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살에 대한 생각 극복
자살에 대한 생각 극복
  • 황인술
  • 승인 2013.02.13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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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생 와이드 철학논술
▲ 황인술 논설위원     © 독서신문
[독서신문] Ⅰ. 생각해보기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 1858~1917)

  에밀 뒤르켐의『자살론(Le Suicide, 1897)』은 사회학 고전에 속하는 책이다. 사회마다 국가마다 자살 통계를 살펴보면 사망률처럼 일관된 규칙이 나타난다는 것을 저자는 여러 도표를 통해 먼저 밝힌다. 그리고 그 규칙은 단순히 자살자 총합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관계에서 파생되는 하나의 현상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자살은 개개인 개별적인 일이 아니라 사회학이라는 돋보기를 통해 분석할 수 있는 학문 대상으로 전환된다. 뒤르켐은 이런 자살의 비사회적 요인에 대해 살펴본다.
  모든 자살은 곧 정신병이라는 주장을 분석하는데 여기서 광란이나 우울증, 그리고 강박과 충동적인 자살의 유형이 나온다. 다음으로 인종과 유전이 자살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논의가 나온다. 또 유전의 경우에도 그것이 많은 사례가 보고되고 있지만 그러나 왜 즉시 유전적 형질이 발현되지 않는가 하고 의심스럽게 되묻고 있다. 이는 자살이 아동에서보다는 성년 이후에 꾸준히 증가하는 점을 들어 반론을 제기하는 것이었다. 비사회적인 요인의 마지막 고찰로 우주적인 요인과 모방까지 저자는 꼼꼼하게 짚어낸다. 자살과 위도에 대한 관계가 제시되는데 위도 47~57도 부분에서 유난히 자살률이 높다는 가설을 비롯해서 계절 중에는 봄과 여름에, 또 밤보다는 낮에 그 수치가 높다는 현상이 설명된다.
▲ 에밀 뒤르켐     
  그 보다는 자살이 사회적 요인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사회적 활동이 강화되는 시기, 즉 봄과 여름 그리고 밤보다는 낮에 자살도 증가됨을 암시하여 다음에 있을 논의의 단서를 제시한다. 모방의 경우, 흔히 자살을 모방하는 사례가 목격되는데 그럴 경우, 강력한 진원지가 있어서 주위로 자살의 전염이 이뤄져야한다는 논리를 설정한다. 그렇지만 지리적인 분포를 분석했을 때 자살이 특정한 중심으로부터 밖으로 점차 약하게 방사하는 형태의 동심원을 그리며 분포하기 보다는 중심을 갖지 않고 대체적으로 동질적인 집단을 형성하며 분포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므로 자살의 전염성을 인정하긴 하지만 사회적인 자살률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자살을 확산시키는 요소는 아니라고 분석했다. 흔히 자살의 원인이라고 생각했던 비사회적요인을 이렇게 조목조목 따져서 그것이 전체자살률에 그다지 큰 영향을 끼치지 않음을 확인한 저자는 독창성이 돋보이는 사회적 요인을 본격적으로 분석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살을 ①이기적인 자살, ②이타적인 자살 ③아노미성 자살로 분류를 하고 있다.

Ⅱ. 생각 확대하기
  2011년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2011년 한 해 자살자 수가 15,906명, 1일 평균 43.6명, 33분에 1명꼴로 자살하고 있다. 자살률(인구 10만 명당)은 31.7명으로 우리나라 자살률은 OECD 국가 중 1위로 자살은 개인 문제가 아니라 심각한 사회·국가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이에 대해 심각성을 깨달은 정부는 2011년 3월 ‘자살예방 및 생명존중 문화조성을 위한 법률’을 제정·공포하기에 이르며, 2012년 3월에는 보건복지부 시행령에 의해 자살에 대한 ‘전문 조사 연구 기관’ 이 지정되고, 본격적으로 기관과 단체에서 정신건강 선별검사 및 상담·치료를 실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자살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절망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살에 대한 인식 변화이다. 진정한 삶의 의미가 무엇인지 탐구해가면서 ‘절망을 희망으로’ 전환하여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올바른 신념과 가치관의 내재화가 꼭 필요한 시점이다.

