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정의가 충돌할 때 -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베른하르트 슐링크 著)
인간의 존엄성과 사회적 정의가 충돌할 때 -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베른하르트 슐링크 著)
  • 독서신문
  • 승인 2013.04.15 1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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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는 안 나오는 원작 이야기 <1>

[독서신문] 미국에 이런 농담이 있다고 한다. “이번에 누가 새 책을 냈다고 하더라.” “영화는 언제 나온대?”

책을 읽을 시간이 없는 현대인들이, 책 대신에 영화만 보고 내용을 알았다고 자위하는 것을 비꼰 농담이다. 농담이라고는 하지만, 살짝 찔리는 마음이 없지도 않다.

그러나 또한 많이들 알 것이다. 영화로는 도무지 표현할 수가 없는 책 속의 그 풍부한 내용들이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던 주인공의 세심한 심리묘사나 주변 정황을 통한 사건의 이해가 영화로는 도저히 풀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원전의 힘을 그대로 드러낸 영화는 현실적으로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

1995년 발간된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소설 『더 리더 - 책 읽어주는 남자』는 2008년 스티븐 달드리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다. 앞서 말한 이유로 이 영화도 소설의 힘을 온전히 따라가지는 못하지만, 그나마 원전의 힘을 잘 표현해낸 수작이다. 달드리 감독은 “책을 읽고 믿을 수 없이 복잡한 도덕적 미로에 매혹되었다. 반드시 내가 영화화하기로 결심했다”고 하는데, 그 순수한 열정이 수작을 낳는 힘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만 보다보면 자칫 이 소설의 주제를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여인의 죄책감’이나 ‘여인과의 섹스를 통한 한 소년의 성장기’ 정도로만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막상 이 소설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점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아닐까?

헤겔은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물욕, 성욕 등과 함께 다른 감정들보다 앞선다”고 주장한다. 헤겔은 여기에 기초해 최초의 권력이 생기는 과정, 그 과정과 변증법이 합쳐져서 역사가 발전해가는 것을 밝혔다. 쉽게 얘기해서 ‘자존심이 인간의 역사를 만들어왔다’고 헤겔은 파악했다.

물론 헤겔만 이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다. 플라톤은 패기에 대해 말했고, 마키아벨리는 영광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심, 홉스는 인간의 교만과 허영, 루소는 자존심에 대해 말했다. 다만 그 사고의 기반에 있어 자존심이 차지하는 비중은 헤겔의 그것에 미치지 못한다.
 
“명예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한나는 글을 읽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의 자존심은 이를 남들에게 알릴 수가 없다. 그것은 그녀의 존재를 뒤흔드는 것이기에, 그녀는 승진할 기회조차 사양한다.

큰 정치적 지향점이 있지는 않았지만, 한나는 나치 치하 독일 회사인 지멘스에 취직한 후 홀로코스트에 동원된다. 이후 그야말로 ‘아무런 생각 없이’ 한나는 죽을 소년들을 골라 가스실에 하나씩 하나씩 보낸다.

이후 전범 재판에서 한나의 동료들은 한나를 주동자로 지목한다. 한나는 처음에 이를 부정한다. 하지만 논란이 되는 ‘보고서’가 한나의 필체인지 알아보려는 재판부의 요구가 있자, 결국 보고서는 자신이 쓴 것이라고 말해버린다.

자유에 대한 속박조차 흔쾌히 받아들일 정도로 그녀가 가진 부끄러움은 큰 것이었다. 일말의 자존심인데, 이러한 한나의 입장은 남들로서는 실로 이해가 안 가는 선택일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로 자신의 존엄성이 상처받는 것을 극도로 두려워해서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는 인간은 꽤 있다. 가까운 예로 고 노무현 대통령 역시 금품 수수 논란에 휩싸인 형국에서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고자 자살을 선택했다고 생각된다. 장자연 역시 심각하게 훼손된 스스로의 존엄성에 비관해 죽음을 택했고, 솔제니친은 정치적 양심을 택해 스탈린에게 구금을 당했다.

만약 “글 못 읽는 게 뭐가 그리 부끄러워서”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문제의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어떤 이의 명예는 허울뿐일 수도, 사상 때문일 수도, 경제적 부에 기초하고 있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당사자의 명예를 구성하는 부품들은 그 당사자 스스로가 선택하는 것이다. 한나의 경우, 그것은 ‘글을 읽을 줄 아는 척’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그녀는 기꺼이 전범이 되고 만다.
 
사회와 개인이 충돌하는 경우

전범 당시 훌쩍 커버린 주인공 미하엘 역시 딜레마에 처한다. 법학도로써 우연히 한나의 재판을 참관하고 나서야 그는 ‘한나가 글을 읽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과연 한나를 위해 진실을 밝히는 것이 옳은가?”라는 고민에 빠진다.

마이클에게 있어 올바른 판결은 한나가 주모자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정의와 한나의 명예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처지가 되고서는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된다. 사회와 개인의 문제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떤 길을 택하느냐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잘못된 법 집행이 이뤄지는 것을 간과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개인이 소중하게 지켜온 명예를 훼손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도 생기는 것이다. 판단의 기준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자유기고가 홍훈표
·연세대에서 경제학 전공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정기연주회 단막뮤지컬 <버무려라 라디오> 극본 집필
·지촌 이진순 선집 편찬요원
·철학우화집 『동그라미씨의 말풍선』 출간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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