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국의 땅에서 푸른 눈물을 흘리는 여인
|
그녀가 그려오던 인물들은 왠지 모르게 세상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고, 그러다가 세상 속에서 스러져 가는 모습들이 많았다. 그래서 소설을 따라가면서도 항상 불안하고 막막하다. 어딘가 가슴 속에 애잔함이 생겨버린다. 게다가 이러한 느낌은 그녀의 문장 때문에 그 감정을 더한다. 숨 쉴곳도 마련해주지 않은 채 길게 흘러가다가 결국 그냥 사그러들을 때도 있고, 어떤 문장은 칼 같이 그어버리는 느낌이다가 아예 침묵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정말 이것은 그녀만이 가진 힘이며, 이러한 힘이 그녀의 글 속으로 독자를 빨아들인다고 할 수 있다.
4년 전의 리진의 존재는 a4 한 장 반 속에 갇혀있었다고, 동시대인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보았기 때문에 깨진 유리조각들을 손에 움켜지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이러한 그녀를 되살리는 작업에 정말 작가는 온 몸을 던지고 있음을 작품에서 느낄 수 있다.
「리진」이 그리고 있는 시대는 조선 후기, 아기 나인의 신분으로 궁에 들어간 리진은 어느 날 명성황후의 눈에 띄게 된다. 이후 리진은 갓 태어난 공주와 사별한 명성황후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며 궁중의 무희로, 그리고 황후를 가까이에서 보필하는 궁녀로 성장 한다.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있던 조선은 점차 일본과 중국뿐 아니라 서구 열강들의 각축장이 된다. 조선에 새로운 문물이 밀려들어오던 때 초대 대리공사로 파견된 콜랭 드 플랑시는 왕을 알현하러 궁궐에 갔다가 우연히 리진의 고혹적인 모습을 사진에 담게 되고 첫눈에 반해 연정을 품게 되며, 이를 왕과 왕비에게 말한다.
리진은 콜랭과 함께 프랑스로 떠난다. 그리고 그 곳에서 에너지 넘치는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일 뿐, 리진은 결국 다시금 복종과 억압이 존재하는 조선으로 돌아온다.
『리진』은 작가의 말대로 전혀 역사소설의 느낌이 들지 않는다. 그냥 항시 작가가 그래왔듯이 한 사람을 이야기하고 있다. 단지 이번 작품에선 그 ‘한 사람’이 과거의 실존 인물이였을 뿐. 어찌보면 전작 『외딴방』의 느낌이 이번 작품을 통해 다시금 와 닿는다. 우리나라가 산업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무렵의 구로 공단의 공순이의 삶으로 그려냈던 『외딴방』에서 받았던 쥐어짜는듯한 숨막힘을 이번 작품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만약 조선 후기에 사랑에 목 말라했던 여성의 일대기를 그린 로맨스 소설로써 이 작품을 선택한다면 적지 않은 실망을 할지도 모르겠다. 명성황후의 죽음으로서 다가오는 리진의 비극은 오히려 제국주의의 칼날 아래 우리나라 근대화의 아픔 속에서 절규하는 한 여성의 아픔이 크게 다가오는 작품이 아닌가 싶다. 이러한 이야기를 하면서 오히려 역사소설로, 그리고 로맨스 소설로 그럴싸하게 포장을 하고 있는 작가의 역량은 역시나 대단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신경숙이라는 이름 석자와 그녀의 작품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절대 실망하지 않을, 그리고 그 신뢰를 더해나갈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 된다
리진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펴냄 / 각권 330쪽 내외 / 각권 9,800원
읽고 생각하는
저작권자 © 독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