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녀의 기억’이라 하면 흔히 예쁘거나 아련한 수채화 같은 느낌을 떠올릴 것이다. 이번 단편집도 그렇다. 하지만 시작이 분명 은은하고 아기자기했다면, 마무리는 서늘하기 그지없다. 순수하지만 잔혹함이 느껴지기에 ‘미스터리 단편집’이라는 설명이 제격이다.
처음에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감을 잡기 쉽지 않을 정도로 산만하지만, 이내 저자의 흡입력 있는 문체 덕에 이야기 속에 빠져든다. 모든 단편의 길이가 끊어 읽지 않고 한 숨에 읽을 수 있을 정도로 간결하다는 점도 이 책의 매력이다.
표제작인 「수박 향기」는 수박을 먹을 때마다 떠오르는 ‘가출의 기억’을 반추한다. 아기를 가진 부모님의 손을 덜어 드리기 위해 숙모네로 떠난 ‘나’는 금세 집과 가족이 그리워진다. 결국 서랍장 제일 왼쪽 서랍에서 돈을 훔쳐 집을 뛰쳐나오고, 이리저리 헤맨 끝에 강 건너에서 조그만 불빛을 발견한다.
자그마한 그 집에는 소박한 아줌마 한 명과 아들 두 명이 살고 있다. 두 아들은 윗몸을 공유하고 있었다. 어깨에서 허리까지는 들러붙어 있고, 독립된 허리 아래에는 비슷한 바지를 입고 있는 이들은 처음엔 나를 겁내하지만 함께 수박을 먹고 장난을 치며 이내 가족 같은 분위기를 형성한다.
편안한 분위기에서 잠든 나는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하지만 아줌마도, 두 아들도 없었다. 문 밖에는 경찰 아저씨, 숙모 부부, 할머니가 서 있었다. 어떤 여자가 이 집에서 여자아이 소리가 난다며 신고를 했다고 한다. 이 집은 오래 전부터 비어 있는 집이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그 날 밤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 한 소녀가 모든 것을 초월한 듯 처연하게 이야기를 늘어놓는 서술 방식이 독특한 느낌을 준다.
이 밖에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후키코’ 씨와의 일화를 그린 「후키코 씨」, 비 오는 날 재미 삼아 달팽이를 밟아 죽이고 죄책감을 느끼는 「물의 고리」, 한여름에 남동생의 장례를 치르는 「남동생」은 모두 죽음과 긴밀한 연관이 있다. 또 주인공이 다니던 병원 근처에 살던 친구의 이야기 「하루카」, 학창시절부터 알고 지냈지만 어른이 된 후에도 알 수 없는 친구 「그림자」는 여자 아이에게 소중한 존재인 ‘친구’와 연결된다.
단편집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모두 「수박 향기」와 비슷한 패턴으로 이어진다는 점이 재미있다. 모든 이야기는 어린 소녀가 겪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던 자신만의 비밀을 아주 사소하게 지나가는 일상의 이야기처럼 엮어내 애처로워 보이기도 하고, 어린 소녀가 생각보다 아주 차가운 존재이지는 않나 하는 생각의 전환점도 안겨 준다.
■ 수박 향기
에쿠니 가오리 지음 | 김난주 옮김 | 소담출판사 펴냄 | 192쪽 | 11,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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