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후란 편
김후란 편
  • 김용만
  • 승인 2007.09.06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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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과 형식의 조화, 그리고 나무
 억지스런 구도겠지만, 내용과 형식을 변증법에 대입시켜보면 어떨까 싶다. 요컨대 내용과 형식을 갈등구조로 놓고 볼 때 내용을 정(正)에, 형식을 반(反)에 대입시켜 그것들이 모순과 갈등을 겪으면서 차원 높은 단계로 지양한다면 그 이상적인 합(合)은 무엇일까?

이처럼 내용과 형식을 대척관계로 본다면 문인은 생래적으로 내용주의자이다. 아름다움과 진실의 구경적 세계를 추구할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새롭고 낯설게 창조하기 위해서는 상식이나 규범 같은 보편적인 가치를 초월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유의지나 반역정신의 체질화는 물론 타락미학의 새로운 창출과 심지어 악마주의까지도 수용해야 진정한 창조의 세계를 넘볼 수 있는 것이다

▲ 김후란 시인     ©독서신문
 
그렇다면 형식은 자연히 창작을 저해하는 부정적인 요소로 폄하될 수밖에 없는데, 이성주의, 경건주의, 규범주의 현실주의 등이 형식의 중심 덕목이 될 것이다. 요컨대 내용이 질서를 파괴하는 개인적 영역이라면 형식은 질서를 세우는 사회적 영역이랄 수 있겠다. 다만 그 파괴가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는 전제가 되기 때문에 창조적 삶을 지향하는 문인의 체질에는 내용이 진정한 가치로 여겨지는 것이다. 새로운 가치 창조야 말로 문예창작의 본령이 아닌가.

보통 인격을 말할 때, 그 사람의 천부적 성향, 사상, 지조 등 내용적 요소와 언어표현, 행동거지 등 형식적 요소를 통틀어 일컬을 텐데 문인으로서는 그 두 가지의 조화가 어렵다. 내용이든 형식이든 어느 한 쪽에 몰입하다보면 그 둘 사이는 점점 거리가 멀어지게 된다. 내용은 점점 더 광기의 세계로 치닫게 되고 형식은 점점 더 규범주의에 빠지고 만다. 그러므로 광기의 세계에 탐닉하자니 사회인으로서의 품격에 흠을 내게 되고, 매끈한 형식논리에 집착하자니 창작정서가 희석되기 쉽다.

이처럼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극복하여 내용과 형식이 조화를 이루는 이상적인 지향태(指向態)의 알레고리로 김후란 시인은 나무를 설정했다. 그런 맥락에서 김후란 시인과 나무의 상관관계는 그 의미가 사뭇 깊고 이색적이다. 물론 나무를 싫어할 사람이 없을 테고, 특히 시인의 눈에 비친 나무는 예사롭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김후란 시인이 생각하는 나무는 상식적인 재단을 초월한다. 그의 눈에 비친 나무는 단순한 자연물이 아니다. 나무를 영성(靈性)을 지닌 인격체로 보는 것이다.

나무의 윤리는 생명체를 존속시키고 그 생명체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 데에 있다. 여기에서 아름다움은 생명체가 존재해야 하는 당위(當爲)를 의미한다. 그냥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존재 형태가 미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 미적 형태의 구경적 실체를 나무는 제 구체적인 형상미로 표출하고 있다. 천당이 언어적 은유로 그려진다면 나무는 제 이상세계가 어떤 모습인지를 아름다운 형상미로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인간은 언어적 은유에만 익숙해진 탓에  그 이상세계(이데아)의 모방 현상인 나무를 한갓 자연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나무를 유심히 관찰해보라. 한 나무는 어느 것이나 균제의 미를 형성하고 있다. 가지가 여러 개지만 전체 우둠지의 모습은 가지런한 균형을 이룬다. 어느 가지가 부러져 거기서 나온 새순이 전체적인 균제를 이루지 못한다 해도 파격적인 포인트가 되어 차원 높은 조형미를 연출한다. 심지어 가지에 돋는 새순이 긴 시차를 두어 돋았다 해도 먼저 웃자란 가지가 스스로 죽음을 자초해서라도 전체적인 균형을 이루게 마련이다. 이처럼 나무는 어떠한 시련에도 절대미의 본질을 훼손시키지 않는다.

