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는 ‘식색성야(食色性也)’, 즉 식욕과 성욕은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고유한 본성이라 했다. 먹는 문제가 중요하다는 말이다. 때문에 사람을 가리켜 인구, 식구라 한다. 모두 입구(口)가 들어가 있다. 살기 위해서는 입으로 하루 세끼를 먹기도 하지만 자유롭게 말을 하기 위해서 입은 매우 중요하다.
또한 맹자는 ‘생계수단이 든든해야 마음도 든든해진다(恒有産 恒有心 항유산 항유심)’고 했다. 백성들이 물질적으로 부족하여 살아갈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함을 말한다. 산다는 것은 생존이다. 생존은 existence다. existere는 ex_(로 부터)와 -sistere(존립하다)의 합성어로 생활(life)과는 다른 의미성을 지닌다.
너도 알지? 나는 곧 잊혀질 거야 봄은 자꾸 가래를 끓여올려 건물들은 서서히 마모되고 거리에 번지는 선인장 가시들 뱉어낸 가래처럼 꽃들은 폐허 위에서도 피어나 나는 그림자를 잃어버렸어 가위로 오린 종이인형처럼 훨훨 모래바람 속으로 날아가버렸지 먹먹한 공중으로부터 새들은 거듭 폐혈증의 울음을 전해와 서울은 잊혀진 도시야 거대한 사구들로 뒤덮여 봄도 봄이 뱉어낸 꽃들도 새들의 피울음도 기억을 잃어 조각난 유물처럼 나는 곧 잊혀질 거야 네 목소리에선 오래된 술냄새가 나는 군 야릇해 내 성기가 지금 어느 쪽을 향하고 있는지
- 김근, 「모래바람 속」 부분, 『뱀 소년의 외출』, 문학동네, 2005.
우리는 자신 스스로 가지 못하고 자신에게로 온전히 돌아오지 못한 채, 구겨지고 구겨지면서 살아가는 종이인형으로 살아가고 있다. 기껏 구겨질 뿐인 삶은 오지도 가지도, 어딘가에 속하지도 못하는 경계를 살아가는 위태한 삶으로 사막에 던져진 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서걱거리는 모래바람에 봄은 가래를 끓여 올리고, 거리에는 선인장 가시들, 폐허 위에서도 피어난 꽃들, 도시는 거대한 사구들로 뒤덮였으며 새들은 피울음을 전해온다.
이곳에서 ‘나’는 그림자를 잃(을 수밖에 없)고 모래바람 속으로 사라지며, ‘조각난 유물처럼’ 잊혀지면서 뚜렷해진다. 죽음에조차 주인이 될 수 없는 무력한 부재의 영역에서 ‘코도 입도 흩날려 몽달귀 같은’ 끔찍한 것들로 산재해 있을 뿐이다. 이는 실체 없는 자의 목소리다. 그것은 특정 상황이나 사물이 빚어내는 뉘앙스 자체로, 혼란스럽고 복합적으로 교차되기도 한다.
괴로워할 공간조차 허용하지 않는, 어디에도 없는, 어느 것으로도 모래바람 속의 ‘나’를 대체할 수도, 부를 수도 없는 ‘식색성야’(食色性也)조차 사라진 주체는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현실, 자기 보존에 대한 욕망을 과감히 포기하라고 결단을 요구하는 사회, ‘먹먹한 공중으로부터 새들은 거듭 폐혈증의 울음을 전해와 서울은 잊혀진 도시’에서 바로 사는 것이 무엇인지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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