1. 자살 (自殺, suicide)
  자살 어원은 라틴어 sui(자기 자신을)와 cædo(죽이다) 합성어이다. 자살은 자발적 또는 의도적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행위로 자살행위는 치명적인 자살과 비치명적인 자살(자살미수)로 구분한다. 자살이라는 행위는 오래전부터 있어왔으며, 이 행위에 대해 비난하는 사회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찬양하는 사회도 있었다. 이슬람교·유대교·그리스도교 사회에서는 자살은 죄악으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 더 나아가 자살을 시도만 해도 법으로 처벌하는 나라도 있다. 인도의 경우는 승려계급은 자살에 관대해 왔다. 일본은 할복자살 풍습을 하나의 의식처럼 행했던 시기가 있었다. 귀족들은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응징하기 위한 방법으로, 실패로 인한 수모를 면하기 위해서, 적을 모욕하거나 자신의 군주나 황제가 죽었을 때 충성을 보이기 위해 행해지기도 했다. 자살을 막기 위해 중세 이후 교회법으로 그 후에는 형법으로 자살을 금지 시켜왔다. 근대국가 이후 많은 국가는 타인의 자살을 돕는 행위를 법으로 금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법적 제재는 자살률 감소를 막지 못했다.

2. 자살에 대한 입장

 
3. 자살 분류
1) 이기적 자살
  가족 구성원 관계가 친밀할수록 자살률은 떨어진다. 정치사회 경우도 혁명이나 전쟁 등 위기 상황이 일어났을 때 오히려 자살률이 떨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것은 위기에 빠지면 사람들은 서로 더욱 가까워져 친밀감이 높아지기 때문이라고 분석 했다. 결국 뒤르켐은 이기적인 자살을 사회가 가지고 있는 집합적인 힘, 통합의 수위가 약화되면 개인은 사회로부터 유리되면서 친밀도가 낮아져 일어나는 유형의 자살로 이기적 자살을 보았다. 때문에 신병비관이나 가정불화 혹은 삶에 대한 혐오로 일어나는 다양한 자살은 단지 ‘우발적인 사건’에 불과하고 그 바탕에는 사회가 자살할 수 있도록 만든 환경의 희생양이라고 봤다. 
2)이타적 자살
  예를 들면 죽은 남편을 쫓아 불길 속으로 몸을 던지는 인도 아녀자들 풍습을 들 수 있다. 혹은 왕이나 족장의 뒤를 따라서 그의 신하들이 목숨을 끊는 일도 이에 해당된다. 사소한 명예 때문에 할복하는 일본 무사나 경영에 대한 책임을 지고 목을 매는 일도 포함된다. 미개사회에서 자주 목격되는 이런 이타적인 자살은 사회가 강요하는 일종의 의무이기 때문에 일어난다. 이기적인 자살자가 세상에서 자기 자신 이외에는 아무것도 절실한 것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 불행해지는 반면 이타적인 자살자는 개인이 자신에게 전혀 절실하지 않기 때문에 슬퍼한다. 전자가 자신과 결부되는 아무런 목적을 발견할 수 없어 자신이 무가치하고 목적이 없는 존재로 느껴지기 때문에 삶을 마감하는 방법을 택하지만 후자는 목표를 가지고 있지만 그 목표가 삶의 외계에 존재하므로 자신의 삶이 장애로 여겨지지 않기 때문에 삶을 버린다.
3)아노미(프 anomie)성 자살
  심리적으로 불안·자기 상실감·무력감 등에서 볼 수 있는, 적응하지 못하는 현상으로 욕망에 대한 규제가 가장 필요한 상황에서 공통의 가치나 도덕 기준을 잃은 혼돈 상태로 일종의 무규율 상태, 즉 아노미 증가로 발생한다. 흔히 불황기에 자살률이 높아지는 경향이 있는데 그러나 그와 반대로 경제적 번영의 시기에도 자살이 늘어나는 현상이 나타난다.

 
Ⅲ. 생각정리하기
1. 자살 원인
  자살은 설명될 수 없는 매우 복잡한 현상이다. 자살에 대한 원인은 개인의 기질과 정서 그리고 사회·환경적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나타난다. 또한 자살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위이기 때문에 동물실험을 통해 그 원인을 알 수도 없으며, 자살 사고가 발생하기 전에는 그 누구도 쉽게 예측할 수 없고, 또 이미 고인이 된 사망자로부터 확인을 할 수도 없기 때문에 그 원인을 명확하게 파악하기가 힘들다. 가까운 친·인척이나 주변사람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사인을 알아내는 심리적 부검과, 신체적 부검이나 뇌를 조사하여 내부 화학적, 해부학적 특징을 살펴보고 있는 정도가 전부이다. 자살은 생물학적 원인, 심리학적 원인, 사회학적 원인이 있다.

