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성 팔경 속에 깃든 돌모루의 홍사용
화성 팔경 속에 깃든 돌모루의 홍사용
  • 이 재인
  • 승인 2007.06.11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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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 낭만적 전원도시 화성
▲ 남양 성모성지     © 독서신문
서정적 낭만적 전원도시 화성
화성, 예나 지금이나 서울에서 한 시간 거리. 옛날에는 기찻길로 지금은 직행버스라야만 한 시간 남짓 걸린다. 문명이 발달하고 교통이 편해진 만큼 물류가 길을 지체시킨다. 그래서 한 시간.
수도 서울을 발치에 두고 한 시간 거리가 된다면 당연히 우리나라 교통체계를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통이나 도로는 사람의 정맥과 같다. 정맥에 피가 원활하게 흐르지 않는다면 이는 문제가 있다. 고속열차 ktx도 설 수 없는 거리가 화성이다.
이 화성은 불과 사오년 전부터 난개발로 불야성을 이루더니 이제는 좀 신형 아파트가 들어서면서부터 문화와 예술이 자리를 잡는 것 같아 다행이다.
화성은 경기도 서남부에 위치해 있다. 동으로 용인시, 서쪽은 황해에 발치를 두고 있다. 남쪽으로 평택·오산, 북쪽으로 수원시·안산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6도 34~175도 10. 북위 37도에서 37도22에 위치하며 면적은 730.98㎢.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 이 시간에도 통계를 말하기도 어려운 실정이다. 옛날 필자가 화성시를 알기 전이었다.
대학시절 성동고 출신으로 시인 지망생을 서울 방산동 박제천 집에서 만난 일이 있었다. 키가 음지에서 자란 콩나물처럼 훤칠하고 눈이 선하게 생긴 사내였다. 소설을 쓴다고 했다. 그가 지금의 시인 홍신선, 오늘의 동국대 교수이다.
우리는 잠시 만났다가 헤어졌다. 그가 군대에 가서 내게 보냈던 군사우편 편지에 돌모루, 즉 화성군 동탄면 석우리 6번지.
그때서야 지도상에 나와 있던 화성군을 점찍어 기억하기 시작했다. 섹스피어와 인도를 바꾸자고 해도 영국이 싫다고 한다는 말이 실감난다. 교통이 복잡하고 멀고 먼 오지가 화성이었다고 필자는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현대화와 도시화로 인하여 이제는 전원도시 속에서 노작 홍사용을 만날 수 있고 홍난파를 추억할 수 있어 좋다. 이제 화성은 서울에서 시외버스를 탈 생각으로 아득한 곳이 아니다.
▲ 제부도 전경     © 독서신문
서울 사당동에서 20분마다 출발하는 준고속버스가 생긴 지 오래이다. 장사꾼 말대로 약간은 쓰다가 팔아버린 버스이다. 아무리 변두리에 살고 있지만 중고 버스로 시속 90킬로미터로 달리는 우리네 생명의 존엄성을 생각하면 서글프지만 그래도 기차로, 시외버스로 수원역전에서 좌석도 없이 서서 가는 것보다는 이게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일단 버스에서 내리면 화성시는 서정적 낭만적 전원도시이다. 봄철 물이 가득한 논에서 개구리 울음소리가 옛날 우리네 자라던 고향을 생각나게 한다. 여름이면 여름대로 논밭에 싱그러운 녹음이 지천으로 뻗어있고 가을은 만추로 마음이 가득하다.
겨울에는 빈 들판에 빈 옥수숫대가 윙윙거리면서 철 지난 허수아비에게 꾸벅대는 정경도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정경이다.
화성은 광주산맥이 북부로 뻗어내려 수리산(475m) 안양시와의 경제에 솟아있다. 그 여맥이 화성시내로 뻗어와 칠보산(239m) 서봉산, 조두산, 태봉산, 태행산 등의 구릉성 산지를 형성한다.
서부에는 광활한 화성평야가 전개되고 발안천, 남양천, 반원천 등이 서해안으로 흐른다. 해안선은 비교적 복잡하여 남양, 조암 등의 반도와 남양, 분향 등의 만이 있고 연해에는 제부도를 비롯하여 여러 섬이 산재해 있다.
서해안이 멀리까지 얕을 뿐만 아니라 조석간만의 차가 심하여 자연적으로 좋은 항구가 없어 아쉽다.
▲ 융륭/건릉     © 독서신문
화성은 1394(태조3년)의 한양 천도로 양광도에서 그 이듬해 경기도에 편입되었으며 1413년(태종13년) 도호부가 되었고, 1456년 판관을 두어 진으로 하면서 경사(京師)수호를 하는 보(輔)의 한 곳이 되었다.
