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비해 조선은 철저한 일부일처제였다. 본처 외의 여인은 첩이었다. 아내가 아니었다. 첩의 아들은 사회활동에 제약이 많았다. 조선은 서자 차별을 개국 때부터 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심하지는 않았다. 본처에서 아들이 없었던 율곡 이이(1536~1584년)는 서자에게 제사를 잇게 했다. 이에 비해 이언적(李彦迪·1491∼1553년)은 본처에서 아들을 얻지 못하자 조카를 양자로 들였다. 이이와 이언적 시대가 서자가 엄격하게 차별되는 과도기임을 알 수 있다.
이언적은 정통 성리학자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해 형조판서, 좌찬성을 지낸 그는 을사사화 때 사림의 억울한 희생을 막으려고 하다가 강계로 유배된다. 강직한 선비였던 그는 온건한 해결책을 추구하다가 결국 유배지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그는 유배기간에 후학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구인록(求仁錄)』, 『대학장구보유(大學章句補遺)』, 『중용구경연의(中庸九經衍義)』 등을 저술했다.
기(氣)보다 이(理)를 중시하는 그의 학설은 이황(李滉)에게 계승돼 영남학파의 중요한 이론이 되고 조선 성리학의 한 특징을 이루게 된다. 귀양 가면서도 의연한 모습을 보이고, 어머니 걱정을 했던 그는 자신에 대해서도 한치의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모습은 「서경(書鏡)」이라는 시에서 엿볼 수 있다. 이언적은 책과 거울로 해석되는 이 시를 짓고 정갈한 마음을 더욱 채찍질했다. “책 읽으면서 내 마음 바로 잡고, 거울 보면서 내 모습 바로 잡는다. 책과 거울이 항상 앞에 있으니 잠시도 바른 길에서 멀어질 수 있는 없다네.”
이언적은 마음을 더 채근하기 위해 지표로 삼은 다섯 가지 글을 적는다. 하늘의 진리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마음을 크게 키우고, 몸을 반듯하게 다루고, 잘못된 행동을 바르게 하고, 진실된 뜻을 더욱 돈독하게 한다는 내용이다.
그의 이같은 자세는 평생 동안 계속됐다. 강계 유배 시절에도 책상에 경계의 글을 써놓고 행동을 바르게 했다. “나는 하루 세 번 내 몸을 반성한다. 하늘을 향해 부족한 것이 없는가를 생각한다. 임금과 어버이를 위하여 정성이 모자라지 않는가를 고민한다. 마음이 바르지 못하지는 않았는가를 살펴본다.”
이언적은 가족들이 지켜야 할 계율도 수시로 말했다. 이언적은 아들이 둘이다. 본처에게서 아들을 두지 못한 그는 사촌의 아들인 이응인(李應仁)을 양자를 삼았다. 그런데 소실과의 사이에 난 아들 이전인(李全仁)이 있었다. 당시 서자는 적자의 1/7의 재산을 받았다. 그러나 이언적은 조상의 대를 잇는 작업은 양자를 들이고, 핏줄인 서자에게도 아버지로서의 정성을 다한다. 서자의 경제적 자립을 위해 여러 명목으로 재산의 절반을 남겨주었고, 글을 힘써 가르쳤다.
서자임에도 제대로 된 가르침을 받은 이전인은 학문이 깊었다. 이전인은 아버지가 죽기 전에 작성한, 임금의 학문에 필요한 진덕수업(進德修業)의 8가지 조목을 임금에게 올리는 등 이언적의 학문과 행적을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힘을 다하였다. 이전인은 아버지를 추모하기 위해 벼루 옥관자 옥인 등 많은 유품을 잘 보관했다.
또 그의 아들인 이준(李浚)은 할아버지의 문집 서문을 받아 출간하고, 많은 토지를 헌납해 할아버지를 제향하는 옥산서원(玉山書院)을 건립했다. 이전인의 후손은 훗날 서자 차별금지 운동의 주역이 된다. 이언적이 거울을 보면서 마음을 잡았듯이, 후손들은 사회 모순을 바로잡으려고 노력한 것이다.
/ 이상주(『공부 열광』, 『10대가 아프다』, 『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 『왕의 영혼, 조선의 비밀을 말하다』 저자)
저작권자 © 독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