나무의 생성은 원래 인간에 대한 보시(布施) 정신에서 비롯되었다.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나무의 생성은 인간 탄생의 전제조건인 셈이다. 지구 최초의 나무인 아키옵텔레스는 잎과 줄기가 물 속에 떨어져 물고기의 먹이가 되는데 현대과학은 그 물고기가 인류의 조상임을 증

▲ 김후란 시인의 젊은시절 모습     ©독서신문
명해내고 있다. 또한 나무는 먹이사슬의 최초 기본 단위가 되어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미물의 먹이가 되어준다. 미물에 씹힌 나뭇잎의 상처를 보라. 그게 나무의 휴머니즘이다.
김후란 시인의 나무와의 친화는 본성이나 진배없다. 소녀시절에 이미 창밖에 묵묵히 서 있는 나무를 보며 나무의 언어를 연구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만큼 나무와의 동일시현상을 노렸던 것이다.

김후란 시인의 엄격한 균형성을 전통적인 윤리나 규범에만 국한 시켜 재단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본질을 간과한 시선이다. 김 시인의 균형은 작위적인 수양의 결과라기보다 초월적인 정신세계가 유발한 일종의 자연현상인 것이다. 그것은 우주적인 몸짓이지 인간사회에서 통용되는 규범 차원의 교양태가 아니다. 창작인의 필수 요소인 광기 역시 김 시인의 경우 작위적인 내면화가 아니라 우주적인 몸짓이기에 잘 감지되지 않을 뿐이다. 필자는 그 우주적인 몸짓을 감지한 적이 있다. 존재론적 고통 말이다. 생각해보라. 가치 차원의 교양태와 존재 차원의 고통을 어찌 같은 저울로 계량할 수 있겠는가.

지난 7월 27-28일 남산 기슭에 위치한 <문학의 집. 서울>에서는 문인들이 직접 출연한 문인극 <위대한 실종>이 공연되었다. 지난 독재시절 고문이 자행되던 기관의 숨겨진 장소를 자연과 어우러진 문학의 공간으로 바꾸고 일궈낸 사람이 김후란 시인이다. 필자도 그 문인극에 배우로 참여했는데 그때 김 시인이 우리 문학, 문단의 나무이며 숲임을 새삼 깨달았다. 그의 사람과 일생이 그렇고 시가 그렇다. 
 
어딘지 모를 그곳에
언젠가 심은 나무 한 그루
자라고 있다

높은 곳을 지향해
두 팔 벌린
아름다운 나무
사랑스런 나무
겸허한 나무

어느 날 저 하늘에
물결치다가
잎잎으로 외치는
가슴으로 서 있다가

때가 되면
다 버리고
나이테를
세월의 언어를
안으로 안으로 새겨 넣는
나무

그렇게 자라가는 나무이고 싶다
나도 의연한 나무가 되고 싶다
김후란의 「나무」전문    
            
김 시인은 대학시절 전국 학생 작품 모집에서 소설로 입상한 뒤 『현대문학』을 통해(신석초 추천) 시로 등단했다. 여성 시인들의 순수시 동인 ‘청미회’(靑眉會)를 결성, 동인 활동을 펼쳤으며 『장도와 장미』를 비롯해 『숲이 이야기를 시작하는 이 시각에』, 『나무 그늘 아래서』, 『우수의 바람』등 9권의 시집을 펴냈다. 20여 년의 언론인 생활과 한국여성개발원 원장,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등을 역임해 오며 활발한 사회 활동도 펼쳤다.

무엇보다 문학의 집은 물론 ‘생명의 숲 국민운동’ 이사장, ‘성숙한 사회 가꾸기’ 공동 대표 등을 맡아 인간과 사회를 가꾸고 있는 김 시인의 모습 자체에서 의연하면서도 생명이 넘치는 나무와 함께 마치 그의 삶과 시의 주제처럼 위 시가 떠오른다.
김 시인의 시는 우선 쉽고 공감대가 크다. 그래서 많은 독자들에게 사랑을 받는다. 김 시인은 「나의 시, 나의 시론」에서 밝혔듯 “읽어서 즐거운 시, 읽혀지는 시, 기쁘게 공감하고 절감하는 시”를 지향하고 있다. 언뜻 보면 ‘대중시’ 지향처럼 보이나 그의 언어나 시적 장치는 그리 녹록치 않다. 무엇보다 독자와 사회와 우주 유기체적 생명에 도움이 되는 시를 쓰고 있다.

