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유구(1764~1845년)는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다. 할아버지가 대제학이고 아버지가 이조판서인 명문거족의 집에서 태어나 자신도 대제학을 지냈다. 이 집안은 농학에 관심이 많았다. 할아버지 서명응은 농사 일이 포함된 『고사신서』를 지었고, 아버지 서호수는 『해동농서』를 썼다.
집안의 분위기에 영향받은 서유구는 농업기술과 농업경영, 농업정책에 관한 책을 많이 냈다. 『행포지』, 『금화경독기』, 『경계책』 등이 대표적이다. 순창군수 시절에는 도 단위로 농학자를 한 사람씩 임명해 지역의 농업기술을 조사 연구 보고하게 해 전국적인 농업 책을 만들자고 제안하는 등 실용 학문을 주장했다.
전라감사 시절에는 흉년을 당한 농민을 살리기 위해 흉년 들 때 식량으로 대용할 수 있는 고구마의 보급을 위해 『감저보』, 『감저신보』 등의 조선책과 일본과 중국의 농업서적을 읽고 『종저보』를 썼다.
그의 농학에 대한 열정은 『임원경제지』라는 야심작으로 이어졌다. 조선과 중국의 농업관련 서적 900여권을 참조해 저술한 책이다. 『임원경제지』에 공부와 관련된 사람의 사는 이야기도 나온다. 선비들의 취미나 여가를 다룬 이운지의 머리글에 그의 생각이 담겨있다. 서유구는 세상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말 중에는 그럴듯한 이치가 담긴 것도 있다고 한 이야기를 소개했다.
옛날에 네 명이 하느님에게 소원을 말했다. 한 명은 “정승과 판서의 높은 벼슬에 올라 호사스럽게 살고 싶다”고 했다. 하느님은 시원하게 그의 바람을 들어주었다. 다른 한 명은 “재벌로 만들어달라”고 하소연했다. 하느님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사람이 말했다. “저는 아름다운 시를 짓고, 글을 잘 써 문장으로 세상에서 존경받고 싶습니다.” 하느님은 이번에는 한참을 망설였다. 고민을 하던 하느님은 “어려운 것이지만 소원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네번째 사람이 이야기했다. “저는 이름 석자 쓸 수 있을 정도의 글 실력을 갖추었고, 먹고 살만한 재산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더 이상 구하는 소원은 없습니다. 오로지 조용한 휴양지에서 한 평생을 교양인으로 한가롭게 살고 싶습니다.” 얼굴빛이 약간 변한 하느님이 답했다. “얽히고 설혀 있는 세상에서 그처럼 편안한 삶을 누리는 것은 가당치도 않다. 그대는 함부로 그런 행복을 달라고 하지 말라. 이것 말고 다른 소원이 있으면 말하라.”
상당수 사람은 많은 노력 없이 근심 걱정 없이 사는 것을 바란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우수한 성적을 꿈꾼다. 하지만 노력없는 열매는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이 네번째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은 것은 노력을 알려주려고 함을 읽을 수 있다.
서유구가 실학자로 산 것은 작은 아버지 서형수의 영향이 컸다. 서형수는 학문 하는 이의 반성을 강조했다. 이덕무가 『유림전』을 쓰면서 서형수에게 추천사를 부탁했다. 서형수는 자신이 쓸 자격이 없다고 겸손을 보였지만 이내 조선의 선비에 대해 강한 질타를 했다.
나라에서 4백년 동안 선비에게 각종 혜택을 주면서 우대했지만 실제 선비는 없다고 한 것이다. 조선의 선비는 옹고집의 행동과 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옛 책의 구절에만 매몰돼 현실을 모른다고 했다. 주자의 견해에 대해서 말싸움이나 하고 책을 써도 자잘한 예법에 연연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비판했다.
도학이나, 충신, 효자, 열부를 기념하는 책에는 올릴 사람이 있으나 선비다운 선비를 기록하는 『유림전』에는 적임자가 없다는 것이다. 서형수는 자신을 포함한 지식인의 역할에 대해 반성을 촉구한 셈이다.
선비들이 쓸데 없는 말로 서로 싸움을 할 때 서유구는 자신을 반성하며 농민에게 필요한 농업서적을 쓰면서 실용학문을 연구한 것이다. <끝>
/ 이상주(『공부 열광』, 『10대가 아프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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