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친구
술친구
  • 한명숙
  • 승인 2007.07.20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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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수필가
시간은 자정을 지났지만 남편의 발자국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퇴근 무렵, 조금 늦는다며 저녁은 집에서 먹을 거라더니 몇 시간째 연락이 없다. 남편을 기다리다 저녁이 늦은 아이들은 배고프다는 말보다 아빠 걱정을 먼저 했다. 어디쯤 오고 있을까, 술자리가 있는 날이면 늘 걱정이 앞선다.

  오래 전 남편이 회식이 있는 날이면 남편은 내 속은 까맣게 타들어갔다. 자정을 넘기는 일은 예사였고, 그때마다 택시를 타고 오거나 술에 취한 모습은 잊을만하면 한 번씩 반복되었다. 남편의 헝클어진 모습을 멈출 묘안이 필요했다. 빠듯한 살림에 아파트 융자금을 감당하기도 힘든 생활은 짜증이 묻어났다. 서로에게 곱지 않은 말들이 오간 적도 있다.

  남편의 술자리는 늘 늦은 시간에 끝이 났다. 그러다 보니 한 달 교통비가 하룻밤에 날아가 버릴 때도 종종 있었다. 아이들 학원비라도 벌어볼 요량으로 인형 옷에 리본이나 구슬을 다는 부업을 했다. 한 달 동안 손톱이 아프도록 부업을 해서 돈을 타는 날이면 남편과 아이들이 좋아하는 반찬으로 푸짐한 상차림을 하고 남편의 귀가를 기다렸다. 그럴 때마다 남편은 약속이라도 한 듯 늦는다는 전화도 없었다. 아이들과 무작정 남편이 오기를 기다리다 늦은 저녁을 먹는 일이 허다했다.

  부업으로 번 돈은 한 달에 한번 남편의 택시요금으로 뭉텅뭉텅 잘려 나가곤 했다. 가계부를 펼칠 때마다 마음이 상했다. 늘 바늘에 찔린 상처를 반창고로 칭칭 동여매고 바느질을 하는 마음을 도둑맞은 기분이 들었다. 어느 때는 한 달 부식비와 맞먹는 택시요금이 들었다. 남편을 집으로 불러들이는 묘안을 짰다. 퇴근 무렵 전화를 걸어서 술안주를 마련했으니 빨리 들어오라고. 전화는 효과 만점이었다. 골뱅이 무침, 오징어무침, 번데기 무침 등은 자신 있게 남들 앞에 내 놓을 정도로 솜씨가 늘었고, 해장국도 몇 가지 정도는 뚝딱 만들었다. 술을 좋아하는 남편을 집으로 불러들이는 것은 성공이었다. 그러다 나는 어느새 남편의 술친구가 되어 있었다.

  imf가 닥쳤을 때 남편회사는 몇 달 동안 파업을 했었다. 파업 초기엔 자주 술에 취해 들어오던 남편은 파업이 장기화되자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출근하지 않는 날은 밖에 나가지도 않고 하루 종일 잠을 자거나 부업하는 나를 거들어주며 미안해했다. 축 쳐진 남편 모습이 안쓰럽고 서글픈 생각이 들어 나는 쉬지 않고 밤낮으로 부업에 매달렸다. 남편이 잠든 시간엔 아무도 모르게 눈물을 쏟았다. 막막한 현실을 받아들이기에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주변을 돌아봐도 손 벌릴 곳이 없었다. 그러나 남편 앞에서는 눈물을 보일 수가 없었다. 씩씩하고 명랑한 척 훌륭한 연기자가 되어야했다.

  그렇게 부업을 하면서 생활비를 마련하던 나는 남편이 모든 것을 포기할까봐 겁이 났다. 바쁜 와중에도 시간을 내서 김치부침개 한 접시와 막걸리 한 병이면 행복해 하는 남편을 위해 술상을 마련했다. 미안해하면서도 술기운에 두 볼이 발그레해진 남편은 친구 같은 아내가 있는 자기는 든든하다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너스레를 떨다 잠이 들었다. 잠든 남편의 얼굴이 힘들어 보여 목이 메었다. 소년 같은 맑은 눈빛이 인상적인 평소 남편의 모습이 아니었다. 사십대의 가장인 남편의 힘든 모습은, 이 시대의 가장들이 겪는 외로움과 함께 너무도 지쳐 있었다. 소년처럼 맑게 살고 싶어 하는 남편 마음이 아프지 않기를, 그 곁에 항상 내가 지키고 있을 거라 약속했다.

  남들처럼 좋은 분위기에서 외식을 하지 못해도 토요일을 기다리게 되었다. 남편의 술친구가 되고 나서 마음에 쌓아 둔 서운함은 설자리가 없었다. 경제적으로는 부족함이 많아도 마음으로는 늘 부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혹 술을 싫어하는 사람들은 무슨 궤변을 늘어놓는가 싶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당한 음주는 혈액순환에도 도움이 되고 건강에도 좋다고 한다. 서로 마음에 쌓아두는 일이 없고 친구처럼 지내다보면 어려움이 닥쳐도 두려움이 없어진다. 분위기에 취한 남편이 과음을 하는 날이 더러 있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술친구라는 이름만큼 마음에 드는 게 없다. 부부가 함께 즐기는 일이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을 것 같다. 

  술을 좋아하는 남편을 위해 해마다 봄이면 매실을 상자로 구입해서 매실주를 담그고, 여름에는 포도를 담가 다음해 여름에 맛을 보곤 한다. 술을 좋아하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 없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술이라도 몸에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몸에 좋다는 술을 직접 담그기도 하고, 시골에 계신 어머니가 담근 산딸기나 오디술을 보면 욕심을 부려 얻어오곤 한다. 문우들과 문학기행을 갈 때면 나는 그 지방의 귀한 술들을 사오는 버릇이 생겼다. 강원도 봉평의 메밀 주, 선운사 복분자, 여주 옥미주, 외암리 민속마을의 연엽주까지 그 맛을 음미할 수 있었다.   

  술이란 묘한 매력이 있다. 가끔 자신을 잊을 정도로 힘든 일들도 척척 해결 해주는 해결사가 되기도 한다. 어쩌다 감정을 흐리게 해서 실수하는 일도 있지만 마음속에 똬리를 튼 감정들도 한잔 술로 술술 풀어버릴 수 있다. 뾰쪽하게 세운 칼날보다는 한잔 술에 부드러운 자리가 더 좋다. 좋은 모습만 있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더러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도 잊고 살아가는 방법을 술은 알고 있다. 술 마신 다음날 두통에 시달리는 나를 보고 미안해하는 남편은 잘못하다 들킨 아이처럼 쩔쩔매기도 하고, 죽을 쑤어 주기도 한다. 가끔 흐트러진 내 모습까지도 아름답게 봐주는 남자, 술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강의를 지겹게 들려주는 남편은 술을 사랑하는 착한 남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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