위 시는 쉽게 읽히면서도 ‘나무’는 3차원적으로 공감을 확산, 심화시키고 있다. 우선 나무는 높은 하늘을 향해 가지를 뻗치고 바람에 잎잎을 하늘 물결처럼 휘날리는 구체적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그러면서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겸허하다’고 나무를 의인화, 내면화하며 시인 자신의 ‘가슴’ 속으로 품어 들이고 있다.   
실제의 나무는 한 곳 붙박이의 유한한 존재이지만 위 시에서는 “어딘지 모를 그곳”과 “언젠가”로 시공을 확산시키며 우주론적, 존재론적 차원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러면서 나무는 나와 삼라만상을 모두 포괄하는 존재, 혹은 우주적 섭리의 “세월의 언어”가 된다. 그 세월의 언어는 그리움이며 사랑은 물론 사회성, 존재성 등을 순연하게 껴안고 있다. 
그건 다만 흐름일 뿐

어느 기슭에 스쳐가는
노래일 뿐

떠난다는 건 슬프다
잠든 이의 평온함이
고요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허공에 사무친다

그러나 남기고 가는 것이 있다
이어짐에 얹힌 빛이
또 다른 고리가 되어
울림을 갖는다

어제와 내일을 이어주는
무한 공간의
바람 고리.

김후란의 시 「바람 고리」
 

▲ 김후란 시인과 대담중인 김용만 소설가     ©독서신문
 
바람은 형상이 없다. 나무 잎잎들의 흔들림, 떨림, 울림 등에서나 그 유동체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을 뿐 형체 없는 존재다. 그러나 바람은 만물을 ‘존재의 빛’으로 영원히 유전케 한다. 아니 바람이 영속할 수 없는 존재들을 영속하게 하는 본질인 줄도 모른다. 김 시인의 7번째 시집 『우수의 바람』은 그런 바람이라는 ‘존재의 빛’을 형상화한 시 57편이 모여 있다.
위 시 「바람 고리」에서 우선 바람은 형체 없는 유동체로 드러나고 있다. ‘노래’이지만 형체 없이 사라지는 것이어서 슬프다. 그리움이나 사랑처럼 머물 수 없이 떠나는 것이어서 “허공에 사무친다”고 했을 것이다. 아니 그런 슬픔이면서도 그리움이고 사랑이기에 “고요히 가라앉는 목소리”이고 노래라고 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김 시인의 시는 있음과 없음, 슬픔과 기쁨, 영원과 유한 등 모든 상반성을 생래적으로 껴안아 버린다. 그의 시에는 시의 가장 흔한 수사법인 대비, 대조법이 끼어들 틈이 없다. 존재 자체가 음과 양, 긍정과 부정 양면이듯 그 양면이 순연히 합치돼 존재의 빛을 발하게 하고 있는 것이 김 시인의 시다.  
형체 없이 스러져 가는, 소멸돼 가는 모든 것들, 바람도 “그러나 남기고 가는 것이 있다”고 의연하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남기고 가는 것’ 그것이 위 시에서는 바람의 ‘고리’다. 고리는 너와 나를 이어주고 우주 삼라만상을 하나로 이어준다. 개체성을 넘어 사회성, 우주 유기체성의 ‘무한 공간’으로 확산돼가게 하는 이 ‘고리’는 그리움이며 사랑이다.

많은 여성시들이 서정시의 뿌리랄 수 있는 그리움과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그들 대개는 개인적인 정한으로서의 그리움과 사랑에 대한 읊음이다. 또 많은 민중시들이 좀 더 나은 사회를 가꾸기 위한 연대로서 그리움과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하지만 김 시인의 시들은 그 개인성, 사회성을 넘어 우주적으로 확산되는 그리움과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여기에 김 시인의 시대에 함몰되지 않은 초월정신, 즉 유한성에 대한 극복의지가 육화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움과 사랑의 고리 말이다.

김 시인은 그의 대표시 「바람 고리」에 대해 이렇게 글로 쓴 적이 있다.
“나는 근래에 와서 바람에 집착하고 있다. 바람은 고요함을 깨뜨리는 행위이며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몸짓이다. 살아오면서 선인들이 지적하고 추구해온 생의 유한성에 대한 아픔에 나 역시 절감하는 계기가 여러 번 있었다. 이런 공감대가 나에게 시를 쓰게 하고 내 생의 흐름에도 적잖이 영향을 미치는 걸 느낀다. 거친 바람이건 조용히 나부끼는 흔들림이건 나에게 펜을 들게 하는 바람이라는 실체가 『우수의 바람』이라는 시집 한 권을 상재하게 하였다.
 
