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기행, 울산·울주군편
문학기행, 울산·울주군편
  • 이재인
  • 승인 2007.05.25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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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집은 없다”
▲ 오영수 선생이 생전에 살던 집필실. 지금은 누추해 보이지만 30년전에는 모던한 집이었으리라.     © 독서신문

“빈집은 없다”
작가 오영수와 나의 인연
작가의 출생지나 성장지를 찾는 것은 일종의 경배의식이다.
더욱이 훌륭한 작품을 썼던 작가의 집필실이거나 작품의 배경이 됐던 곳을 찾아갈 때 우리는 흔히 존칭하는 말로 「성지순례」라는 말을 쓴다.
나의 이번 울산·울주 방문도 일종의 성역을 탐방하는 기분이었다.
사랑과 온유와 자비가 넉넉한 작가 오영수의 유적을 찾아 나선 것은 미안하게도 40여년만의 일이다.
작가의 고향은 20대 시절엔 커다란 감동과 추억으로 다가서지 못했다.
그것은 작가한테 작품으로써의 별개의 문제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젊은 나로서는 인생의 애송이일뿐더러 작가로서도 올챙이였다.
40이 훌쩍 넘어서자 나는 작가에게는 고향이 그 작품의 배경이 되었고 뿌리로서 그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작가의 성장지나 출생지는 그가 쓴 작품에 간접이나 직접으로 영향을 미치게 돼 있다.
그것을 우리는 유기적 연관성이라 말하지 않던가?…….
작가 오영수는 나에게 잊을 수 없는 분이다.
어버이 같다고나 할까?
나는 시골에서 독학을 하면서도 작가의 열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 열망이 용광로 같았다고 회고된다.
작가는 나에게 구원이었고, 희망이었고, 그것이 삶을 가치 있게 만드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낮에는 엄한 아버지 밑에서 중노동을, 밤에는 「현대문학」이나 「사상계」를 통하여 문단이라는 것을 아득하게 터득하고 있었다.
이런 독학생인 나한테 어느 날, 아니 정확하게 62년도 3월호에 「기질」이라는 단편을 읽게 되었다.
우리나라 팔도 사람들의 기질을 고사 성어나 옛 속담에서 찾아보는 소박한 작품이었다.
아무튼 시골에서 농사지으면서 작가의 꿈을 키우던 필자에게 그 소설은 요즘말로 코드가 맞았다고나 할까?
그 작품을 읽던 날 나는 진한 감동에 젖어 작가 오영수 선생한테 <선생님전상서>로 시작되는 팬레터를 썼다.
마분지 종이에 연필로 그것도 침을 묻혀 또박또박 눌러서 썼다.
영적으로 통했던지 어린 나이의 나는 오영수 선생이 그 유명한 「현대문학사」에 근무한다는 단서를 알아냈다.
「현대문학」권말판권에 붙은 주소로 오영수 선생한테 편지를 보냈다.
편지를 보내는 데에도 6킬로나 떨어진 면소재지로 가야만 했다.
그래야만 우체국에 가서 우표를 살 수가 있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뜻밖에도 나흘 후에 나는 누런 봉투에 만년필로 휘갈겨 쓴 달필의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누렁색이 섞인 빨간색 자전거를 탄 우체부가 다가와 편지를 불쑥 내밀었다.
머리에는 경찰관처럼 챙이 넓은 모자를 쓴 집배원이었다.
“무슨 고지서여?”
어머니는 벌써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모습이었다.
두 달 전 밀조주를 담아 나뭇간에 묻었던 것을 예산세무서 단속반에게 들킨 사실을 기억하고 하신 말이었다.
그 당시 밀조주를 제조하다 들키거나 발각되는 경우 패가망신은 불 보듯 뻔했다.
“고지서는 무슨 고지서요……. 오영수 선생님의 답장이구먼…….”
나는 손을 떨면서 쥐고 있던 양철 낫끝을 봉투 말미를 향해 조촘조촘 밀어 넣었다.
아하, 편지는 200자 원고지 한 장 반 정도였지만 내용은 충분히 담고 있었다.
‘군의 편지 잘 받았다. 돈도 되지 아니하는 작가 지망은 고려해 볼 일이다. 그래도 글을 쓰겠다면 황순원이나 김동리의 글을 읽는 게 좋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이었던 것을 40년이 지난 지금도 필자는 기억하고 있다.
지금의 입장에서 생각해볼 때 그때 오영수 선생의 말씀은 아주 정직한 고백이었다.
문학이 돈이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돈이 되던, 그것이 돈이 아니 되든 열정을 받쳐 오늘에 이르렀다.