1) 생물학적 원인
  생물학적 측면에서 우울증, 정신 분열증, 알코올 중독 등에 취약한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더 자살의 위험성이 크다. 우울장애 환자나 자살 시도자에게서 보이는 공통적인 생물학적 특징은 주로 세로토닌과 연관이 있다. 세로토닌은 우울장애 환자에게 항우울제 효과로 직접적인 영향이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자살 위험을 높이는 공격성과 충동성과도 상관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고 있다.
2) 심리학적 원인
  심리학적 측면에서 자살자 70∼80%가 정신질환 증상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우울증과 같은 기분장애와 품행장애, 반사회성 장애도 자살과 연관 있다. 장년층의 경우는 우울증적 기분장애 증상을 많이 보이며, 품행장애와 반사회성장애는 청소년과 청년기 자살자에게 많이 나타난다.
  프로이트는 “사랑하는 대상 상실로 인해 생기는 견딜 수 없는 고통과 분노로 말미암아 사랑하는 대상을 계속 유지하고자 그와 동일시하게 되고, 그 결과 내재화된 사랑의 대상에 대한 강렬한 공격성이 결국 그를 자살로 이끌게 된다”는 가설을 자살의 심리적 요인으로 제시하였다.
  가장 최근에 이루어진 한 국내 자살 관련 연구에서는 심리적 극통을 자살사고의 예측변인으로 설정하고 그 영향력을 확인했다. Schneidman(1993)은 심리적 극통을 ‘내성으로(introspectively) 느끼는 견딜 수 없는 심리적 고통’으로 정의하였고, 중요한 심리적 욕구(인정, 사랑, 소속, 성취, 자율성 등)가 좌절될 때 발생 한다고 보았다. 그는 심리적 극통이 자살에 대한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하였다.
3) 사회학적 원인
  사회적 측면에서 자살 요인은 뒤르켐의 사회학적 이론에 나타난 바와 같이 행위자와 사회의 관계에서 그 원인을 찾아볼 수 있다. 뒤르켐은 사회정세의 변화라든가 사회 환경의 차이 또는 도덕적 통제의 결여 등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규범적 규제력이 약해질 때, 과도한 개인화를 보이며 사회유대가 약화되고 자신의 욕망에만 집착할 때, 또는 과도한 집단화를 보일 경우, 즉 사회적 의무감이 지나쳐 집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여서라도 집단을 존속시키려 할 때, 그리고 사회의 외적인 권위에 의하여, 즉 과도한 규제력으로부터 발생한다고 보았다(Durkheim, 1966).
 
