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빛과 하늘빛이 빛나는 예술촌
물빛과 하늘빛이 빛나는 예술촌
  • 이재인
  • 승인 2007.07.10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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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양평군
▲ <문학동네 새뜰> 전경     © 독서신문
명당의 오조건(五條件)
이상과 현실이 어우러지는 경우는 그리 흔하지가 않다. 창과 방패처럼 각각 존재하는 게 이 땅의 현실이다. 이상은 이상대로 하늘의 별처럼 존재함으로 우리는 꿈을 갖게 마련이다. 이게 인간의 숙원이며 삶의 지향성이다.
그러나 사람이 양평에 가서 살면 현실과 이상이 하나로 결합된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 선인들은 ‘명당’이라 불렀다. 사람이 살만한 곳을 우리는 예로부터 양택(陽宅)이라 불렀다. 성서에서도 젖과 꿀을 만드는 장소를 가리켜 ‘쉴만한 물가’로 표현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쉴만한 물가가 바로 양평이다. 그래서 양평은 쉴만한 곳으로서 사람이 몰려든다. 사람이 몰려드는 것을 적어도 다섯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 한다.
첫째가 산세가 기(氣)를 형성하고 있어야 한다. 기는 곧 사람에게 에너지와 열정을 제고시킨다. 사람이 이를 바탕으로 성취하고 나아가 장수를 누릴 수 있다. 그래서 기가 충만하되, 그 기가 밖으로 쉬이 새어나가면 안 된다. 그런 요건의 지세가 양평이란다.
둘째 물산이 청결해야 한다. 물이 좋아야 건강을 유지할 수 있는데 좋은 물을 기반으로 생산된 소채가 바로 건강으로 직결된다. 웰빙이란게 바로 양평과 같은 입지에서 삶을 누리는데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셋째로 인심이 순후하고 사람이 착해야 살만한 곳인데 예부터 양평의 사람들은 천진(天眞)하다고 이거이 선생이 문집 「청주세고」(淸州世稿)에서 밝힌바 있다. 이거이는 조선시대 서원부원군에 봉해졌으며 동방의 백거이라고 할 만큼 문명을 날린바 있다.
넷째로 산과 물이 어우러져 있어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거이는 양평의 산수 앞에서 이런 시를 읊었다.
 
산에 가득 비취빛
옷도 따라 파래지고
파아란 못둑엔 날으는 흰새들
간밤 수풀에 서리었던 안개
보슬비되어 바람에 흩날리는데…….
 
다섯째 선비가 이웃해야 마을이 청랑해진다. 오늘의 양평에는 줄잡아 50여명의 문사 선비들이 붓을 들고 저마다 좋은 글을 쓰겠다고 힘을 기울이고 있다. 백시종 박문재 최영규 작가들이 이곳을 찾아 깃을 내렸다.
일찍이 소설가 김용만이 이곳에 둥지를 틀고 베스트셀러를 두 권이나 써냈다. 그의 문장에 반한 숱한 소설가 시인들이 김용만의 창작실을 찾아왔다. 
고래로 양평이 그냥 양평이 아니다. 숱한 문사들이 숲을 이루니 저마다 거목이요 뭉쳐서 숲이 된다.
여섯째 거문고와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가 있어야 운치가 있고 멋스럽다고 하는데 양평이 이 지역적 조건을 모두 갖춘 명당이요 대양평이라는 접두사를 씌어 줄만하다.
 