1526년(중종21년)에는 고을에서 부모를 죽인 사건이 발생하여 군으로 강등되면서 진을 혁파하였다. 그 뒤 인천에 속하였다가 1535년 다시 복구되었다.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를 1789년(정조13년) 양주 배봉산에서 화산으로 천장하고 이곳에 있던 읍차를 팔달산 밑으로 옮겼다.
1793년에는 수원부를 화성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정약용에 의하여 거중기와 녹로 등을 사용하여 각종 시설을 갖춘 화성을 3년에 걸쳐 축조하였다. 남양은 다시 1413년에 도호부가 되고 1644년에 현이 되었으나 1653년 또 다시 도호부로 복구되었다.
1895년(고종32년)의 지방관제 개정으로 군이 되었으며 다음해에 경기도 관찰부의 소재지가 되었다가 1910년 경술국치 후 서울로 이전되었다. 남양은 1895년 수원군과 함께 인천의 속군이 되었다가 다음해 경기의 4등군이 되었다.
1914년 영흥면 대부면이 부평군에 편입되고 나머지는 수원군에 병합됨으로써 남양군은 없어지게 되었다. 1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일제에 항거하는 독립운동이 치열했다. 이때 일본군에 의한 제암리 교회 참변 사건은 가장 처참했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화성의 대표문학가 노작 홍사용
근대의 인물로는 제암리 교회에서 순사한 안종후 등 23인, 그리고 독립운동가인 문상익 김교철 홍원식 등이 있다. 또한 민족 음악의 선구자인 홍난파와 문학가 홍사용이 화성을 빛내고 있다.
노작 홍사용은 당시 행정구역이 용인군 기흥면 농서리 용수골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통정대부 육군 헌병부위를 지낸 남양 홍수 철유(哲裕)의 아들로 태어났다. 출생 100일 만에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살았다. 아버지께서 고향 돌모루에 낙향 그곳에서 살았다.
노작이 1912년 면상인 원주 원씨와 결혼하고 16세에 휘문의숙에 입학했다. 1918년 휘문의숙 3학년 재학 중에 정백 등과 함께 등사판으로 <피는 꽃>이라는 문학동인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노작이 20세 되던 해에 월탄 박종화와 정백과 함께 「백조」를 창간했다. 홍상용은 이 「백조」동인지를 발행하기 위해 토지문서를 은행에 저당 잡히기도 했다. 노작은 문학 활동 이외에도 <토월회>를 만들어 연극 운동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연극 운동은 문학보다도 공연비용이 많이 들었는데도 노작은 그 비용을 어렵게 부담했다. 그리고 외국의 희곡을 번역하고 무대 감독을 맡기도 했다. 노작은 1924년 토월회 문예부장을 맡고 그의 작품을 자신이 직접 연출했다.
3회 연출을 고비로 자금난이 악화돼 1925년 토월회는 긴 겨울잠에 들어갔다. 그러나 노작은 1927년 몇몇 동지들과 함께 산유화회(山有花會)를 조직, 5월 20일 인사동 「조선극장」에서 「향토심」이란 작품을 연출까지 맡아 무대에 올렸다.
화성의 천석꾼의 자제인 귀공자 홍사용이 「백조」 「토월회」 운영을 위해 재산을 탕진하고 그는 불교에 관심을 기울였다. 노작이 전국의 사찰을 돌며 불경을 연구하던 중 폐결핵을 앓게 된 것은 1929년쯤의 일이다.
그는 백조 창간호에 이렇게 읊었다.
 
어찌노! 어찌노.
아! 어찌노
어머니의 젖을
만지는 듯한
달콤한 비애가
안개처럼 이 어린 넋을
휩싸들이니.
 
감상적 애조를 드러낸 시로서 시대의 아픔, 내재된 자아의 슬픔을 문학으로 형상화했다. 그는 1920년대 문학의 거목으로 살았지만 그의 문학관이나 기념관이 아직 화성에는 없다. 요즘 지방문화 활성화로 여기저기 기념관이 생겨나고 있다.
마땅히 그의 생가 주변이나 화성에서는 그를 기리는 기념비 하나라도 만드는 일을 장려할 만하다.
 
화성의 문인들
화성에는 최근 많은 문인들이 이주해 왔다. 문협 화성지부를 맡아 의욕적으로 일을 하고 있는 지현숙씨는 「화성문학」속간호를 준비 중이다. 그리고 새로 입회한 회원을 중심으로 친목을 도모하면서 올 여름 「해변문학제」란 축제를 전국적인 규모로 개최할 예정이란다.
화성은 바다를 끼고 있어 늘 모든 것이 새롭다. 이 새로운 감상은 제부도 가는 길이 하루에도 몇 번씩 가슴을 드러내기 때문일까? 화성은 몇몇 군데에 미술관, 문학관이 있다.
