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의 소설이 만들어내는 정갈한 분위기는 극적인 사건을 이면에 감춘 채 고요하고 담담하게 그려지는 일상의 풍경에서 비롯된다.
첫 작품 「파종」에서 주인공의 가족들은 각자의 상처 때문에 서로에게 깊이 상처를 입히며 지내 왔다. 하지만 주인공과 아버지가 팔을 다친 동생의 살림을 거들게 되면서, 가족들은 일상을 함께하며 서로 마주하기 시작한다. 소설은 뜨거운 고통의 시간을 되새기기보다 그 이후의 일상을 담담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일관한다. 비로소 감지되는 생의 기운은 절실하고 진실하다.
「학습의 生」에서 생의 의지는 더욱 팽팽하게 드러난다. 이혼 후 만성적인 면역질환을 치료하기 위해 시골에 외딴집을 얻은, 은퇴한 윤리교사에게 한 소년이 나타난다. 주인공은 아버지의 폭력으로 투포환 선수의 꿈을 접었다는 소년에게 집 마당을 빌려주며 마음을 열어가지만, 동네 사람들의 수군거림과 소년의 도둑질이 의심되는 상황이 생기면서 두 사람의 관계에 위기가 찾아온다. 하지만 소설의 말미에 마당에서 소년의 쇠공 소리가 들려온다. ‘생의 울림’ 같은 것이다.
이 감각은 표제작인 「일요일의 철학」에도 잘 드러나 있다. 이 단편의 마지막 장면이 그렇다. 낯선 곳에서의 체류를 선택했지만 여전히 삶에 대한 불안을 떨치지 못하는 주인공은 맹인 학생, 술집 바텐더 등과 교류를 나누고, 인라인스케이트를 더듬더듬 연습하며 하루를 보낸다. 그리고 그곳을 떠날 날을 앞둔 어느 날, 주인공은 곧게 뻗은 내리막길에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조심스레 미끄러지듯 발을 내딛는다.
이처럼 이번 소설집은 간결해진 서사, 기억의 응축된 상징들이 돋보인다. 또 돌발적이고도 우연한 시적 이미지들을 자주 드러냈던 저자의 이전 작품들과는 달리, 최근 들어 유지되고 있는 가지런한 서사의 배열과 공간의 섬세한 조형을 따르고 있다. 가족을 혈연 공동체의 테두리 대신 고독한 개별자의 세계로 바라보는 성숙한 시선 역시 돋보인다.
■ 일요일의 철학
조경란 지음 | 창비 펴냄 | 276쪽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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