▲ 오영수 선생 집필실 입구에서의 필자     © 독서신문
오영수의 생가터를 찾아
그럼에도 문학의 꿈을 가꿔나가던 나에게 문학을 알려준 그분의 생가터를 찾아 떠나는 발길이 40년 만에 이루어졌으니 감개가 어린 출발이었다.
이미 출발 전에 우리는 충북 옥천에서 정일근 시인에게 오늘 오후에 울산 쪽으로 갈 여정임을 전화로 알렸다.
그는 우리에게 쉽게 울주군 웅천면 곡천리로 찾아가는 길을 메모하도록 했다.
대구에서 울산으로 가는 고속도로를 탈것.
울산대 방향으로 직진하면 언양이고 부산 방향의 면소재지에서 우측 pc방 옆 골목이라고 일러주었다.
정일근 시인이 업무가 바빠서 일정을 함께할 수 없어 미안해하는 말에 우리 일행 넷은 표지판을 확인하면서 웅천소재지에 이르렀다.
그러나 pc방 옆에는 면사무소를 중심으로 몇 군데 대숲이 우거진 집들이 눈에 띌 뿐 오영수 선생의 집을 찾을 수 없었다.
난생 처음 찾아간 나그네로서는 어느 곳이 작가 오영수 선생이 살던 집이었던지 도통 짐작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지나가는 동네 몇 사람에게 작가의 집을 물어봤지만 한결같이 모른다는 것이었다.
하긴 거의 30년이 다되가는 지난 79년도 5월에 세상을 뜨신 오영수 선생을 알 리가 없었다.
마침 지나가던 순찰차를 손짓하여 세웠다.
경위에게 양해를 구하면서 오영수 작가가 살던 집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우리도 모름니데이……. 그 사람 일광 사람이 아닙니까?”
“아니? 웅천면 곡천리라는데…….”
“우리가 그런 걸 모릅니데이…….”
나는 황당했다.
대한민국 경찰이 그것도 자기 마당에서 살던 그 유명한 작가의 집을 모른다니…….
경찰은 정보를 가져야 한다는 게 우리네 보편적 생각이다.
나는 불만스러워하는 경위에게 나의 직업을 설명하고 내가 오영수 작가에 대한 것을 신문에 게재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아, 그랬습니꺼? 그람 한 번 알아봅시다…….”
그는 어디론가 무선연락을 취하고 그의 차를 따르라고 했다.
어느 큰 골목으로 들어서더니 차를 세웠다.
차를 세운 그는 밭에서 일하던 아주머니를 불러 세웠다.
“오 선생님 댁은요, 요 옆골목인데 지가 안내해드리지요. 그 오 선생님 사모님은 지금 살아 계신지요?”
그 아주머니는 세월의 무상함도 잊은 듯 30년 전 늙은 사모님을 그때 나이로 착각하고 있었다.
사모님이 세상을 떠난 것을 말씀드리려다 모른 체, 귓가로 흘려버렸다.
그것만이 이 아주머니에게 실망감을 드리지 않을 것 같았다.
오영수 선생은 1911년 경남 울주군 언양면 동부리 313번지에서 아버지 오시영씨와 어미니 손필옥씨와의 사이에서 4남3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호적상으로는 1909년생이다.
자기 나이 또래보다 더 낮추어 기록했을만한 정황이 몇 군데 나타난다.
월주, 또는 난계를 아호로 삼은 오 선생은 9세까지 서당에서 한학을 수학했다.
1928년 언양공립 보통학교를 졸업하는 그는 1932년 일본 오사카 니나와 속성중학 속성과를 수료했으며 35년 일본대학 전문부에 적을 두었으나 각기병으로 중퇴하고 귀국했다.
그는 귀국과 동시에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동시를 발표하는 등 문단활동을 했으나 1937년 동경 국민예술원에 입학하였다.
하지만 도중에 학병을 피해 전전하다가 1938년 국민예술원을 졸업하고 귀국, 동래여고(전 일신여구)출신의 김정선과 결혼을 하였다.
1939년 장녀 숙희를 출생하였고 난계는 만주 신경으로 가서 방랑생활을 하다가 1943년 만주에서 귀국, 처가가 있는 경남 양산군 일광면 산전리로 이사, 그곳에서 김동리와 교우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김동리의 형 범부 선생과는 이미 세교가 있었다.
1945년도에 오영수 선생은 경남여고 미술교사, 후에는 국어를 가르쳤고 1946년 부산 낙민동으로 이사, 장남 윤이 출생했다.
1949년 「남이와 엿장수」가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입선, 같은 작품을 「신천지」에 발표했고 195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머루」가 당선됐으나 6.25를 맞아 청마와 함께 동부전선에서 종군을 했다.
그는 수채화 같은 단편을 무려 200여 편 썼다.
제재는 인간적인 휴머니즘에 바탕을 두고 그 소재는 거의가 농촌이거나 낚시 이야기가 많았다.
1966년 오영수 선생은 평생직장인 현대문학사를 떠난 후 1977년 동림출판사에서 전7권 오영수문학전집을 출간했다.
아시아 자유문학상,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수상했고, 1979년 「문학사상」 1월호에 「특질고」필화사건으로 인한 충격과 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1977년 서울 쌍문동 486번지에서 고향인 울주군 웅천면 곡천리에 새집을 짓고 그 터전에서 댓잎 소리를 들으면서 전원생활을 했다.
작가 오영수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의 문학 향기는 세월을 넘어 필자를 비롯하여 네 명이 이곳을 찾아 나섰다.
작가 오영수씨는 평생 휴머니즘이 흥건한 작품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요람기」가 실려 있다.
그 자유분방한 어린이들의 삶을 통하여 인격의 형성됨을 보여주었던 오영수 문학이 오늘따라 새삼 따뜻하게 느껴졌다.
오영수는 1979년 5월 15일 7시 30분 곡천리 자택에서 간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선산인 언양면 송태리에 묘소가 있었다.

