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인지同人誌를 통한 문학의 현대성 구축작업(4)
동인지同人誌를 통한 문학의 현대성 구축작업(4)
  • 조완호
  • 승인 2007.06.08 15: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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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창조≫≪폐허≫≪장미촌≫≪백조≫≪금성≫
▲ 조완호     ©독서신문
5. 낭만주의와 자연주의의 향연, 동인지 ≪백조≫
 
≪백조≫는 1922년 1월9일에 창간된 문학 동인지다. 흔히 ≪백조≫의 문학적 경향을 장르에 구별 없이 ‘낭만주의’로 보지만, 그것은 주로 시 분야가 그랬던 것이고, 소설은 그 시대의 유행 사조였던 자연주의
적인 작품이 많았다. 그러나 당시의 동인지는 뚜렷한 주의나 사조를 전제로 해서 만들어졌던 것이 아니고, 문학을 하는 사람들끼리 친교를 전제로 하여 모여진 것이기 때문에 어떤 유파나 무슨 주의로 단정해 말하기는 쉽지않다. 어떻든 모여 서로 영향을 주고 받다보면 자연히 어떤 하나의 특성을 띠게 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백조≫ 역시 휘문의숙徽文義塾 출신의 박종화와 홍사용, 배재학당培材學堂 출신의 라도향과 박영희 등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것이다.
창간 동인은 홍사용·현진건·나도향·박영희·이상화·김기진·노자영·오천식·안석주·원세하·이광수·박종화 등 12명이었고, 편집인은 홍사용, 발행인은 미국인 선교사로 배재학당 교장으로 있던 아펜셀라亞扁薛羅였다.
국판 144면이고, 표지는 안석영이 그렸으며, 발행소는 문화사로 되어 있고, 자금은 김기덕과 홍사중 두 후원자가 전담했다.
 
≪백조≫는 격월간으로 정기 발간하려 했으나, 계획과는 달리 1922년 5월에 2호,
1923년 9월에 3호를 내고는 종간되었다.
2호의 발행인은 미국인 선교사인 보이스 부인이었고, 3호의 발행인은 망명한 백계 러시아인 훼루 훼로였다. 그 무렵 잡지의 발행인을 외국인 이름으로 한 것은, 외국인이면 허가를 내기도 쉬웠고 검열을 받지 않거나 간섭을 받는 일이 덜했기 때문이다. 또 당초의 계획은 문예잡지 ≪백조≫와 나란히 사상 잡지 ≪흑조黑潮≫를 발간하려 했으나 실현되지 못했다.
≪백조≫가 나온 배경과 당시의 상황에 대해  박종화는 1949년 ≪문예文藝≫10월
호에 <백조시대 회고>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이 술회한 적이 있다.
이를 통해 ≪백조≫가 낭만주의를 지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밝힐 수 있다.
≪백조≫를 중심으로 하여 흐르는 사조는 낭만 그것이 아닐 수 없었다. 첫째, 나이가 모두 스물을 전후한 약관弱冠이었다. 10세를 전후하여 을사乙巳 경술庚戌의 망국 한亡國恨은 어린 가슴 속에 뼈아프도록 품어보았고, 계속해서 일어나는 의병義兵과 일병日兵의 대치된 투쟁, 열사烈士의 자문自刎, 광복光復을 꾀하다가 탄로된 선배와 부조父祖의 투옥 등, 이것은 남의 일이 아니요, 곧 내 집안의 일이요 내 일인 것이다.
이 참담하고 기막힌 파도 속에서 자라나서 어언 약관이 되어 3·1운동에 한 사람의 병졸로 참가했던 이 무리들은 실로 모두가 한학漢學의 조박糟粕이 있었을 뿐 아니라, 거센 풍파는 이들로 하여금 조달하고 숙성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우리들은 ‘우리는 인위로써 만들어진 강제 구속을 깨뜨리고 자유를 구하지 않으면 아니 된다’, ‘이 자유를 발휘하는 것은 미美인 것이다’라고 부르짖는 실러를 발견하고, 하나의 새로운 경이와 동경과 열정에 밤새지 않을 수 없었다.
…중략…
이 땅의 문학의 주조主潮가 낭만과 상징 그리고 데카당스에 흐르게 된 것은, 우리들이 정치적으로 압박을 받게 되는 환경 속에 서 있고, 또한 3·1운동을 치른 뒤 오는 절망이 자연히 이 길로 젊은 문학도를 끌고 들어가게 만들었으니, 모두가 한이요, 애수요, 자포자기요, 유미唯美 탐구뿐인 것이었다.”
 