2. 자살에 대한 생각 극복
1) 내적통제성과 자아탄력성
  자살의 극복요인으로 유대감과 문제-해결 자신감, 내적 통제성 요인이 있다. 내적통제성은 개인적인 신념과 관계되고 개인의 성공을 결정하는 요인을 말한다. 삶에 대한 태도, 자아관, 인생관, 미신에 대한 태도, 사건에 대한 대처, 성취에 대한 태도 및 노력과 관련될 수 있으므로 개인의 사회적 행동을 이해하고 예상하는데 매우 중요한 개념이다. 또한 좋지 않은 환경에도 불구하고 행동·정서적 문제를 보이지 않고 건강하게 잘 적응해가는 청소년이 있다는 점에서 개인의 내적 적응적 요소들도 개인의 스트레스와 부적응적 문제들에 대해 중재 역할을 한다는 주장이 제기 되고 있으며, 그 중 자아탄력성은 비교적 다른 심리사회적 변인에 비하여 스스로 통제 가능한 요소로 어려운 환경에서 부적응을 방지하고 문제해결대처의 효율성을 증가시키며 역경이나 위험한 상황의 영향을 완충한다.
2) 자아존중감과 자기 효능감
  자기효능감은 특정한 문제를 자신의 능력으로 성공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자기 자신에 대한 신념이나 기대감이다. 높은 자기효능감은 과제에 대한 집중과 지속성을 통하여 성취 수준을 높일 수 있다. 그 결과 긍정적인 자아상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된다. 자기효능감이 높을 경우 부모-자녀 유대관계가 자살사고에 미치는 영향력을 더 낮춘다. 자기효능감은 기능적인 자아상을 반영하고 있어 심리적 적응의 지표로도 볼 수 있으며, 자기효능감이 높은 개인은 생활에서 만족도가 높다. 이렇게 볼 때 청소년의 자기효능감이 자살의 보호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다.
3) 사회적 지지
  지지자가 있는 경우는 지지자가 없는 경우보다 자살생각을 가질 확률이 낮다. 특히 부모의 지지가 자살생각을 감소시키고, 부모와의 애착수준이 높을수록 우울 수준 및 자살생각이 감소한다.
4) 종교와 신념
  신앙은 삶에 대한 의미와 희망을 주며, 삶에 대한 고통을 견뎌낼 수 있는 힘을 줄 뿐만 아니라, 신앙적 공동체의 사회적 지지가 자살로부터 인명을 보호하고 시련을 극복해낼 수 있는 힘이 된다. 특히 자살시도를 하지 않거나 혹은 자살생각을 가지고 있지만 살아야 할 이유에 많은 비중을 두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삶의 의미를 중요시 하고 삶에 대한 통제감이 높고 긍정적이거나 낙관주의적 관점을 지닌다.

3. 소크라테스 ‘경건함’ 개념으로 자살 극복하기
  소크라테스 대화법은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제시하여 대화상대자가 가지고 있는 ‘그것’에 대한 의미규정을 파악하면서 대화를 시작한다. 이는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원칙이나 원리(logos)에 근거한 근본적인 앎(epistēmē)을 얻는 것이다. 앎이 곧 덕(aretē)이고 알고 있다면 누구나 참되고 선하고 아름답게 살 수 있다. 즉, 거짓되고 위선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무지(無知)에서 비롯된 것으로 우리는 끊임없이 앎을 얻고자 노력해야하며 다른 사람들의 무지(無知)를 깨우쳐주는 것은 신에 대한 봉사이고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근본적인 앎이란 모든 사물에는 본래 기능(ergon)이 있으며 그 기능이 능력을 최고로 발휘하는 것이 ‘탁월성=덕(aretē)’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러한 탁월성은 ‘앎’을 통해서 실현된다고 보았으며, 모든 사물과 마찬가지로 사람에게도 제 기능이 있으므로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 기능에 대한 앎과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 앎이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또한 “너 자신을 알라!”는 자신의 기능에 대한 앎과 그것을 발휘할 수 있는 앎을 지녀야 한다는 의미이다. 소크라테스는 사람은 영혼의 활동에 의해 자신이 드러나며, 동물과 달리 인간의 영혼에는 그 특유의 기능인 이성(logos)이라는 것이 있고, 이 이성이 제 기능을 발휘할 때 사람은 자기 자신이 된다고 보았다. 삶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가치 판단과 불합리한 사고들을 스스로 깨닫고 파기할 수 있도록 도우며, 자신의 이성이 최고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근본적인 ‘앎’을 생산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이성이라고 봤다.

 소크라테스의 『에우티프론』
  『에우티프론』은 플라톤 초기 대화편으로, 저술 시기는 기원전 399년 이후이다. 소크라테스 재판을 앞두고, 자신이 경건함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에우티프론과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나눈다는 내용이다. 이 책의 주제는 ‘경건함’에 대한 것이다.
  기원전 399년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숭배하는 신들을 숭배하지 않는 대신 새롭고도 기이한 종교 의식을 소개한 죄, 젊은이들을 타락시킨 죄”로 기소되었다. 소크라테스는 법정에 출두하는 순간에도 진리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으며, 『에우티프론』에서 경건함의 본질에 대해 묻는 것은 에우티프론 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를 기소한 사람들 모두가 경건함에 대해 잘못 알고 있음을 논하는 것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와 에우티프론은 각자 재판을 앞두고 예비 기소로 바실레우스 아르콘 법정에 온 사람으로, 법정 근처에서 우연히 두 사람이 서로 만나면서 대화편이 전개된다.

