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과정에서 에로스는 절대선(善)을 영원히 소유하려는 차원 높은 충동적 생명력이 된다. 생성되어 존재하다 사라져 가는 것들은 그 본성의 속성에 따라 영원불멸하기를 원한다. 이는 종족 보존을 위한 새로운 생명 탄생과 죽음을 통해 나타난다. 때문에 에로스 참 뜻은 단 하나의 아름다운 육체를 소유하고자 하는 사랑을 통해 모든 육체에 대한 아름다움, 내면의 아름다움, 직업이나 제도에 대한 아름다움, 교육, 예술, 철학에 대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되어 마침내 아름다움 그 자체인 이데아세계를 알게 되는 것에 있다고 플라톤은 봤다.
자리를 보고 눕는 일은/ 세상의 중심을 찾는 것/ 작은 화단의 토마토가/ 하늘 닫는 바람소리에 석양빛/ 닮아가고/ 고요한 달빛이 터를 파고/ 둥근 집 짓는 것은 흔적 지우는 일은 이해되어야 한다.
사랑이라는 것, 즉 에로스는 언젠가 하나였으나 어느 순간 잃어버린 반쪽, 온전했으나 어느 순간 사라져버린 한 몸의 기억을 찾으려는 욕망이다. 그러나 상실된 나머지가 찾아졌지만 가치 있는 하나 됨이 아니라면 불쾌하게 생각하며 행복이 아니라 불행하고 그 삶은 내내 악몽이 된다. 이때 우리는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보게 된다. 이가 썩어 극심한 고통을 준다면 우리는 그 이를 미련 없이 뽑아버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반쪽 찾기는 단순히 하나 됨을 회복시키는 것이 아니라 낯설지 않아 좋은 것으로 상실된 반쪽의 되찾음이다. 이미 익숙하여 알고 있는 것에 대한 되찾음은 중요한 가치와 의미가 있는 이유이다.
작은 곳에서 시작하여/ 먼 길 돌아 고요함 찾는/ 허둥거리며 찾은 몸 쉴 곳은/ 낮은 바닥/ 몸을 누이기 전 배고픔 밀려오고/ 있는 곳을 알 수 없는 어지러움 속에서/ 이 분 냄새는 누구 것인지 뒤척인/ 새벽 세시/ 개밥바라기 앞세워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제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달빛 기우는 밤
반쪽 혹은 하나 됨을 되찾기 위한 욕망이 작동되는 의지가 선한 것을 되찾기 위한 욕망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가치 있는 의미는 상실되고 말기에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최첨단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선이 상실된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욕망이 진실 되게 살아나기 위해서는 근원적 결핍은 선이 되어야 한다. 하지만 물질만능 앞에 인간성은 무참히 무너지고 말았다. 진정한 욕망의 대상은 착하게 살기이다. 에로스는 착하게 사는 일을 영원히 이어가려는 욕망이다. 그런데 우리는 착하게 사는 삶을 포기하고 말았다.
당신의 무게가 큰 그래서 끊어지지 않게/ 질기게 묶었던 닻 내린 밧줄 따라 흩어진/ 사랑했던 시간 찾아 나선 두 물 머리/ 문득보인 백년회관 이름이 좋아/ 그렇게 백 년 동안 살다가/ 천년 후에 섬광처럼 찾아와/ 사라져간 붉고 노란 꽃잎 함께/ 억새 흔들리는 강가를/ 손잡고 걸어보는 일 (-강물처럼 전문)
“백년회관 이름이 좋아/ 그렇게 백 년 동안 살다가/ 천년 후에 섬광처럼 찾아”올 수밖에 없는 것은 착하게 사는 삶을 변하지 않게 하고, 또 그것을 가지고 싶어 “억새 흔들리는 강가를/ 손잡고 걸어보는 일”을 상상하는 것은 불멸성을 획득하려는 욕망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 실재(reality)속에서 끊임없이 결핍을 생산하고 있다. 착하게 살아가기 위한 욕망의 실재로 에로스를 찾는 것은 욕심에 불과한 것일까.
-편집위원 검돌(儉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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