≪백조≫ 탄생의 주역이었던 월탄은 1954년 ≪신천지≫ 2월호에 <백조시대와 그 전야>라는 제목아래 열여섯 살에 휘문의숙에 입학한 이야기에 대해 소개한 바 있
다.
열여섯 살 때 나는 상투 틀어 관례冠禮하고, 간곡하게 할아버님께 말씀드려 승낙을 받은 뒤에, 소학교를 거치지 않고 바로 휘문의숙에 입학했습니다. 한문은 그때 소학교 졸업생 코 흘리는 애들에게 밀릴 까닭이 없고, 일어日語와 산술算術은 독학이라 은근히 염려하는 걱정을 해봤는데, 당해보니 역시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휘문에 1년을 다니는 동안 좋은 친구를 하나 얻었습니다. 바로 위아래 동리에 자라나던 사람으로, 작년까지도 머리를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시전詩傳』인가 『서전書傳』을 끼고 행길로 지나가던 친군데, 어느 틈에 나와 같이 휘문에 들어왔습니다. 작문을 잘 짓고 역사를 좋아하고 열정이 있고 명상瞑想하기를 좋아했습니다. 누군고 하니 정지현鄭志鉉, 사회에 나와서 저 유명한 정백鄭栢이었습니다.
…나는 정군을 통하여 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정군과 한 반인 수원 ‘돌머루’ 사람인 홍사용을 만났습니다. 나중에 노작露雀이란 시인이 된 사람입니다. 그리고 홍을 통하여 또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안석주, 나중에 석영夕影이 된 사람입니다. 또다시 한 사람은 동창 속에 만났습니다. 김장환金章煥, 제주도 분인 저 유명하던 김명식金明植 씨 후배입니다. 나중에 동아일보 기자가 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우리들은 조그마한 뜻 맞는 한 클럽이 되었습니다. 톨스토이를 이야기하고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을 돌려가며 읽었습니다. 괴테와 하이네의 시를 찬양하며, 밀턴의 『실락원失樂園』은 오히려 진부하다 지껄였습니다. 이것이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나의 즐거운 문학소년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들은 몰래 등사판을 빌려서 ≪피는 꽃≫이라는 회람잡지를 편집해보기도 하였습니다. 이것이 앞날의 ≪백조≫라는 순문예지가 나타날 징조였습니다.
 
다시 월탄은 인생의 만년을 바라보는 예순이 되던 해, 1960년 ≪사상계≫1월호에서 ‘백조시대’의 그리운 친구들을 떠올리면서 그 인간과 작품을 이야기했다. 
몇 해가 지났다. 정백은 ≪서광曙光≫(문흥사, 1919)잡지를 편집하고 있었다. 정은 나에게 조그만 문예잡지 ≪문우≫(문흥사, 1920)라는 것을 편집해보라고 하였다. 이때에 정백과 홍사용과 나의 경우와 비슷한 몇 사람이 있다. 그들은 배제학당 출신의 나도향 박회월 최승일 등이었다. 그들은 ≪신청년新靑年≫(1920)이란 것을 몇 번 내놓은 게 있었다.
하루는 회월과 도향이 나를 청량사淸凉寺로 불렀다. ≪신청년≫을 경영하는 최승일 군이 좀 규모를 크게 하고 수준을 높여 동인잡지를 경영하자는 뜻이었다. 이때 모인 사람은 회월·최승일 군과 현빙허 군이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빈처貧妻>의 작가 빙허를 대견하게 되었다. 그때는 뚱뚱하고 술 잘 먹는 빙허가 아니라, 미목眉目이 수려한 백석白晳의 미소년이었다. 최군의 잡지경영은 유야무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는 ‘빙허’라는 호우好友를 또 하나얻었다.
1년이 지나서 ≪백조≫가 처음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때에 동인으로 노작·빙허·도향·회월·상화·팔봉·춘성·석영·우전, 그리고 나와 춘원이다. 정백 군은 이때엔 벌써 문예를 읊조리던 붓 자루를 꺾어버리고 주의자主義者의 길을 개척하였으므로, 문예잡지의 동인이 되기를 고사固辭하였다. 춘원은 이때에 벌써 우리들의 선배다. 선배와 후배가 아무리 흉허물이 없다 하더라도 도저히 탐탐해질 리 없다. 실제의 동인을 따진다면 춘원을 제한 기타의 사람이 참의미의 동인이었다.
 
노작 홍사용은 지금이나 그때나 고결한 선비다. 한번 사람을 알아주면 몸이 부서져라 하고, 한번 틀리면 돌부처다. 내 말 여간해서 남에게 안 하는 성정이요, 남의 말 시부렁거려 옮기지 않은 사람이다. 즐거이 민요를 읊조리며, 가장 득의처得意處는 향토의 정서였다.
빙허 현진건은 언제나 그랬지만 그때도 자기 앞을 잘 쓰고 있는 사람이다. 열정도 아니요 냉정도 아니다. 이지가 밀화蜜花처럼 툭 틔었음이다. 처음으로 우리 문단의 리얼리즘을 세워놓은 이다. ≪백조≫에 실린 <할머니의 죽음>·<유린蹂躪)>등이며, ≪개벽≫에 <빈처>·<타락자> 등이 그의 실질의 대표작일 것이다. 
도향 나경손은 턱없는 호한好漢이다. 그것은 겉으로 도향을 본 사람만이 말할 소리다. 그만 미치광인 듯한 너털웃음이 스러질 때에 날카로운 눈 모자眸子-반짝한다. 마치 축축하고 질퍽질퍽s하고 캄캄한 흙 속에 파란 인광燐光이 싸늘하도록 반짝이듯이. 이러한 경향은 그의 작품과 교우도交友道에서도 있었다. 임사臨死하기 몇 달 전에 쓴 작품은 <지형근池亨根>·<뽕>·<벙어리 삼용이>·<그믐달> 같은, 등에 찬물을 끼얹을 듯 오싹한 신기神氣 붙은 작품이었다. 거의 체홉을 어루만지듯 하였다.
회월 박영희는 얕은 듯하면서도 센티멘털하다. 그의 시에 <월광月光으로 짠 병실病室>이 그의 그때의 대표작이리라. 영악하고도 순되고 똑똑하고도 남을 거절치 못한다.
…중략…
노작은 강强이 자신에서 나왔고, 회월은 남을 말미암아 강을 얻었다. 시대의 조류에 기울어지기 이전의 회월은 다감다정함으로써 어깨를 덮을 듯한 검은 중절모자를 우뚝 솟도록 만들어 쓰고, 산과 들로 친구와 동무를 찾아서 서글픈 백일白日에 휘파람을 날리면 날마다 날마다 장안을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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