『에우티프론』 내용
  에우티프론은 아버지를 살인죄로 고발하였다. 그의 아버지가 부리던 머슴이 아버지의 낙소스 토지에 속한 노예를 죽이자, 아버지가 그를 결박한 채 율법 해석자에게 처결을 묻고자 기다리며 제대로 돌보지 않아 죽게 놔두었기 때문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 법에 살해당한 사람의 친척만이 살인 혐의를 고소할 수 있을 정도인데, 그렇게 심각한 일로 자기 아버지를 법정에 세우는 사람의 확신에 대해 놀라움을 표한다. 에우티프론은 아무렇지 않아 하며 종교적/윤리적 문제에 대한 자신의 판단을 확신한다. '소크라테스식 비꼬기'인 엘렝코스로 그는 에우티프론이 경건함(τὸ ὅσιον )과 경건하지 않음(τὸ ἀνόσιον)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불경죄 혐의로 고발당한 터라 그는 에우티프론에게 한 수 가르쳐 줄 것을 희망하며 이는 자신의 재판에서 변호하는 데 유리할 것이라고 말한다.
  에우티프론은 소크라테스가 멜레토스와 다른 고발자들에게 고발당한 이면에는 소크라테스가 다이모니온(금지 형태로 나타나는 내적인 신(神)의 소리, 마음속으로부터 경고)에게서 여러 행동에 대해 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한 것 때문이라고 말한다. 많은 아테나이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무척 의심스러운 것이나, 소크라테스는 그리스 신들에 대한 주요 이야기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는데, 주된 토론에 들어가기 앞서 두 사람은 이 문제를 놓고 잠시 논의하였다.    소크라테스는 신들의 잔인함이나 변덕이 등장하는 그런 이야기에 대해 회의를 표한다. 그는 초기 천상의 신 우라노스가 아들 크로노스에게 거세당한 이야기를 언급하며 이런 내용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한다.
  에우티프론은 이보다 더 놀라운 이야기들도 말할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이내 신들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을 옹호하는 데 시간이나 노력을 크게 들이지 않는다. 대신 소크라테스가 에우티프론에게 '경건함'을 정의(定意)하도록 압박하면서 그의 무지에 직면하게끔 하면서 당면한 문제에 바로 접근한다. 그러나 에우티프론이 경건함을 정의할 때마다 소크라테스는 재빨리 논변에서 치명적인 결함을 찾아낸다.
  대화편이 끝날 즈음에 에우티프론은 자신의 정의가 실패했음을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가 되지만, 그는 이를 고치기보다는 가야 할 시간이라며 핑계를 대며, 소크라테스는 소크라테스식 비꼬기의 고전적인 예로서 대화편을 끝낸다. 에우티프론은 두 발로 스스로 설 수 있는 정의를 내리지 못하였으므로 그는 소크라테스에게 경건함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치지 못했으며, 그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재판에서 자기 변론을 위한 도움을 받지 못한다.

『에우티프론』에서 경건함에 대한 정의
  대화편에서 논변은 주로 ‘구분을 통한 정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에우티프론이 ‘경건함’이라는 낱말의 다른 정의를 둔 뒤 정의를 도출하도록 몰고 있다. 그가 바라는 바는 에우티프론이 소크라테스에게 “경건함이란 무엇인가”는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르치기 위한 기초로서 분명한 정의를 이용하는 것인데, 소크라테스는 이를 통해 자신의 불경죄 혐의의 변론에 이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명목상의 이유를 댄다. 소크라테스는 경건함은 보편적인 참이라는 정의를 원하는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어떤 것이 경건한지 경건하지 않은지를 판단하기 위해서 모든 행동을 계량할 수 있는 척도가 될 것이다. 또 보편성을 얻기 위해서 정의는 정의되는 것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부류, 종류, 종차의 측면에서 나타내야 함은 물론이다.
 