▲ 화성의 수필가 정인자     © 독서신문
문화 인구의 저변 확대와 예술의 향수를 누릴 수 있도록 폐교에 건립된 시설이 눈에 뜨이게 드러난다. 그중 한명인 김명훈씨. 그는 소설가이며 언론인 출신으로 그가 하고 있는 일중 ‘쟁이골 축제’가 있다. 이는 전국적 규모이다.
행위예술, 갯벌체험, 도자기체험, 조각·그림 전시회는 해마다 계속되어 벌써 8회 째를 맞이하고 있다. 지역 주민이 문화 예술의 향수를 누릴 수 있게 해주었다고 조각가 김천미씨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여류 수필가 정인자씨는 폐교를 이용하여 문화 공간을 활용하게 된 점이 축복이라고 말한다. 소외지역에 학교가 존재함으로써 불온한 청소년들이 자칫 탈선 할 수 있는 곳을 문화의 공간으로, 예술의 센터로 이용할 수 있게 되어 환영하고 있다.
화성의 문인들은 객관적으로 볼 때 숫자에 비해 그리 괄목할 만한 시인이 많지 않다. 이는 이 지역에 한창 개발되고 있으나 아직은 문화교육 시설의 부족함을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증거이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문화 복지 교육시설 등이 마련되어야 한다. 화성은 예로부터 효와 예향의 고장이다. 융·건릉이 천혜의 공원으로 조성되어 말없는 효의 본보기가 되고 있다. 용주사, 그리고 천주교 남양성지, 제암리 순교지 등이 이 마을 사람들의 신실함과 신앙으로 무장된 전통마을이다.
▲ 문화예술촌 쟁이골     © 독서신문
오늘의 화성은 아직도 해결되지 못한 살인사건이 인근 주민들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이를 벗는 길 또한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화·예술과 신앙이 뒷받침되는 지역문화로 방향 전환을 해야 한다.
화성은 타 시군보다는 비교적 자립도가 높다. 이는 이 고장이 경제적 발돋움을 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공한지가 널려 있는 기회의 땅이다. 이를 잘 활용하면 균형적 발전과 함께 수도권 중심도시로 비약적 발전을 할 수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수필가 정인자씨는 이 「화성예찬」하는 글을 시리즈로 써서 지금 책을 출간할 의욕에 차 있다. 그는 주부로서, 작가로서, 향토사학자로서, 그리고 양계를 하는 축산 농가의 모범적인 사람이다.
그는 92년도 월간 「문학21」을 통하여 문단에 등단한 이래 서정성 높은 깐깐한 수필을 쓰고 있다. 화성군 장안면 독정리에서 살면서 자신이 살고 있는 화성의 아름다움을 작품화시키는 집념이 한층 돋보인다.
정인자씨의 수필은 그냥 잡문의 일종이 아니라 밀도 높은 서정성과 감칠맛 나는 문체를 특징으로 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언어미학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홍사용, 지현숙 정인자로 이어지는 문맥이 화성을 빛내는 인물로 정착되기를 기대해 본다.
 
▲ 궁평항     © 독서신문
화성의 자랑 ‘화성팔경’
제1경은 융·건의 백설이다.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두 수려한 경관이다. 특히 능 전역에 빽빽이 들어선 노송과 어울려진 백설이 덮인 풍경은 세인들의 마음을 무아의 경지로 빠지게 한다고 한다.
제2경은 용주사의 범종이다. 고려시대 범종으로서는 한국종의 양식을 가장 충실히 갖추고 있는 종으로, 정조의 애절한 효심이 깃든 「불설부모은중경」과 함께 소중한 문화재라 한다.
제3경은 제부모세이다. 제부도는 0.98㎞의 작은 섬으로서 하루에 두 번씩 바닷물이 양쪽으로 갈라지며 섬을 드나들 수 있는 길이 열리는 곳으로 「모세의 기적」을 볼 수 있는 환상적인 곳이다.
제4경은 궁평낙조이다. 화성시 서신면 궁평리에 위치한 해안 유원지는 해송과 모래사장이 어우러진 천혜의 관광지이다. 제5경은 남양황화로 남양 간척지에 황금벌판과 남양호와의 조화가 일품이다.
제6경은 입파홍암으로 광활한 서해 바다에 태고의 신비를 묻고 우뚝 솟아 있는 붉은 기암괴석과 파도와 갈매기의 어우러짐이 산수화 같다. 제7경은 제암만세로 1919년 3.1만세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한 곳으로 일본 헌병이 4월15일 제암교회 신도를 감금시키고 불을 지르며 23명을 학살했다. 그리고 30여 채의 가옥을 불태웠다.
제8경은 남양성지로 1866년 병인년 대 박해 때 무명의 교인들이 순교한 거룩한 땅이다. 한국교회사상 처음으로 성모마리아 순례성지로 선포되었다.
▲ 이재인(한국문인인장박물관장·경기대 국문학과교수)     ©독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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