▲ 오영수 선생의 생전 모습     © 독서신문
울산의 시인도 있었네

울산의 정일근 시인은 옛날의 작가 오영수 선생만큼 유명했다.
이번 문학현장 답사 길에는 지나치게 유명한 시인이나 소설가를 만나는 일은 가급적 피했다.
천편일률적인 그들의 작품 세계를 떠나고 싶었는데 울산의 찻집 서가에 꽂힌 이궁로 시인의 시집을 발견했다.
시집 안쪽을 펴보니 그가 쓴 시들이 소나기 맞고 일어선 한낮의 시금치처럼 싱싱해 보였다.
여기 옮겨 적어본다.
주인 없는 오영수 선생의 세를 준 그 빈집의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빈집
웅숭깊은 그늘에 잠겨
서까래만 남은 빈집을 지키는 무화과나무 보인다
그 나뭇잎 사이 파고드는 햇살 아래
잡념처럼 무성한 잡풀, 자라다만 옥수숫대
잠긴 문보다 더 완강해 보이는 무너진 문짝
기우뚱거리면서 버티고 서 있는
빈집의 저 완고함이 내게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홀로 남은
늙은 어머니 얼굴과 같기 때문이다
언젠가 누군가 돌아온 탕아처럼 찾아와
용서를 빌며 무너진 문 다시 세우고
이 빠진 마루에 탁탁 소리 내며 못질 하고
수돗가에 엎어진 이 빠진 사기요강을 부수리라
와장창하며 빈집에 흰 사금꽃 피는 날
무화과나무도 꽃 피우기 위해
빈집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이궁로 시인의 시집에서
이궁로 시인은 신춘문예를 통하여 문단에 나온 시인이다.
텅 빈 오영수 없는 울산 울주를 메울 수 있는 시인을 만나게 된 것은 여행길의 즐거움이었다.
한 시인이 머무르는 울산이 오늘따라 더 커 보임은 그의 시적 감수성과 옹골찬 은유의 그림자 때문이리라.
한국 시단을 이끌 이궁로 시인의 시를 외우면서 40년 기다렸던 빈집의 여운이 가시지 않음은 웬일일까?
오영수라는 맑고 깨끗한 선비 뒤에 댓순처럼 문인이 커오고 있음은 든든한 일이었다.
 
읽고 생각하는 신문 


▲ 이재인(한국문인인장박물관장·경기대 국문학과교수)     ©독서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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