첫 번째 정의
  에우티프론은 경건함이란 사람을 죽이거나 성물(聖物)을 훔치는 따위를 기소하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것이 경건함의 정의가 아니라 경건함의 한두 가지 사례에 불과하다고 논박한다. 그는 자신의 물음이 그런 경건함의 사례가 아니라 경건한 것을 경건하게 해주는 특성 그 자체라고 환기시킨다.
두 번째 정의
  에우티프론은 경건함이란 신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정의한다. 소크라테스는 이 정의가 일반적인 형태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칭찬한다. 그러나 '사랑받는 것'에 대해 신들이 의견 차이가 있다는 비판을 가한다. 즉 어떤 행위를 놓고 신들이 의견 불일치로 논쟁을 벌인다면 이것은 경건한 동시에 경건하지 않은 것이 된다는 것으로 논리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 돼버린다. 에우티프론은 누군가를 부당하게 죽인 사람을 벌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할 신은 없을 것이라며 소크라테스의 비판을 반박하려 한다. 그런 정당화가 여러 가지가 있으므로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따라서 동일한 행위가 경건한 동시에 불경건할 수도 있다. 결국 에우티프론의 정의는 타당한 정의가 될 수 없게 된다.
세 번째 정의
  에우티프론은 두 번째 정의를 약간 고쳐서 소크라테스의 반론을 극복하려고 한다. “모든 신이 사랑하는 것이 경건한 것이며, 모든 신들이 싫어하는 것이 경건하지 않은 것이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경건한 것이 신의 사랑을 받는 것은 그것이 경건하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것이 신의 사랑을 받기 때문에 경건한 것인가?”라는 중요한 질문을 던져 “에우티프론의 딜레마”를 제시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전형적인 방식인 유비 또는 비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질문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고, 에우티프론으로 하여금 우리가 운반되는 것은 그것이 운반되기 때문에 “운반되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이지, 여기에 “우리가 운반된다.”고 부르는 본성적인 성질이 있기 때문은 아니라는 데 동의케 한다. 즉 운반된다는 것은 운반되는 사물의 본질적인 성질이 아니라, 운반되는 “상태”라는 것이다. 경건함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만약 “신의 사랑을 받는 것”을 정의하려면, 신의 사랑을 받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단지 사랑을 받기 때문은 아닌데, 따라서 누군가가 그것을 사랑한다는 것이 어떤 행동을 경건하게 해주지는 않는다. 여기서 사랑한다는 것은 반드시 어떤 행동이 경건하다는 인식 다음으로 나오지, 반대로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경건함은 시간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사랑받기 전에 나오는데, 에우티프론의 정의에서는 반대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에우티프론의 세 번째 정의에도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이다.
  자신의 논변이 순환 논증이 됨을 아직 깨닫지 못한 에우티프론은 이때 신은 무언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것이 경건하기 때문이라는 데 동의해버린다. 소크라테스는 모든 신이 일치하여 사랑하는 것은 단지 경건함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정의되는 성질의 일부가 아니다. 그것은 경건함의 본질, 즉 경건함 그 자체는 무엇인가를 정의하지 않았으며, 경건함의 개념을 제공하지도 않으므로 이것은 ‘경건함’의 보편적인 정의가 될 수 없다.
네 번째 정의
  논의가 후반부로 넘어가면서 소크라테스 자신이 경건함의 정의를 제안한다. 즉 “경건함은 ‘올바른 것’의 종개념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유개념과 종개념의 차이에 대해 관찰과 질문 두 가지를 통해 이 부분을 논의한다. 그러나 그가 얼마 안 되어 다시 지적하겠지만, 이것은 충분한 정의가 아닌데, 경건함은 우리가 ‘올바르다’ 또는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부르는 행위에 속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올바르다 또는 도덕적으로 선하다고 이르는 것은 경건함 말고 다른 것도 있는데 가령 용감함, 타인에 대한 보살핌 등이 바로 그것이다. 소크라테스가 묻는 것처럼, 우리가 올바르다고 이르는 여타 모든 행위들과 경건함이 구별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우리는 단지 우리가 그렇게 믿는다는 이유로 아무것이나 정의를 내릴 수 없으며, 이를 증명해야 한다.
 