▲ 양평두물머리 양서면     © 독서신문
양평의 개관
양평은 경기도의 동단에 위치하고 있다. 동편은 강원도의 홍천군·횡성군·원주군 남서쪽은 여주군·광주군, 북서쪽은 남양주시·가평군에 접하고 있다. 1읍 11면으로 군청 소재지는 양평읍 양근리다.
이 양근리와 양서면 대심리에서 초기 청동기 시대의 무문토기·타제석기·마제석기·철기류가 발견되었다. 양서면 양수리와 서종면 문호리 등지에서 지석묘군과 수혈식주거지가 발견되어 이미 신석기시대부터 이곳에서 사람이 살았던 옛터임을 알 수 있다.
특히 삼국시대 한강 유역을 놓고 각축을 벌이면서 영토 확장을 꾀하던 475년(장수왕 63년)부터 고구려 양근현이었다.
551년(진흥왕 12년) 신라의 정예군단이 한강유역의 고구려 영토를 공략하여 그 세력이 지금의 충주, 양평, 여주, 포천 등 남한강과 북한강 유역에 미쳤을 때 신라의 지배권에 속하기도 했다.
삼국 통일 후 경덕왕 때에 빈양현으로 개명되어 기천군(지금의 여주군)의 영현이 되기도 했다.
889년(진성왕 3년)에는 궁예가 이 지방을 공략하여 그들의 활동무대로 삼기도 했다. 지평군을 고구려 시대에는 지현현으로 불리다가 지평현으로 개칭되어 삭주(지금의 춘천)의 영현이 되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940년(태조 23년) 옛 지명을 회복하여 양근현으로 하였다. 1018년(현종 9년) 잠시 광주목영 내에 소속되었다가 1175년(명종 5년) 양근현에 감우가 파견되었다.
1391년(공양왕 3년) 채철장(採鐵場)을 설치하여 철장감을 두었다. 그러니까 쇠를 채취하여 병장기와 농기구를 만드는 재료로 삼았던 곳이 바로 양평이다.
 
▲ 집필활동에 전념하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 김용만     © 독서신문
작가 김용만의 집 근처에서는
20년 전. 소설가 김용만이 삽 몇 자루와 펜 열 두타스를 배낭에 넣고 달랑 인적이 드문 이곳 서종면에 들어섰다. 그의 작가 생활은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저 푸른 초원에서 강을 내다보면서 글을 쓰는 게 소망이었고 바램이었다.
이런 바램끝에 공기 좋고 쉴만한 물가 양평으로 삶의 터전을 결정했다. 그리고 이곳저곳 복덕방 문을 두드렸다. 그러다가 「언제나 봄날」의 사람 좋아 보이는 50대 사내에게 물었다.
 
“문호리에 싼 땅 2천 평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왔는데 흥정을 붙여 주시겠소?”하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고 한다.
“땅은 2천 평 있는데…. 소개하기도 찜찜하오 이다….”
“왜요?”
“글쎄…….”
 
복덕방 주인이 뭔가 숨기고 있는 낌새를 느낀 김용만 작가는 대번에 파고들었다.
“그냥….그냥 가시소. 내가 양심상…….”
“그냥 가다니? 누구를 물로 보시유?”
“그게 아니고…….”
 
복덕방 중개인이 말끝을 흐리자 그는 작가다운 발상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게 아니면 장난하는 거유?”
“그게 사실은 그 지역에 귀신 나온다는 데 괜히 소개하구선 원망 들으면 뮈시가 좋겠어요? 내 맘이 안 내켜서요…….”
“귀신요?”
“그럼요. 그 땅 내놓은 지 한 7년이 됐어요.”
 
작가 김용만이 뜨악한 표정으로 그의 부인의 표정을 살폈다.
그런데 그의 부인은 생각보다 대담하게 “싸면 사겠다”고 하더라는 것…….
 
