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 권구현 기자
  • 승인 2007.05.25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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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들과 함께 떠난 나의 지난 날"
▲     © 독서신문
 “그들은, 신들은 떠났다”
 
라는 말로 시작하는 이 책의 첫 구절은 그 느린 호흡과 정제된 문체로 사람을 빨아들이는 마약과도 같은 문구다. 신들은 바다를 떠났지만 작가는 독자들을 바다 속으로 빠뜨리고 있다. 쉽고 가볍게, 그리고 빠르게 읽혀지는 요즘 소설들의 트렌드와는 정반대인 느낌이다.
 
 마치 시를 소리내어 낭독하듯 숨을 고르며 읽게 된다. 신들이 떠난 바다 속에서 하늘을 바라보는듯한 느낌, 그리고 그러한 바다 속에서 조금씩 산소를 필요로 하며 죄여오는 혈관들의 숨 조여옴 같은 느낌이 든다. 문장에서 해메이다 보면 시인지 소설인지 그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세계 3대 문학상인 영국 부커상의 2005년은 특히나 쟁쟁한 후보들(가즈오 이시구로, 줄리언 반스, 알리 스미스 등) 간의 치열한 경합으로 인해 ‘황금의 해’라는 별칭까지 얻으며 세계 문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최종 작품의 동점표로 인해 재투표까지 하는 치열함 속에 결국 심사위원들은 ‘현존하는 최고의 언어 마법사’ 존 반빌의 손을 들어줬다.

 존 반빌의 작품으로는 국내 처음 소개되는 이 소설은 주인공의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언어로 풍경을 그려내듯 어린 시절의 순수함, 아픈 기억, 상실감, 삶에 대한 성찰 등을 담아내고 있다. 인생에서 찰나적으로 스쳐가 버리는 순간을 예리하게 도려내어 아름다운 시어로 포착하고 그 순간에 영속성을 불어 넣었다. 그리고 그의 감각은 정말 과하다 싶을 정도로 모든 물체들을 새로운 무언가로 재탄생 시키고 있다.

 반빌의 언어의 마법을 잘 느낄 수 있도록 한 정영목 번역자의 고심 또한 느껴진다. 역자는 문체적 특성을 살리기 위해 최대한 원문의 어순과 호읍을 따랐고 본인이 느꼈던 ‘강철의 잿빛 아름다움’을 독자와 공유하길 바랬다고 밝히고 있다.

 이야기는 미술사학자 맥스 모든이 아내를 잃은 슬픔을 달래기 위해 어린 시절에 여름을 보냈던 바닷가 마을로 돌아오면서 시작된다. 50년 전에는 부자들이 여름을 보내는 별장이었지만 지금은 낡은 하숙집이 되어버린 시더스에 머물며 과거를 추억한다.
 과거 소년의 마음 속을 독차지 했던 그레이스 부인. 그녀에게 다가가기 위해 맥스는 그녀의 쌍둥이 자녀와 친하게 지낸다. 그러던 중 쌍둥이를 돌보는 보모 로즈와 그레이스 부인의 대화를 엿듣고 로즈가 그레이스 부인의 남편을 사랑한다고 짐작한 맥스는 쌍둥이에게 이 얘기를 전한다.
 이야기를 들은 쌍둥이들은 조수가 이상하고 새들이 부자연스럽게 하얗게 보이던 그날, 바다로 향한다. 돌아오지 않는 쌍둥이들, 이는 맥스가 가진 유년의 기억이자 항시 그를 괴롭혔던 어린 날의 상처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아내를 잃은 상실감을 달래기 위해 추억에 기대려 한다. 하지만 그 추억은 자신의 편의에 맞추어 변형되고 수정되어있어 본래의 순수함을 잃어버렸다. 그 추억은 자신에게 있어 또 하나의 슬픔이며 상실감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가 말하는 과거는 단순히 낭만적인 향수가 아니다. 마치 사람이 살면서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된 빚과 같은 느낌이다. 이러한 빚은 세월이 흐르면서 그 이자를 더해 그 본질을 잃어간다. 하지만 주인공은 자신의 기억을 조금씩 더듬어 간다. 이자를 갚고 원금을 갚아나가듯 기억들을 되짚는 과정은 고통스럽지만 그 것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재구축하고 상실감과 삶을 되찾는다.
 
모두가 서로 다른 과거를 가지고 있다. 그 과거가 아름다웠을 수도, 아니면 힘든 고통의 기억일 수도 있겠지만 그 모두가 자신의 재산과도 같다. 맥스가 쓰고 있는 평전의 주인공 피에르 보나르가 자신의 나이 많은 아내를 그리면서도 그녀를 만났던 20대 당시의 가장 아름다웠던 모습으로 그리고 있는 것처럼 누구나 자신의 추억 속에 아름다웠던 한 순간이 있었을 것이다.

 이 작품은 인간이 피해갈 수 없는 상실, 슬픔, 고독을 그리고 있지만 시종일관 조용하고 관조적인 자세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이는 독자들이 진한 추억의 향기로 빠져들 수 있도록 한다. 인생에 있어 더 많은 기억을 가지고 있는 독자라면 이 소설에 좀 더 빠져들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며, 그렇지 못한 독자라도 세월이 흘러가면서 조금씩 쌓이는 기억과 함께 더욱 의미가 더해질 작품이라고 생각된다.

신들은 바다로 떠났다
존 반빌 지음 / 정영목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펴냄 / 271쪽 / 9,000원
 
읽고 생각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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