그중 한 편이 「바람 고리」이다. 이 시는 생명의 존귀함과 삶의 몸짓을 생각하면서 쓴 작품이다. 떠나는 건 슬픔이기에 무언가 잡고 놓아주지 않으려는 심정적 절규가 있다. 그러나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여기에서 우리의 생명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하는 보이지 않는 고리를 느낀다. 그건 불교의 윤회설이라든가 기독교의 부활정신과도 연관이 될 수 있고 우리의 가슴에 꺼지지 않는 불꽃같은 것, 혹은 울리고 되울리는 바람의 진정성과도 같은 것이다. 나는 이 시를 쓰고 나서 울었다. 사랑하는 사람들, 헤어지고 싶지 않았던 사람들에 대한 마음의 공양 같은 눈물이 흘렀다. 시인은 생을 피동적으로만 살기에는 너무 뜨거운 가슴을 가진 족속이다. 그리고 시라는 문학 형태는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감각적이고 정열적이며 가장 깊은 세계를 추구하는 고차원적이고도 영원성을 지닌 것이라 할 때 나의 심정에 부딪쳐 오는 감성의 한 가닥을 시로 쓰는 작업은 매우 무겁고도 비장할 필요를 느낀다.”

여기에서 김 시인이 토로한 ‘무겁고도 비장해야 하는’ 이유는 시작(詩作)을 넘어 절대자의 자리를 넘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건 신에의 도전이 아니라 스스로 과제를 짊어지는 행위이다. 그 과제는 풀 수 없는 문제여서 고통일 수밖에 없지만 누구나 짊어지고 싶어 하는 고통이다. 그 존재론적 고통에 들어 있는 감동의 씨를 틔우기 위해서이다. 그 씨를 틔우는 것은 신이 될 수 없는 인간의 마지막 몸부림인 셈이다. 헛된 망상이 아니다. 과욕도 아니다. 의무항(義務項)도 아니다. 유한성에 도전하는 외롭고 고달픈 몸부림보다 더 가치 있는 수고가 어디에 있겠는가.

필자는 위에서 ‘내용’과 ‘형식’에 대해 거론한 바 있다. 하지만 그 두 낱말이 배타적일 수밖에 없는 문예창작에만 국한시켰으므로 이번에는 상보적인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내용의 이미지가 정신, 정태, 형이상학 등이라면 형식의 이미지는 육체, 동태, 형이하학 등을 담지한다. 필자가 이처럼 자의적으로 내용과 형식의 이미지를 분식한 것은 대척관계의 두 관계항이 변증법적으로 지양해나갈 합(合)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이다.


▲     © 독서신문
간단하다. 그 이상적인 합은 바로 휴머니즘이다. 그런데 휴머니즘은 언어적 정의만으로는 존재할 수 없는(국어사전에 등재될 수 없는) 특이한 낱말이다. 내용의 영역인 정의(定義)와 형식의 영역인 실천(實踐)이 조화를 이뤄야 낱말로 성립된다는 말이다. 정의가 정신이라면 실천은 육체이다. 휴머니즘은 관념이 아니고 생동하는 사물이다. 그 온전한 생명체인 휴머니즘이 바로 나무이며, 그래서 휴머니즘은 나무의 본성인 영원성과 아름다운 미성(美性)을 지닌다.
 
우리가 나무 곁에 머물고 싶어하는 것은 휴지(休止)의 여가를 즐기기 위해서라기보다 휴머니즘의 영원하고 아름다운 이상세계에 취해보고 싶어서이다. 김 시인의 곁에 머물고 싶어 하는 것도 그와 유사하다. 그가 바로 나무이기 때문이다. 바람 고리의 실체와도 같은 나무 말이다.
 
                                           글 /  김용만 (한성디지털대 문창과 교수·소설가)
  
김   후   란

■ 학력 및 경력
1955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수학
     한국일보 기자, 부산일보 논설위원
1959 국제 펜클럽 한국본부 부회장
     문인협회 이사·한국시인협회이사
1985 한국여성개발원 원장
1988 최은희 여기자상 심사위원장(현)
1998 한국여성문학인회 회장, 고문(현)
     생명의 숲 국민운동 이사장(현)
2001 자연을 사랑하는 「문학의 집·서울」이사장(현)
2003 성숙한 사회 가꾸기 모임 공동대표(현)
■ 수상
1968 현대 문학상
1977 월탄문학상
1995 서울시 문화상
1997 국민훈장 모란장
■ 저서
· 시집 「장도와 장미」
· 「서울의 새벽」
· 「우수의 바람」
· 「세종대왕」 등 다수
 
읽고 생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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