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날과 다름없이 등교를 하던 나타샤는 하얀색 배달차에 강제로 실린다. 틀림없이 곧 죽겠구나 생각했던 그녀는 몇 시간 후 정신을 차려 보자, 담요에 둘둘 말린 채 빈(Wine)시 외곽 어느 주책의 숨겨진 지하실 바닥에 뉘여져 있었다. 차갑고 깊숙한 지하, 칠흑같은 어둠과 퀴퀴한 공기 속에서 어린 소녀는 질식할 듯한 공포를 느낀다.
5평방미터가 채 안 되는 좁은 지하방에서 나타샤는 범인이 정한 규칙과 일상에 맞춰 하루하루를 살아가게 된다. 책 제목인 『3096일』은 그녀가 범인의 틀 안에서 살아야 했던 시간이다.
소녀는 자신을 납치한 범인 '볼프강 프리클로필'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범인은 갖은 학대와 억압을 일삼았지만, 나타샤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붙잡아야 했던 유일한 끈이기도 했던 것이다. 범인이 넣어주는 적은 양의 음식과 비디오, 라디오, 책에 의지해야 했고, 청소년이 돼서는 노예처럼 살아야 했던 지옥 같은 나날들 속에서도 나타샤는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때로는 굴복해 버리는 게 더 수월할 수도 있었다. 그러면 적어도 덜 맞거나 덜 걷어차였을 테니까. 그러나 완전히 억압당하고 범인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흥정할 수 있는 마지막 여지는 남겨놓아야 했다. 역할은 확실하게 나뉘어져 있었다. 그러나 '통치자'란 호칭과 무릎 꿇기를 둘러싼 공방전은 대리전쟁처럼 우리가 권력을 둘러싸고 벌이는 사이드 쇼(sideshow)장이 되어 버렸다. (본문 193쪽)
책에는 그녀의 감금 생활 뿐만 아니라 스스로의 힘으로 탈출에 성공해 자유를 되찾고, 밝은 미래를 꿈꾸는 모습까지 엿볼 수 있다. 나타샤가 탈출한 그 날, 범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탈출한 뒤에도 나타샤는 언론과 대중의 지나친 관심, 비뚤어진 시선 때문에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유괴범과의 인간적인 관계를 솔직히 털어놓은 나타샤에게 날이 선 비난들이 쏟아졌고, 그녀는 독선적인 대중을 향해 용기 있게 본인의 어린 시절과 유괴, 감금 생활, 탈출 방법, 그리고 탈출 후 모든 얘기를 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지기까의 과정을 낱낱이 밝힌다.
그동안 잘못 알려져 왔던 사건의 진상을 '당사자의 목소리'로 담아냈다는 점, 그리고 아픈 기억임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을 위해 최대한 자세하고 생생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모든 이야기를 표현했다는 점은 독자들에게 놀라움과 연민을 함께 안겨 준다.
■ 3096일
나타샤 캄푸쉬 외 2명 지음 | 박민숙 옮김 | 은행나무 펴냄 | 301쪽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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