에서 다음과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배의 주인은 모든 면에서 그 배에 탄 모든 사람보다 뛰어나게 났다고 하지만, 귀는 소리를 잘 알아듣지 못하고 눈은 근시에다 항해에 관한 지식은 거의 없다. 이런 상황에서 선원들은 키를 조정하는 일로 서로 다투고 있다. 저마다 자기가 키를 조정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그 기술을 배우지 않았고, 배웠다는 선생을 내세우지 못하며, 그것을 알게 된 시기도 내보이지 못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조타술을 가르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누군가 조타술은 가르칠 수 있는 기술이라고 하면, 그를 혼내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언제나 배 주인을 둘러싸고 자신들에게 키를 맡겨 달라고 청하며 온갖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그리고 때로 자신들의 주장을 이해시키는데 실패하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의 주장을 이해시키는데 성공하게 되면, 그들을 살해하거나 배 밖으로 던져버리곤 한다. 그리고 몸가짐이 무겁고 말이 적어 의젓한 배 주인을 최면제를 먹이거나 술에 취하게 하거나 또는 그 밖의 다른 것으로서 몸을 조금도 움직이지 못하게 한 다음, 배 안에 있는 것을 이용하여 배를 지휘한다.
  그들이 정확한 기술을 익혀 배를 지휘하고 항해하기에 유능한 사람이 되려면, 4계절, 하늘의 별자리, 바람의 방향, 그리고 그 기술에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해 철저하게 준비하는 것이 필요하고 이에 대한 공부를 해야지만 키를 조정할 기술을 가질 수 있게 되는데 그들은 이것을 전혀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일들이 배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면, 진짜 조타술에 능한 사람은 이런 선원들로부터 아주 보잘것없이 생각되어 천체 관측자나 쓸데없는 말이 많은 사람으로, 그리고 자신들에게는 쓸모없는 사람으로 불릴 것이라고 자네는 생각하지 않는가?
- 『국가론』
  플라톤은 ‘배에 대한 비유’에서 배의 주인, 선원, 조타술 등에 대한 비유를 들고 있다. 여기서 배의 주인은 민주국가 조직형태의 주인인 백성, 선원은 선동정치가인 현실정치인, 조타술은 나라의 경영을 의미한다.
  이 비유는 당시 아테네의 민주정체에 대한 매섭고 날카로운 풍자를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플라톤의 정치철학에 대한 생각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비유를 정확하게 이해하면 그의 민주정체에 대한 비판은 ‘백성’보다 ‘선동정치가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백성을 상징하는 배 주인을 ‘덩치나 힘에서 그 배에 탄 모든 사람보다 우월하지만, 약간 귀가 멀고 눈도 마찬가지로 근시인데다 항해와 관련한 다른 것들에 대해 아는 것도 고만하다’라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선원들(선동정치가, 현실정치인)은 ‘점잖은 선주를 최면제나 술 또는 그 밖의 다른 것으로 옴짝달싹 못하게 한 다음 배 안에 있는 것들을 이용해서 배를 지휘한다’고 말하면서, 선원들을 항해에서 결정적으로 위험한 존재들로 비판한다.
  한편 이 비유에서 항해술이나 조타술에 능한 사람은 참된 철학가들을 가리키는데, 플라톤은 정치를 나라를 다스리는 기술로 생각한다. 이런 기술은 지식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철인정치 이념에서 지식은 중요하게 작용한다.
  결국 배의 비유에서 조타술을 배운 적도 없으면서 날뛰는 선원들에 의해 지배된 배는 당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을 의미한 것이고, 참된 키잡이(철인정치)에 의해 인도되는 배는 ‘이상국가’이다.

4. 동굴 우화(the allegory of the cave)
 


  플라톤은 이데아를 설명하기 위해 동굴 속에 살고 있는 몇 사람의 죄수들을 예를 들고 있다. 죄수들은 태어나면서부터 발과 목에 사슬을 묶여 있어 움직일 수 없다. 죄수들은 자신의 머리를 돌릴 수 없기 때문에 앞에 존재하는 것만 볼 수 있다.
  그들 뒤에는 높은 벽이 가로막혀 있다. 벽 위에는 물건을 들고 앞뒤로 걷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나르는 물건들은 나무와 돌과 그 밖의 다양한 물질들로 만들어진 동물과 인간의 상(像)들이다.
  이들의 뒤에는 횃불이 있고, 그보다 훨씬 뒤에 동굴의 입구가 있다. 족쇄에 묶여 있는 죄수들은 동굴의 벽만을 볼 수 있을 뿐, 서로를 보거나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거나 그들 뒤에 있는 횃불을 볼 수 없다. 죄수들이 볼 수 있는 것은 그들 앞에 있는 벽(스크린)에 투사된 그림자가 전부이며, 그 그림자는 사람들이 횃불 앞으로 걸을 때 비친 형상이다.
  죄수들은 대상물이나 그것을 나르는 사람을 볼 수 없으며, 그 그림자들이 다른 사물의 그림자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죄수들은 그림자를 보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의 음성을 들을 때 그것이 벽에 반사된 메아리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그 소리가 그림자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하며 그것을 진실이라 믿는다. 죄수들은 동굴 속 세계 외에 다른 세계의 존재를 경험하지 못하며 벽에 투사된 그림자만 인식하게 된다.
  
Ⅳ. 생각 찾아보기
 
  영화 <설국열차>에서 남궁민수(송강호)가 밖으로 나가려고 한 이유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쓰시오.
 
/황인술 논설위원(인문학당 아르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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