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빠진 이야기 소설가 김훈
이 빠진 이야기 소설가 김훈
  • 관리자
  • 승인 2005.11.12 0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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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김훈이 칼의 노래를 쓰며 겪었던 고민과 번뇌...

▲ 소설가 김훈

지난 23일 ‘문학의집·서울’에서는 소설가 김 훈(58)씨가 ‘수요문학광장 만나고 싶었습니다’에 연사로 나와 《칼의 노래》를 쓰면서 겪었던 고민과 번뇌, 그리고 그 와중에 발생한 이 빠진 이야기를 소개했다. 다음은 김훈의 이날 이야기의 일부를 요약한 것이다.

나는 이제 겨우 소설 쓰기를 시작한 신인이다. 나는 올해 58세가 되었다. 내가 앞으로 더 쓸 수 있는 소설은 아마도 장편과 단편을 다 합쳐서 4~5편쯤 될 것 같다. 그걸 다 쓰고 나면 나는 자연사하거나 더 이상 일할 수 없는 지경이 될 것이다. 소설로 써야 할 이야기와 문장이 내 속에 한없이 축적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 4~5편을 반드시 쓰고 가려한다. 그러니 나는 한평생 신인을 면치 못할 운명이다. 이걸 자랑이라고 하는 말이 아니라, 어쩔 수가 없는 일이다.

겨우 시작한 신인의 처지에, 자신의 작품을 제 입으로 말한다는 것은 두렵고 위태로운 일이다. 그 두려움을 무릅쓰고 몇 마디를 해보겠다.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인간을 집단적?계층적?사회적?공동체적으로 이해하기 보다는 인간을 개별적 존재로 이해하고 있다. 그것이 나의 기초다. 인간을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존재로 이해하는 바탕 위에서 많은 훌륭한 소설들이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존경하는 황석영이나 조정래 같은 선배 작가들이 그러한 범주에 속할 것이다. 그 선배들은 시대와 역사의 구조 전체와 그 밑에 깔린 지층의 두께를 들여다보면서 그 총체적 모습을 드러냈고 그 속에서 시달리고 부대끼면서 앞으로 나아가려는 인간의 열망과 좌절을 말했다. 나는 이 세계의 구조, 역사의 지층 전체가 보이지 않는다. 눈을 떴다고 해서 다 보이는 것은 아니다. 눈을 떠봐도 보이지 않는 것이 더 많다.

나는 그 선배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문학을 긍정하고 사랑하지만 그 선배들의 길을 따라갈 수가 없다. 따라가지지가 않는다. 인간의 개별성과 인간의 사회성을 혼합해내는 것이 옳은 문학이라고들 하지만, 말은 그러하되 그것이 쉽게 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 협소한 영역의 부자유를 감당할 수밖에 없다. 내가 쓸 수 있는 이야기는 개별적 존재의 풍경, 개별자와 개별자의 사이에서, 개별자와 집단 사이에서 어떠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그런 것들이다.

나는 졸작 《칼의 노래》를 쓰면서도 임진왜란이라는, 저 길고도 잔혹했던 전쟁의 총체적 국면을 그려내지도 못했고 그 전쟁에서 이름도 보상도 없이 죽어간 수많은 백성들의 고통에 접근하지도 못했다. 내가 쓸 수 있었던 대목은 영웅이 아닌, ‘이순신’이라는 한 개별적 존재의 내면일 뿐이었다. 내가 상상한 그 사내의 내면은 희망이 없는 세상에서 희망을 말하지 않고, 희망 없는 세상을 희망 없이 통과해나가는 고요함과 치열함이었다. 그 비극을 깊이가 있고 두께가 있고 음악이 있고 침묵이 있고 온도가 있고 질감이 있는 풍경으로 그려내기 위하여 나는 집요하게도 문체에 매달렸다.

나는 판소리로 말하자면, 휘모리나 자진모리처럼 급박하게 내지르면서 빠져나가는 소리의 흐름에 올라타서 가기로 작정했다. 나는 추근덕거리는 서편제를 버리고 만장의 단애와도 같은 동편제의 세계로 나아가기로 했다. 소리와 사유의 뼈대만을 삼엄하게 간추려서 인간의 눈앞으로 절벽처럼 우뚝 몰아세우는 그 동편제 우조의 노래를 부르며 나는 나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말은 말을 듣지 않았고, 휘모리 문장을 두어 개 쓰고 나면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였다.

《칼의 노래》를 쓰던 겨울에 이가 8개 빠졌다. 본래 이가 튼튼하지 못했는데 동편제 우조의 절벽을 문장으로 기어오르려니까, 이가 솟아서 아무런 통증도 없이 바람 새어나가듯 비실비실 빠져나갔다. 나는 빠져나온 이빨을 쓰레기통에 퉤퉤 뱉어가면서 기어이 끝까지 써나갔다. 한심한 아마추어였던 것이다. 소설 후반기에서는 기력이 쇄진해서 휘모리장단으로 휘몰아갈 수가 없었고 내 문체는 중머리나 중중머리로 주저 앉아버렸다.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아무 도리가 없었다. 이게 아닌 줄 뻔히 알면서도 하는 수 없이 원고를 출판사에 넘기던 날, 나는 분해서 울면서 술 마셨다.

그 소설로 동인문학상을 받아서 5천만 원이 생겼다. 임플란트라고 해서, 이빨을 한 개 만들어 박는데 3백만 원이었다. 8개가 빠졌음으로 2천4백만 원이 들었다. 임플란트는 의료보험이 적용되지 않는다. 상금으로 이빨 값을 치렀고 나머지는 빚도 갚고 술도 마셨다. 그래도 내가 애초에 꿈꾸었던 휘모리는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앞으로도 그런 불완전과 미완성 속에서 한 줄 한 줄을 써야 할 날들을 생각하니 기가 막힌다. 어쩌자고 이런 궁상맞은 얘기를 썼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이런 글은 되도록이면 쓰지 않는 편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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