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바다
인생 바다
  • 김혜식
  • 승인 2007.05.28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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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전문 지 『딩아돌하』수록 작품 신영순의 시 ‘돛배’에서
▲ 김혜식(수필가)     ©독서신문
‘바다로 갈 때는 한번 기도 하라.전쟁터로 갈 때는 두 번 기도 하여라. 그러나 결혼식장으로 갈 때는 세 번 기도 하여라’ 서양의 격언으로 미루어보아 결혼을 인륜지대사로 여긴 것은 동서고금이 다를 바 없는 것 같다.
 나는 결혼식장으로 향할 때 신(神)을 찾은 적 있던가. 기도를 하기 앞서 부모님마저 안중에 없었지 않았나 싶다. 그분들의 반대를 무릅쓴 결혼이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나는 사랑에 한껏 미친 여자였다. 아니 철부지였다. 그가 신었던 운동화 한 켤레에 맘을 빼앗겨 결혼이란 깊은 우물에 풍덩 빠졌으니...사랑에 눈이 멀어 계산기도 제대로 두드릴 줄 몰랐던 것이다. 결혼은 환상이 아닌 현실이 아닌가. 결혼은 엄연히 조건도 따지는 법이다. 그것이 미비한 상태에서 나는 오로지 상대의 사소한 매력에 이끌려 선뜻 중대사를 결정하지 않았는가.

 이십여 년 전, 그 당시 남편은 일정한 직업도 없었다. 그렇다고 시댁에서 전세방 한 칸이라도  얻어 줄 형편도 아니었다. 그야말로 빈주먹인 그 남자한테 내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은 소똥 묻은 운동화 때문이었다. 포항 언니 집에 놀러갔다가 수년간 펜팔로만 알고 지내던 그를 비로소 만나게 되었다. 포항 시내 근교 이미자의 노래를 유독 크게 틀어주던 허름한 다방에서 우린 처음 상면을 했다. 헌데 여자랑 첫 데이트를 나온 남자의 옷차림치곤 외양이 말이 아니었다. 며칠 동안 감지도 못했는지 장발 머리엔 허연 비듬이 가득했고 운동화엔 말라붙은 소똥이 덕지덕지 붙어있었다. 그땐 눈에 콩꺼풀이 씌어서인가. 본연의 모습을 숨긴 채 겉만 화려히 포장된 인간들에게 식상해서일까. 꾸밈없이 자신의 실체를 보여주는 그이가 왠지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그이는 그 당시 고시공부를 하며 틈틈이 고향에서 한우를 몇 두 사육하고 있었다. 그이한테서 인간적인 땀 냄새를 처음 맡게 해준 소똥 묻은 신발, 사랑에 빠지면 이렇듯 세상만물이 모두 향기가 나고 아름답게 보이기 마련인가보다. 나도 그 착각의 희생물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하나 나의 그 아름다운 착각은 사람 됨됨이를 직시하는 혜안이 되기도 했다. 남편은 성실하다. 무슨 일이든 자신의 몸을 사리지 않고 최선을 다하며 의리도 강하여 배신을 모른다.
 그런 남편의 장점과 오늘날 가장으로서의 애환을 다시금 되돌아보게 하는 한편의 시가 있어 이렇듯 지난날의 옛 추억으로 나를 이끌고 있다.
 얼마 전 지방에선 유일하게 내 고장 청주에서 시전문지가 출간 됐다. 청주대학교 임승빈 교수님이 주간을 맡은 『딩아돌하』라는 시 전문지가 그것이다. 시의 내밀성과 한국 시단의 위상과 시인들의 자긍심 고취를 목표로 출발한 『딩아돌하』는 첫 순항답게 대어들이 그 속에 많이 들어 있었다. 그 훌륭한 대어 중에 가장 나의 감성을 사로잡은 시는 ‘신영순’시인님의 ‘돛배’라는 시이다. 평소 후덕한 인품처럼 시 또한 뛰어난 작품이 많은 시인이다.  
 현관 앞 부려 논 시간들/ 밟고 온 길들이 마침표로 놓여있다/발자국이 종일 끌고 다녔을 몸의 한 중심이/곤한 잠의 끄트머리에 가 닿았다/가장은 255밀리/아들은 300밀리의 거함/입을 좍 벌린 아들놈의 운동화가/가장의 납작해진 구두를 들여다보고 있다/거함의 파도에 밀려/돛배는 얼마나 조마조마 했을까  --중략--

 일상을 마친 가족들이 벗어놓은 신발에서 고단한 지난 삶을 떠올린다. 지난날 인생 바다를 함께 항해한 나침반인 남편, 그의 굳은 살 박힌 발을 담은 낡은 신발에 시인은 문득 연민마저 느낀다. 어느새 훌쩍 커버린 그래서 아버지의 힘을 능가할 장성한 아들이 이젠 파도 심한 인생 바다를 항해할 차례이다. 아들의 신발은 어느새 거함이 되어 이미 인생의 바다를 헤쳐 나갈 준비를 철저히 갖추고 있었다.
 내 남편의 신발은 지금 쯤 어디서 무엇을 할까. 이 책의 제호 『딩아돌하』처럼 당신이 오시는 길에 울려 퍼지는 편경(編磬)같은 악기의 맑은 소리처럼 그런 아름다운 발자취를 준비 하고 있을까. 오늘도 남편이 꿈꾸는 삶의 지향점을 향해 힘차게 걸어갈 수 있게 하는 건강한 신발이기를 아내로서 소망할 따름이다. 
 
읽고 생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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