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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는 목숨이 담보되지 않는다. 살아서 고향에 갈 수 있을 지, 전선에서 혼이 될 지 알지 못한다. 임진왜란 때 전선에서 보낸 편지가 있다. 우의정 이덕형이 세 아들에게 보낸 편지다.
그는 명나라의 호남사령관 유정과 전선에 있었다. 이덕형의 아내는 임진왜란 초창기에 피란 길에서 왜군이 다가오자 자결을 했다. 당시 막내는 세 살이었다. 3년 전에 어머니를 잃은 세 아들에게 아버지 이덕형이 편지를 보낸 것이다.
이덕형(李德馨·1561∼1613년)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다. 자는 명보, 호는 한음이다. 어려서부터 재치가 많아 백사 이항복과의 관계에서 많은 일화를 남겼다. 저서에는 『한음집』 등이 있다. 스무살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선조 임금으로부터 재주 있는 신하로 선발되어 책을 하사받았다. 스무 살에 조정에 나가 예조참판, 대제학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는 외교관으로 활약했고, 전쟁직후에는 경상·전라·충청·강원도의 4도 도체찰사가 되어 군사정비와 민심 수습에 나섰다. 벼슬도 영의정에 올랐다.
왕이 젊은 학자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 전념하게 하는 '사가독서'를 하였고, 임금이 주관하는 시험에서 여러 차례 수석을 차지했다. 임진왜란 때는 적장 고니시를 단기로 찾아가 담판하고, 일본의 외교관인 겐소와 회담하면서 대의로써 그들의 침략을 공박하였다.
학문이 높은 이덕형은 옛 사례를 들어 자녀를 훈계했다. 스토리텔링 기법이다. 그가 전쟁 중에 유언 삼아 아들들에게 남긴 글이 『훈자제첩(訓子弟帖)』이다. 송나라 유명학자 8명의 아름다운 이야기와 삶에 보탬이 될 내용을 이야기 해주는 형식의 작은 책자다.
이덕형이 세 아들인 이여규, 이여벽, 이여황에게 쓴 편지글이다. 그는 편지에서 글을 쓰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우연히 송나라 때 여러 학자들의 좋은 지침의 글을 보았다. 그중에서도 의미있는 것들을 간추려 보낸다. 항상 이 글들을 눈여겨 보고 행동의 지침으로 삼아라. 너희들이 부모의 마음을 알았으면 좋겠다."
8명으로부터 듣는 8가지 이야기중 책읽기에 관한 것은 다섯 번째 소옹과 일곱 번째 주자의 사례다. 소옹(邵雍)은 유교의 역철학을 발전시켜 수리철학을 만든 학자이고, 주자는 공자의 유교사상을 더 발전시킨 학자다.
이덕형은 다섯 번째 글에서 "소옹은 공부하는 데 오로지 한 마음으로 집중하였다. 처음 공부를 할 때 생활이 어려워 모진 고생을 했지만 책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생활이 곤궁해 공부하면서도 겨울에는 화로를 멀리 했고 여름에는 부채를 멀리 했다. 독서를 하기 위해 심지어 잠자리에 들지 않는 일도 여러 해 계속됐다"고 적었다.
또 일곱 번째 글에서 "주자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 옷을 제대로 입고, 조상의 묘를 참배했다. 이어 책을 바르게 놓고 다른 붓과 벼루 등의 기물도 정돈한 뒤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장재의 훈계하는 내용도 소개했다. "말과 행동이 배울 게 있어야 하고 분명해야 한다. 낮에는 열심히 일하고 밤에는 열심히 공부해라. 어느 순간에나 배움을 게을리 하지 말고 쉴 때도 흐트러짐이 없어야 한다. 책을 오래 읽지만 금세 잊는 경우는 뜻을 자세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귀로 듣기만 한 결과다. 조금이라도 의심이 있으면 선입견에 집착하지 말고 반드시 새로운 뜻을 알 때까지 읽고 또 읽어야 한다. 깊은 생각은 밤중에 하는 것이 좋고 아무리 바른 자세로 앉아 그 뜻을 익혔더라도 열심히 외우지 않으면 다시 잊어버리게 된다. 사람을 가르칠 때는 반드시 예의를 먼저 갖추고 큰 뜻을 알고자 하면 몸가짐부터 바르게 하라. 근신하고 절제하는 마음을 가져야 뜻을 이룰 수 있다."
이덕형은 전쟁 중에도 옛 큰 인물들의 예를 들어 독서와 좋은 생활자세를 교육한 것이다. 그는 환경에 구애받지 않는 집중력의 필요성을 말한 뒤, 맑은 마음으로 책상을 정돈해 공부할 분위기를 스스로 만들 것을 당부하고 있다.
/ 이상주(『조선 명문가 독서교육법』『공부 열광』『유머가 통한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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