에우티프론 답변
  그러자 에우티프론은 경건함이란 신에 대한 보살핌이라고 제안하는데, 소크라테스는 ‘보살핌’이란 말을 일반적인 의미에서 쓴다면 누군가 경건한 행동을 했을 때 이로써 신 가운데 누군가를 더 좋게 한다는 뜻이라고 반론을 제시하며, 여기서 신이 싫어할 ‘오만함’이라는 위험한 예를 든다. 에우티프론은 보살핌에는 ‘봉사’의 의미도 있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가 경건함의 최종 결과물이 무엇이냐고 묻자, 에우티프론은 결국 앞선 주장으로 되돌아가 ‘경건함은 모든 신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마지막 정의
  에우티프론은 경건함이란 제물을 바치거나 예배를 드리는 방식이라며 다른 정의를 내놓는다. 그는 경건함의 의미를 교환에 대한 지식 형태로 제시하는데, 즉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그에 따른 보상을 요구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교환의 지식”이란 일종의 거래술이라고 밝히며, 에우티프론을 재촉하여 인간에게서 제물을 받은 신이 무슨 혜택을 입는지 말하게끔 한다. 에우티프론은 제물이 그저 물건이 아니라, ‘명예, 존경, 호의’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그가 받아들이듯 경건함이란 엄밀히 말해 신이 사랑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논의는 결국 순환 논변으로 끝나버린다. 에우티프론은 다른 일이 있다면서 자리를 피해 버린다.
- 출처 : 위키백과
 
  이 작품에서는 끝내 경건성의 본질은 밝혀지지 않는다. 하지만 소크라테스가 각별한 관심을 가졌던 명석한 사유 도구로 ‘정의(定義)-의미규정과 명료화’를 생생하게 보여 주며 철학적 삶에 대한 그의 사고방식을 제시해 주고 있다. 우리는 이 작품을 통해 본질을 추구하는 자세를 배울 수 있다.

본질(진리)의 추구
  본질에 대한 추구는 본질을 직관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는 인간의 모든 갈등과 그에 따른 문제는 서로 다른 잣대에서 비롯되며 이러한 문제에 대한 해법은 ‘본질직관’에 의해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직관이란 안을 들여다보는 것, 직관 때문에 환원이 가능하며, ‘본질직관’이 있기까지, ‘본’을 직관하기까지, 환원이 계속됨을 의미한다.
  ‘사물은 비록 만 가지로 달라도 진리는 하나이다. 진리에는 이쪽과 저쪽에 대한 구분이 없다(퇴계 이황.’ 나에게는 허용이 되고 타인에게는 허용이 되지 않는 것은 진리라고 할 수 없다.

엘렝코스(elenchos)
  소크라테스 대화법 개념으로 고대 엘렝코스는 ‘테스트’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여신이 테스트할 때 logos를 통해 판단하기를 요구함을 말한다. BC 4C경 그리스 아테네의 광장에서 소크라테스는 끊임없이 질문하며 그의 독특한 대화방식인 ‘엘렝코스’를 통해 사람들의 무지를 깨우치고, 새롭게 발견한 앎(epistēmē)을 근거로 그들 자신의 삶을 검토할 것을 권유했다. 그는 “검토(성찰)되지 않은 삶은 인간에게 살 가치가 없다(『소크라테스의 변론』)”고 주장하며, 죽음에 이르기까지 엘렝코스를 시도했다. 엘렝코스는 논리적 측면인 논박술과 윤리적 측면인 산파술 두 가지가 있다.
  논박술은 끊임없는 질문을 통해 상대방이 자신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갖고 있는 윤리적 신념과 태도, 상대방의 삶 자체를 ‘테스트’하는 과정으로, 대화 주제에 대해 정의(의미규정과 명료화)를 내리기 위해 질문에 답하는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믿음이 일관성 없고 모순됨을 드러내 자신의 무지를 깨닫게 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무지의 지’는 결국 ‘난국(aporia)’에 빠지게 되는데, 이 난국에 의해 새롭게 자신의 삶을 검토하는 기회를 얻게 되고 보다 더 탐구적인 삶을 살도록 촉구하는 긍정적 방법이 된다.

Ⅳ. 논제 찾아보기
  소크라테스 대화법 엘렝코스는 질문하는 과정에서 논리적인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스스로 자신이 모르고 있음을 깨닫고 난국에 빠져 새로운 앎을 찾아 나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어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질문으로 윤리적인 대화를 이끌어 상대방이 스스로 근거 있는 새로운 앎을 생산해 낼 수 있도록 유도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소크라테스 대화는 오늘날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긍정성을 불어 넣어 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것이다.
  자살을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관심 있는 말 한 마디이며, 좌절과 절망에 빠져있는 영혼을 보듬을 수 있는 넓은 마음이다. 무엇보다 불안, 절망, 좌절한 영혼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자살을 생각하고 이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절망에서 희망으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고 자살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쓰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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