그래서 몇 천원에 가까운 헐값으로 금싸라기 같은 양평 문호리 860-2번지에 2천 평의 땅을 매입했다고 한다. 그런데 땅을 사고 허가를 내어 집을 짓는 골짜기에서 대낮에도 자글자글 뭔가 소리가 나더라는 것이다.
그는 귀신인가 싶은 생각보다는 호기심이 들어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분명히 골짜기가 무인지대였는데 무슨 소릴까? 작가 김용만은 호기심을 가지고 땅에 접근하면서 집을 짓다말고 귀신 쫓기에 나섰다.
그러나 소리만 있고 도무지 형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 6개월이 지나 바야흐로 무슨 소리인지 그의 작가적 안테나에 잡혔다. 그의 탐구와 집념의 결정이 바로 소리의 진원지를 찾은 것이었다.
저 건너 대성리쪽에서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강을 건너와 골짜기에 스며들면서 울림소리가 복덕방 주인 말대로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였다고.
위에서 밝혔듯이 양평의 산들은 바위가 많다. 철분이 든 바위와 자갈더미가 울림 쇳소리를 내니 여기에 영문 모를 사람들이 귀신 소리라고 했다는 것.
귀신 나오는 땅 2천 평을 작가 김용만이 헐값으로 매입하고 집을 짓기 시작하면서 동네 사람들은 숨을 죽이곤 바라보면서 수군거렸다고 한다.
“두고 보자. 귀신들 아우성 속에 어떻게 사는가 한번 보자구…….”
6개월 걸려 멋진 문학관을 짓자 마을 사람들은 도깨비나 귀신을 누르고 살게 되었다고 환호성을 지르게 되었다는 것.
작가 김용만의 「소부리 문학관」은 이렇게 하여 건축되었고 유래가 창조되었다. 소부리는 백제시대의 부여의 지명(地名)이다. 번영을 누리고 문화를 전파하던 시절의 백제의 영화가 가득한 시대의 영광스러운 지명이다.
이 영광의 지명 속에서 김용만은 연이어 훌륭한 소설을 창작해 냈다. 소설집 『아내가 칼을 들었다』 그리고  산문집 『가와바다야스나리의 잠과 내 허튼소리』가 이곳에서 생성되고 육화된 작품들이다.
멋진 집과 풍광 좋은 집에서 쓴 작품들이 모두가 세계문학 명작들이다. 이러한 역사와 배경을 가진 소설 문제작이고 걸작들이듯이 김용만의 글은 마침내 농익은 가을 감처럼 독자들에게 그것을 누릴 수 있도록 선물을 한 것이다.
작가 김용만은 이제 이 「작가하우스」를 한국문학의 전통의 맥을 이어갈 수 있는 문학관으로 공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도서관 전시관 미술관 등으로 꾸미고 이제 막 대작업을 끝내고 양평의 지역적 배경과 전국적 규모의 아름다운 건축물로 단장을 갖추고 있었다.
양평은 특히 서종면 일대에는 미술관들이 여기저기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어 이 시대가 마치 르네상스 시대를 맞이한 느낌이다.
이 시대에는 이것이 산업이고 이것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요소가 되어 있다. 셰익스피어 한사람을 인도와 바꾸자고 하여도 안 바꾼다는 영국의 자존심처럼 작가 김용만의 자존심이 양평군을 사고도 남을 것이다.
지금의 관광산업은 옛날과 달라 문화체험과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참여하는 문화로 변화해 가고 있다. 양평은 먹거리와 축제와 예술이 살아 숨 쉬는 예술의 고향으로 거듭나고 있다니 고맙고 느꺼운 마음으로 「소부리 문학관」을 나섰다.
멀리 강 건너 자동차 소리가 반사되어 이곳 골짜기에 부딪쳐 신비한 소리를 내고 있다. 그의 축복받은 땅은 그렇게 하여 2천 평이 생겼다니 가히 신화적(神話的)이다.
 
양평의 유물과 유적
서정면 문호리, 양서면 양수리, 용문현 조현리, 개군면 양덕리, 상자포리 등에 지석묘가 분포되어 있다. 633년(선덕여왕 2년) 원효대사가 창건한 용문면 신점리 용문산 용문사 경내에 있는 용문사정지국사 부도 및 비(보물 제531호), 그리고 양평 용천리 삼층 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1호), 용수리 상원사의 돌사자와 팔각 석탑 등 불교 유물이 가득하다.
그리고 매년 실시되는 「백운문화제」가 있다. 양평군민의 협동화합과 애향심을 함양하는 축제로 매년 10월 군민의 날에 군수를 대회장으로 하는 축제가 열린다.
이 축제에 양평군민들이 경제적 혜택을 누릴 수 있는 특산물 판매, 즉 버섯이나 잣을, 그리고 산나물 판매축제, 음식물 경연대회 등이 추가된다면 주민들에게 좋은 선물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지상 낙원의 양평
 
양평은 하늘빛과 물빛이 어울어진 꿈의 궁전
예술이 긴 호흡으로 태어나
저마다 주렴을 달고 손짓을 하고 있네.
이별이 없었더라면 작별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곳을 차마 떠나지 못했으리라
양평, 양평은 만세의 양평이리니
문화와 예술로 한마당 되는 동산이여
이곳에
처가나 외가를 모시고 있는자는
축복이어라 또한 만복이어라…….
 
내 옆자리에 동승한 시인이 넋두리처럼 웅얼거리고 있다.
▲ 이재인(한국문인인장박물관장·경기대 국문학과교수)     ©독서신문

<다음은 전북 고창군편입니다>
 
읽고 생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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